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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 Sep 12. 2024

11. 마음이 흘러가 고이는 곳

      

  늦은 밤, 잠자리에 누우니 엄마의 잔소리가 이불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학원, 숙제, 시험, 공부해라. 이건 하지 말고 저건 빨리해라, 빨리해라, 빨리해라……. 그것들은 불 꺼진 천장에서 가득 맴돌며 나를 옥죄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작은 조명등을 켜고 다이어리를 펼쳤다. 지난 시간의 더미를 또박또박 눌러 담은 다이어리를 뒤적이다가 용기를 내어 다혜에게 톡을 보냈다.

  -다들 알고 있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지?

  -또 징징, 진짜 짜증 나네. ㅠㅠ 분명하게 말하는데 네 발가락 따윈, 정말 아무도 관심 없다고!

  꼭 있어야 할 게 없다는 것, 부족하다는 것이 넌 뭔지 모르겠지…….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을 달래려 과자 봉지로 계속 손이 들락거렸다. 늘 과자를 들고 다니는 동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준은 뭘 달래려 손에서 과자를 떼지 못하는 걸까, 궁금했다. 바람이라도 쐬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살금살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놀이터 쪽으로 가면서 보니 그네가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네가 정점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마다 끼익 끼익, 마찰음이 들렸다. 적당하게 컬이 있는 긴 머리가 끼익 끼익, 할 때마다 가볍게 출렁였다. 좀 더 다가가 보니 다혜 엄마였지만, 더는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다혜 엄마는 연신 눈가를 문지르며 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렸다. 고개를 숙이자 다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그때마다 눈가를 닦는 걸 되풀이했다. 빠르게 자리를 피하여 조금 떨어진 쉼터 벤치에 앉았다.

  ‘우리 엄마도 어른이 된 이후에, 혼자 울어본 적이 있을까…….’

  그때, 다혜에게서 톡이 왔다.

  -넌 발가락이 부족할 뿐이지만 한 사람이 통째로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넌 아니? 난 아빠가 없고 다훈인 아빠 얼굴을 본 적도 없어. ㅠㅠ 우리 엄만 갑자기 남편을 잃었고 할머니에겐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 사라진 거야. 너 혼자 온 세상 불행 다 짊어진 것처럼 징징대지 좀 말아. ㅡㅡ

  발가락이 부족한 것과 발가락이 하나도 없다는 것, 아예 발이 없다는 것, 발뿐만이 아니라 다리도 없고 손도 없고 가슴도 없고 머리도 없고, 아예 아빠라는 존재조차 없다는 것, 부족한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없다는 것……. 가슴 한편이 먹먹해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또 톡이 왔다. 다혜는 펭귄이 하늘을 향하여 하이킥을 날리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이런 임티가 있었다니, 나는 반복해서 클릭하여 하이킥을 날리는 펭귄을 보고 또 보았다. 펭귄은 지치지도 않고 짧은 다리로 쉴 새 없이 하이킥을 날려댔다.

  문득 다리가 서늘하고 팔에도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나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넘기며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이 장면, 텁텁하고 비릿하면서도 달착지근한 흙내음, 부지런히 제 몸을 흔들어대는 나뭇잎, 잔 이파리들이 서로 몸을 부비부비하며 속살대는 소리, 쏴아 쏴아…….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비가 오려나…….’

  곧바로 빗방울이 쉼터 유리 천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들, 까칠이처럼 보여도 다혜가 속이 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발가락을 보고 다훈이 입을 아이스크림으로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끌고 가던, 버스에서 목이 꺾이도록 졸고 있는 내 목을 받쳐주던, 펭귄 임티를 보내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는…….

  다혜는 너무 빨리 성숙해버려서, 일찍 애어른이 되어서 엄마의 손길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한 다혜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다혜는 도무지 나에게 요구하는 게 없어. 용돈도 내가 주기 전에는 달라고 하지도 않아.’라며 나를 바라보던 눈길이 떠올랐다. 그 눈빛을 지우려 애쓰면서 비 내리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나면 가을은 좀 더 깊어지고 나뭇잎도 하나, 둘, 꽃잎처럼 떨어져 시간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세수하면서 거울을 보니, 지는 꽃잎을 받으면 첫눈이 오기 전에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아카시아가 생각났다. 그러나 사랑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문득 유리는 요즘 왕자님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봄날에 받아두었던 아카시아와 흰쌀밥처럼 생긴 이팝나무 꽃잎을 찾아보았다. 꽃잎은 다이어리 갈피에서 곱게 마르고 있었다. 코를 가까이 갖다 대자 봄날의 아련하고 향긋했던 기억과 함께, 하모니카 연주를 엿듣던 체육관 장면이 되살아났다. 모든 기억이 아주 머나먼 과거의 장면 같기도 하고, 꿈이 아니었나 하는 착각도 들었다.



