밤잠 설치며 더위에 허덕이던 게 며칠 전 같은데, 어느새 첫눈까지 내리고 나니 쌀쌀한 바람에 몸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이제 동아리 활동도 막바지로 향해 가는데 남은 시간에 뭘 할 건지 의논해 보자.”
벌써? 한 것도 없는데 선생님의 막바지라는 말을 들으니 시간을 도둑맞은 것만 같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시간을 기록할 수는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저장해 놓으면, 언젠간 슈퍼맨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 테니까…….
“뭔가 의미 있게 마무리해요.”
“의미? 어떤 의미?”
“중2를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의미요.”
“말장난하지 말고.”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자는 의견부터 성곽 걷기, 한옥마을 둘러보기, 봉사, 농촌 체험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우리가 직접 동영상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우리 이야기를 우리가 직접 제작하는 거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청소년들이 만들거나 출연한 유튜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본보기로 선택한 유튜브의 공통점은 무대나 소품 등을 애써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촬영한 것이었다. 우리는 동영상을 함께 보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 동아리가 ‘질병관리밴드’잖아. 밴드는 원래 음악 하는 그룹이란 뜻이니까, 우리가 직접 노래를 하는 건 어때?”
“그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랩으로 만들어보자.”
“가사는?
“우리가 쓰는 거지.”
“반주엔 최예서가 있잖아.”
아이들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모이고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오, 우리가 직접 해 보자. 진짜로 노래하는 밴드가 돼 보는 거야.”
우리는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랩으로 만들자면서 ‘질병관리밴드’의 규칙을 정했다.
-모두 참여하자.
-속사포 랩도 좋지만 느린 랩도 괜찮다.
-라임 맞추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냥 내 맘대로.
-잘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자.
너무 애쓰지 말자고 하면서도 우리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랩으로 만드는 일에 진심이 되었다. 좋아하는 게 재능이라니까, 좋아하는 걸 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썼다가 지우고 또 수정하며 입으로는 계속 흥얼흥얼……, 그러다가 함께 음악실로 뛰어 올라갔다. 예서가 기본적인 코드로 반주를 시작하자 한 사람씩 나와서 자신이 만든 랩을 읽어 보았다.
“랩이 리듬을 타려면 ‘북치기박치기북치기박치기북치기박치기’를 빠르게 반복하면 된다고 들었어.”
다 같이 ‘북치기박치기’를 점점 빠르게 되풀이하니 정말 어깨가 들썩들썩하며 리듬감이 올라왔다. 그러나 침이 사방으로 튀어 서로 더럽다며 소리를 지르고, 도망 다니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래도 첫 시도치고는 괜찮았다. 이어서 피아노만 있으니까 심심하다, 드럼 같은 게 한 방 꽝 때려주면 좋겠다, 댄서도 있으면 더 좋겠다, 등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춤춰 볼까?”
박원재, 작고 나만큼 존재감도 없는 원재, 동준과 천일홍 화분 사건 이후 더 작아지고 서먹한 사이가 된 원재가 쭈뼛거리며 나섰다.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원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원재는 즉석에서 팝핀을 보여주었다. 슬쩍슬쩍 코드만 잡던 예서가 본격적으로 팝핀에 어울리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원재는 커다란 공이 되어 마룻바닥 위에서 팽이처럼 맴돌았다. 공은 거침없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럭비공처럼 높이 날아올랐다. 예서의 연주는 프레스토를 향하여 달려가고 원재의 동작은 점점 더 과격해졌다. 춤사위가 끝나자 동준이 원재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원재가 동준의 손을 잡자 몇몇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어설프게 장단을 맞췄다.
“바로, 바로 이거야, 우리가 다 같이 인간 드럼이 되는 거지.”
“그래, 아무거나 두드릴 수 있는 건 다 두드려 보자.”
“식판이라도 두드리자.”
“그게 난타잖아. 텔레비전에서 봤어.”
쿵딱♬쿵따다닥♬쿵따닥♬쿵딱♬
쿵딱♬쿵따다닥♬쿵따닥♬쿵딱♬
뭐지? 누군가 두 손바닥으로 강렬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리듬과는 사뭇 달랐다.
“누구야, 누가 이런 소리를?”
우리는 어리둥절하여 음악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검은 암막 커튼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건 마치 마술가의 모자 속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처럼 보였다. 커튼 속에서 종잇장처럼 납작하게 눌려 있다가 마술가의 주문으로 불려 나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으악!”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야, 왜? 설주야, 왜 그래?”
“브, 블, 블랙이야!”
검은 바지, 검은 티셔츠, 검은 모자, 검은 마스크, 검은 운동화, 금테 안경, 확실하게 내가 본 블랙이 맞았다. 눈초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꿈이냐, 현실이냐, 꿈을 하도 많이 꾸어서 헷갈리네, 꿈에서나 블랙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브 브 블 블랙? 너희 나 날 브 블 블랙이라고 부 불 불러? 나도 이 하 학교 조 졸업 해 했어. 나도 2 2하 학년 2바 반이 어 었어.”
블랙은 다시 책상을 두드리며 신들린 듯 장단을 맞췄다. 이건 지금껏 우리가 흥얼거리던, 악마의 속삭임을 닮은 기괴한 리듬이 아니었다. 블랙이 책상을 쿵, 하고 내려칠 때마다 가슴으로 쿵, 하는 울림이 전해졌다.
