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에 대해서

삶이 지옥일 수도 천국일 수도 있는 이유

by 심하

들어가며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을 하곤 한다. 무엇이 선한지 또는 무엇이 악한지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을 선하니 악하니 하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런데 애초 선한다는 게 무엇이고 악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악해지고 싶지 않은데 그럼 어떻게 하면 그리 될 수 있을까?



선에 대해서


선이 무엇일까? 머리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을 수 있지만 결국 말하자면 선은 착한 것이다. 그럼 묻겠다.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근데 도와준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예를 들어 사람마다 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는가? 그러면 당연히 그 행동도 달라지지 않는가? 누군가에게는 선이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는가? 맞다. 선이란 그렇게 시대와 상황과 문화에 따라 다라지는 기준이다. 그러나 선은 거의 절대적으로써 쓰인다. 선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기도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선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결국 기준에 맞냐 틀리냐 일뿐이다. 그래서 선은 마음에 맞는 선이다. 중의적으로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준 즉, 선이자 우리가 흔히 아는 선이고 둘의 의미는 별다르지 않다. 보편적인 해야 됨과 하지 말아야 됨이 사회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그 사회에 맞게 가공되어서 만들어진 게 선이다. 부모는 아이보고 자기 말을 잘 듣는 아이에게 착한 아이라 한다. 그것은 그 부모의 기준 하에서 인 것이다. 스스로의 선만 들이민다면 세상이 지옥이 된다. 당연 응당 세상이 그에 안 맞고 사람들도 그에 안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떼를 부린다. 투정거린다. 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냐고 말이다.


그래서 선은 그냥 맞음이다. 달리 말해 옳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의 것과 개인의 것이 나뉘고 둘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럼 경험 있지 않던가? 어린 시절 선생님이 하던 말을 거스르거나 부모님의 말을 거스를 때 말이다. 그때 선은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뭔가 아님을 느꼈고 그에 불만을 품었다. 이처럼 개인의 옳음과 사회의 옳음을 상시 충돌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기준 없이 태어나 사회의 기준을 가르침 받다가 스스로가 겪은 것과 종합해서 새로운 기준으로, 나만의 기준으로 변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그 개인의 가치관, 신념, 도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개인에게는 두 가지 선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악에 대해서


우리 중에서 굳이 악해지고 싶은 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하고 싶지 않아도 악해질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했듯 선은 곧 기준에 맞는 것이니 악은 곧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위에서 선에 대해서 말하듯 그러한 선악에 대한 기준 즉,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제 각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에 특성상, 우리는 당연히 맞는 것은 그리되어야만 하고 틀린 것은 당연 그리 되면 안 되는 것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은가? 틀리게 행동했다면 응당 "교정"해 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선으로 남에게 강요하고 폭력을 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틀은 오로지 세상을 둘로만 보아 세상에 대한 폭을 좁힌다. 한번 생각해 보자 착하다 평가받는 이가 실제로 착한가? 또는 악하다 평가받는 이들이 실제로 악한가? 선악은 그리 될 수 없다. 왜냐면 다 다르니깐 말이다. 어떤 행동은 잘 하지만 어떤 행동은 잘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선악이란 구분을 쓴다면 그런 것을 다 뭉개는 것이다. 둘로 나누어 보면 그냥 다 뭉게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나 세상은 선명한 두 색이 아니라 흐릿한 여러 색으로 구성되는데 둘로 보겠다고 뭉게 버리는 게 말이 되는가? 바꿔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별로라 한 사람도 내게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선악이라는 기준은 사람을 잘 담지 못한다. 극단적인 경우가 아닌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어떤 이해에 도움 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좋냐 나쁘냐 라는 기준이 좋다. 왜냐면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이 아닌 것이기에 맘껏 평할 수 있고 또 응당 사람마다 변화한다는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선악이라는 기준만을 쓴다면 이 세상에 선하다는 사람은 손에 꼽힐 것이다. 왜냐 누구나 어떤 부분에서는 별로일 수 있기에 그것을 각자의 기준으로써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예 없다고 단언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은 오만하고 각자의 도리가 있어 필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몰이해하고 자만할 수밖에 없어 트러블이 생긴다. 남의 고통에 남의 아픔에 무관심해서 말이다. 그리고 응당 스스로가 옳다 생각하는 것이 남에게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중요한 것은 결국 나와 너라는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는 둘만이 중요할 뿐이다. 두 사람이 납득해야 관계는 지속되는 것이다. 타인 간의 관계를 들이밀며 그리 해야 한다 해봤자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스스로의 기준으로써 너를 위한 것이라 해봤자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관의 관계가 아니던가? 관계나 당위를 빌려오지 말고 그저 눈앞에 대상과 서로 내가 싫어하는 것은 상대 또한 하기 싫어한다는 원칙하에 상대의 의견을 듣고 소통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서로 통하지 않는 귀나지 않은 딱한 사람들끼리 살아야 하는 것이 될 터이다. 그러나 어렵다. 그렇기에 타인이 필요하다.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써 도와줄 수 있다.


모두들 두렵기에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고 여유가 없기에 더 합리화하고 하기도 한다. 삶의 대부분은 통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다. 몰이해와 불통 때문에 생긴다. 그로 인해서 오해가 생기고 말이다. 세상은 통하려야 통할 수 없는 그저 내 말만 허공에 메아리치는 그런 지옥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분명 서로가 존재하지만 통하지는 않고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두려운 존재이자 두려워하는 존재로써 말이다. 실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해와 피해의 구분또 한 없으니 말이다. 통하지 않는 세상은 지옥이다. 그러나 통하는 세상은 천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윤리에 대해서


윤리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윤리는 그것이 도리화 된 것이다. 인간이 윤리적이라는 착각에서 말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나와 관련된 사람만 챙긴다. 때론 남도 챙길 분이다. 예를 들어 보자 외계인이 인간이란 종을 관찰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아하 인간은 이타적인 존재군 하는 거랑 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뉴스에서 몇 명이 죽든, 뭐 슬프기도 하지만 대부분 무뎌지고 안 느껴지거나 애초부터 별 생각이 안 든다. 말 그대로 별세계니 말이다. 그래서 윤리는 오독이다. 기본적으로 인간본성을 잘못파악하고 그것을 윤리라 파악함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인간에게만 평등하고 자기 쪽에만 더 평등할 뿐이다. 인간다움에 대한 잘못된 파악이다. 인간다움은 이타성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만의 것도 아니다. 동물들도 갖는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일 뿐이다.



글을 마치며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것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한 인류가 쌓아온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 당연 그것은 의미가 있어 내려온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 본의를 잃어버리고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의미를 잃은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애초 그것이 내려온 이유 자체가 우리의 보편성 이기 때문인 것인데 말이다. 어쨌건 거듭해서 말해왔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우리는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별일뿐이다. 때로는 다른 별이 우리 앞을 비추더라도 결국에 우리가 따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별뿐이니 말이다. 빌려온 빛에 의해 앞을 보지 말고 스스로가 정한 세운 별로써 길을 비추어 스스로의 눈으로 바라보아라. 그리고 길이 맞는 이가 있다면 같이 그 길을 걸어간다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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