  11월에 들어서면서는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비가 내렸다. 오전엔 환하게 햇살이 비추다가도 오후가 되면 슬금슬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능시험 전전날엔 모처럼 화창했으나 전날인 예비소집일에는 눈비가 뒤섞여서 흩날렸다. 수험생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운동장에서 서성였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내 마음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수능시험 날에는 어제 내린 진눈깨비 위로 다시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날의 실내는 더 깊고 더 아늑하고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모처럼의 휴일을 유리와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침대에 찰싹 붙어서 지냈다. 오늘은 내 발가락을 꼭 해방시키리라, 맨발로 하이킥을 날리리라……. 나는 침대에 엎드려 아무렇지 않은 듯 랩을 흥얼거렸지만, 새끼발가락에도 심장이 있는 것처럼 발가락이 두근거렸다.

  유리가 내 맨발을 보고 발목을 잡았다.

  “발가락은 안녕하시냐? 커밍아웃한 감상이 어때?”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시큰둥?”

  “6학년 때 너, 우리 집에서 잔 적 있잖아. 자다가 깨서 보니까 네가 양말을 신고 자더라고, 답답할 것 같아서 벗겼지. 그리곤 곧 다시 신겨 줬어.”

  “큰맘 먹고 한 커밍아웃이 김새네. 왜 말 안 했어?”

  “굳이 왜? 아는 건 꼭 다 말해야 해? 사실은 워터파크에서 너 샌들 잃어버렸을 때, 다른 애들이 볼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오랫동안 걱정하던 매듭이 너무 쉽게 풀려버리니 오히려 허무할 지경이었다. 하긴 끙끙거리던 고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기도 하고, 진짜 큰 걱정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들이닥치는 사고인 것 같았다. 블랙 때문에 놀랐던 일, 천일홍 화분과 다혜의 사고, 다훈이 잃어버렸던 사건처럼, 느닷없이.

  “너야말로 나의 왕자님이 궁금하지도 않냐, 왜 안 물어봐?”

  “궁금해도 꾹꾹 참고 있는 거지. 어떻게 됐는데?”

  “잽싸게 주웠다가 또 찼어. 이젠 다시 주울 생각 절대로 없어.”

  “왜? 어서, 어서 말해 봐.”

  “찌질한 놈, 내가 영화 티켓 샀는데 팝콘도 안 사고, 영화 보는데 주머니 속에서 폰이 붕붕 떨릴 때마다 꺼내서 보는 거야. 영화가 상영 중인데, 정말 창피하고 극혐! 폰 불빛에 언뜻언뜻 스치는 얼굴이 왕자님은커녕 개념 말아먹은 찌질이가 딱 보이더라.”

  “잘했어, 네가 좋다니까 내가 말은 안 했는데 걔가 어디가 잘 생겼니? 먹다 버린 삶은 감자처럼 허여멀겋게 생겨 가지곤, 꼴에 잘난 줄 아는……. 그럼 유리야, 이젠 점심시간마다 배구를 핑계로 체육관에 가진 않겠네?”

  “뭔 소리야? 네가 전에 꿈이 뭐냐고 물었지? 나도 이제 꿈이 생겼어.”

  유리는 배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1년 동안 열심히 해서 전문 배구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계획이라고 했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배구부로 가게 된 것이 배구 선수가 될 운명이었다며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내가 제2의 김연경이 되라고 추켜세웠더니 유리는 정색하고 말했다.

  “내가 왜 김연경이 돼야 해? 난 행복한 세터, 최유리가 될 거야!”

  유리는 공부만 생각하면 막막하고 미로를 헤매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구를 하면서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이 훤하게 그려진다며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반짝였다.

  “리베로가 리시브하려는 자세만 봐도 공이 어디로 튈지, 선수의 동선과 공의 흐름이 다 보여. 공을 토스하려고 뛰어오를 때는 나만의 우주를 받쳐 올리는 느낌이야.”