쿵딱♬쿵따다닥♬쿵따닥♬쿵딱♬
쿵딱♬쿵따다닥♬쿵따닥♬쿵딱♬
우리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하나, 둘, 따라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모두 신나게 책상을 두드려댔다. 되풀이하다 보니 우리도 블랙처럼 리듬을 탈 수 있었다. 예서가 리듬에 맞춰 즉흥 연주 솜씨를 발휘했다. 쿵, 딱, 쿵, 딱, 할 때마다 우리가 함께 파도타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쿵, 하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가 딱, 하면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파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물결은 점점 더 빨라졌다. 흥에 겨워 한참을 반복하다가 주위를 돌아봤을 때, 블랙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 그렇다면 하모니카가 바로……, 블랙?”
“헐, 귀신이냐, 우린 이제 영혼을 빼앗긴 거야?”
“다들 블랙을 본 거 맞지? 나만 본 거 아니지?”
우리는 이 리듬으로 랩을 만들기로 했다. 예서는 블랙의 선율을 고스란히 기억하여 반주해냈다. 랩과 팝핀 사이사이에는 우리가 그동안 활동한 사진들도 넣어 동영상을 제작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기록한 다꾸도 사진을 찍어서 올리기로 했다. 나는 드디어 다꾸그램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말하는 모든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을 바로바로 실행에 옮겼다. 반 전체가 이렇게 똘똘 뭉쳐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의견은 있었으나 ‘질병관리밴드’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함께 에너지를 모아서 서로를 응원하며 뭔가 만들어가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나는 랩을 만들기 위하여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수업 시간에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꿈속에서도…….
‘질병관리밴드’ 동영상을 계획하고부터는 시간이 더 빨리 달려가는 것 같았다. 지루한 수업 1분, 1분은 온몸이 뒤틀리게 더디 지나가는데 하루, 또 일주일은 휙휙 바람처럼 흘러갔다. 수업 시간에 창밖을 내다보며 랩을 생각하노라면 바싹 마른 나뭇잎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꽃잎이 떨어질 때와는 달리 공연히 마음 한편이 비어 가는 것 같았다.
이번 주 동아리 모임에서는 우리 중에 누가 중2병에 걸렸을까,라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역시 중2병에 관한 토론이라 나는 메모를 이어갔다. ‘질병관리밴드’의 기록자가 된 것이 내가 중2라는 과정을 통과하는 커다란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꾸가 나에겐 백신이자 치료 약이 되어주었다.
-엄마 잔소리만 들으면 혼란, 불만, 반항이 3종 세트로 폭발해.
-잔소리만 들으면 발병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중2병의 바이러스는 부모들 아닌가.
-정작 바이러스는 우릴 억압하는 어른들이야. 백신은 우리가 맞을 게 아니라 어른들이 접종해야겠어.
-우리가 중2병 백신을 직접 만들어보자. 백신이나 치료 약에 넣고 싶은 거 말해보자. 아무거나 다 돼. 난 킥보드.
-나는 이해, 어른들은 모두 중2를 경험했잖아. 그럼 역할극 같은 거 안 해도 우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겪었잖아.
우린 중2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백신과 치료 약에 넣고 싶은 것들을 상상해 보았다. 별, 강아지, 고양이, 게임, BTS, 동생, 친구, 웹툰, 랩, 할머니, 암치료약, 산악자전거, 팝핀, 혼자만의 방, 질병관리밴드, 축구, 꿈……. 나는 다이어리를 넣었다.
한밤중에 낮에 메모한 것을 정리하면서 다꾸를 했다. 나는 아이들이 백신이나 치료 약에 넣고 싶다고 한 것들을 커다란 주사기 안에 모두 적어 보았다. 그 옆엔 사람을 하나 무심코 그렸는데 다 그리고 보니 블랙, 우리에겐 훌륭한 조력자인 블랙이 있었다. 블랙을 생각하니 랩의 리듬이 주문처럼 뱅뱅 맴돌았다.
나는아직도중2♬태어날때부터사춘기♬
정7각형선을밟고♬영원히성장이멈췄지♬
우리는 아웅다웅, 티격태격하면서도 함께 장단을 맞추며 랩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물질의 특성과 해수에 녹아 있는 물질의 양에 대한 그래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내려 최선을 다했다. 다각형에 대하여 설명하던 수학 선생님은 정7각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건 별과 달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만큼 신비하고 난해하여, 아직도 수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분야라고 했다. 선생님도 정7각형을 작도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언젠가 정7각형의 비밀을 풀어내는 수학자가 등장할 텐데, 그 수학자가 바로 우리 중에서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어쩜 중2병의 백신이나 치료 약을 만드는 일도 너무나 신비하고 난해하여, 앞으로 백만 년이 더 걸릴지 모르는 우주의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나는 매일 밤, 별이 꽃잎처럼 손바닥 위로 살포시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소원을 빌 것이다.
#12
피비야, 나는 잠 속에서 또 잠이 들어. 잠 속의 잠에서도 나는 꿈을 꿔. 마침 나는 꿈을 꾸길 기다리던 중이야. 너에게 물어볼 게 있거든. 피비야, 넌 수학 선생님도 모른다는 정7각형 작도의 비밀을 알아? 도대체 왜 작도할 수 없다는 거야?
설주야, 잘 들어 봐. 페르마 수는 다각형의 작도 가능성과 매우 연관이 깊어.
피비야, 잠깐, 잠깐만,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쓴 지 일 년 만에, 드디어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 주는 거야? 그런데 천천히 말해줘. 내가 받아 적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