  나는 유리를 마구마구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유리가 만족할 만한 모든 말을 찾아내어 왕자님에서 찌질이로 추락시킨 배구남을 헐뜯어 주었다.

  “찌질이보다는 차라리 양동준이 오억만 배는 더 낫겠다.”

  “뭐라고? 너,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양동준한테 맘 있냐, 있지? 있군, 있네!”

  배구남을 실컷 물어뜯고 유리를 띄워주려 과장하다 보니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유리는 두고두고 ‘너 동준이한테 맘 있지? 있네, 있어!’라며 날 놀려댔다. 나는 정말 양동준이 마음에 있는 건 절대로, 결코 아닌데,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동준의 눈가에 어둑하게 내려앉은 그늘이 보여 자꾸 마음이 쓰였다. 마음에 ‘있는’ 것과 마음이 ‘쓰이는’ 것의 차이는 뭘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유리에게 설명하기는 너무 난해했다. 어쨌든 마음이 어느 한 방향으로 기울어 흘러가는 것, 그래서 쌓이고 또 쌓여 고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 다음날 새벽녘엔 첫눈이 살짝 내렸다는데 나는 자느라고 보지 못했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서 생성된 얼음의 결정체를 도대체 왜 기다리냐?’라는 감성 파괴자인 과학 선생님의 핀잔이 들리는 듯했다. 우리는 요즘 대박 난 드라마를 흉내 내어 톡을 주고받으며 아쉬워했다.

  -유리 낭자, 못 보았도다. 첫눈을 보지 못하였으니 아쉽고 원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구나. 톡이라도 슬며시 보내주지 그리하였느냐.

  -안타깝게 나도 보지 못하였구나. 첫눈은 내가 봐야 첫눈일진대, 내가 보지도 못한 눈을 어찌 첫눈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우리도 곧 첫눈을 볼 수 있을지니 너무 상심하지 말지어다.

  그날 오전 과학 시간, 어둑한 하늘이 교실 안까지 밀려 들어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될 것만 같았다. 창밖으로는 희끗희끗한 깃털 같은 게 간간이 날아다니고, 갈색 나뭇잎이 사선을 그으며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요술 빗자루를 든 마녀가 뿅, 하고 나타날 것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눈은 칠판을 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마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잎이건 낙엽이건 눈이건, 다 중력에 의하여 낙하하는 현상일 뿐이라며 투덜대던 선생님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선생님의 눈길을 따라가 보니 어둑하던 하늘에서 하얀 솜털을 뭉텅이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녀가 빗자루로 눈구름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눈부시도록 하얗게, 하얗게 변해갔다. 어제는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급변하는 날씨에 마음이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11     

  점심 먹고 책상에 엎드려 깜박 잠이 들었나 봐. 그런데 피비야, 요즘은 왜 블랙 꿈을 안 꾸지? 대신 뭔가 그럴듯한 꿈을 꾸고 싶어. 달나라 같은 낯선 우주도 가고, 무지개를 휘두르며 리본체조도 하고, 어린 왕자와 함께 바오밥나무 아래를 거닐며 별도 보고 싶은데 말이야.

  오늘도 기껏해야 운동장으로 우르르 몰려 나가는 중이야. 함박눈이 펑펑 펑펑.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길게 내밀어 받아먹고 있어. 눈을 받아먹으려고 뱅뱅 맴도는 여자아이들을 남자아이들이 마구마구 놀려대. 광녀들이 단체로 나들이 나왔다고 놀려. 그러는 광남들은 눈과 흙으로 질퍽한 운동장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녀. 슬릭백 스텝을 연습한다며 겅중겅중 뛰어다녀.

  피비야, 슬릭백이 뭔지 알아? 요즘 유행하는 춤인데 공중부양 춤이라고도 불러. 어느 중학생이 춘 춤이 틱톡에서 조회 수 2억을 기록하여 화제가 됐어. 너도 따라 해 볼래? 한쪽 발은 딛고, 다른 쪽 발뒤꿈치를 바닥에서 살짝 떼는 듯하면서 밀어 봐. 이걸 빠르게 반복하는 거야. 그러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여. 착시 효과를 이용하여 공중 부양하듯 보이게 하는 거지.

  나도 지금 공중 부양하는 중이야. 헐, 피비야, 지금 나 진짜로 하늘을 날아, 하늘을 날고 있어. 앗, 그런데 이건, 나는 게 아니고 떨어지는 거잖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는데, 나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한 뼘쯤 커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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