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그에 대한 죄악과 책임에 대해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유롭지 않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곤 하다. 세상 모든 일이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어째서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이리 힘들게 일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거나 세상모든 일이 이미 정해진 대로 흘러가 내가 무얼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지거나 내가 구속당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내게 자유가 없다고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정말 자유롭지 않을 것일까?
자유가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대로 구속받지 않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 구속은 뭐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 내가 강요를 받았다고 해보자 무언가 하기 싫은 일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치자 그런데 능력과 의지로 따졌을 땐 충분히 저항할 수 있지 않나? 협박을 하건 위협을 하건 무슨 짓을 하건 결국 상대가 내 몸을 마리오네트처럼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결국 내가 그리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한 것이 아니던가? 이건 내가 원한 것인가? 원하지 않은 것인가? 이런 상황자체는 원치 않았어도 결국 그러한 상황에서 스스로 결정한 것 아니던가?
구속에 대해서도 무엇이 구속이란 말인가? 위에 상황이 구속인가? 원치 않는 것을 강요했으니? 그런데 그것은 원래 그러하다. 누가 일하고 싶어서 일을 하던가? 누가 군대를 가고 싶어서 가던가? 다 원하지 않았다. 그렇담 이것은 위에 상황과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던가? 또 애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지 않던가? 우리는 맨날 원하던 음식을 먹고 원하는 곳에서 잠을 자고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사람들과 얘기하던가? 그렇지 않다. 항상 나의 욕구에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나마 맞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우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럼 도대체 자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부자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정해짐이다. 어떤 상황을 그리 되면 안 되는 상황인데, 즉, 부당한 상황이라 한다면 그것은 부자유한 것이 된다. 그렇지 않던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도 충분히 부자유하다. 그리고 옛날에 중세시대 때 농노들이 본인 신분자체에 의문을 품고 부당히 여겼을까? 또 몇 명이나 그랬을까? 그리고 그리 하였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지금 우리들이 하.. 난 경제적으로 일적으로 자유롭지가 않다고 한탄하는 사람을 보고 품는 마음이랑 과연 다를까? 당연한 것 가지고 찡얼 댄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까?
우리는 날지 못함을 부자유하다 여기지 않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고르지 못함을 부자유하다 여기지 않고 내가 어디 태어날지 고르지 못함을 부자유하게 여기지 않는다. 성별을 정할 수 없음을 부자유하다 느끼지도 않고 말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니깐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지 하에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의지 전에 자유란 존재 하지 조차 않는다. 애초 의지자체가 없으니 말이다. 선택할 수 있음이 자유가 될 수도 없다. 애초 왜 맘대로 다 선택할 수는 없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자유와 부자유는 필연적으로 같이 갈 수밖에 없다. 부자유하기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부자유하다. 그리고 그런 부자유함과 자유로움을 결정짓는 당위는 결국 할 수 있냐 가능하냐에서 출발할 뿐이다. 모두가 일을 안 하는 상황은 불가하다. 그래서 그것은 부자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변한다 불가한 것이 가능한 것이 된다면 당연한 것에서 부당한 것이 될 것이다. 즉, 그래야 할 권리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없을 때 생기게 된다. 그런데 애초 불가능하다면 그런 권리를 사람들이 보장한다고 생겨나는 것 자체가 불가해진다. 자유로운 상황과 부자유스러운 상황은 언제나 그리 정해질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악도 마찬가지일 따름이다.
죄는 해서는 안될 일이다. 말 그대로 해서는 안될 것이 죄가 되고 그것은 역시 그저 정해질 따름이다. 그렇지 않던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과는 상관없이,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는 정해진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죄가 되기도 했다. 신분이나 인종같이 말이다. 그리고 책임 또한 그리 정해질 뿐이다. 법은 의도를 중요시 여기긴 하나 의도와 관계없이 과실도 따진다. 법이 사회질서를 더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다. 죄가 없다면 책임도 없다. 책임이 없다면 죄 또한 존재할 수가 없다.
책임을 반드시 부과됐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의도든 의도가 아니든 말이다. 생각해 보라 필시 사람의 책임보다는 자연의 탓이 더 커도 자연을 탓하진 않는다. 탓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철저히 책임을 탓할 수 있는 대상에게로 향하게 된다.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위는 언제나 가능하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 이진 않다. 실제 주요한 원인이 아니라 인간에게 탓할 수밖에 없기에 인간에게만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면책도 그러하다. 어리다고 책임을 면해주거나 정신적으로 안 좋다고 면해준다. 그 말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자연과 같이 의미가 없으면 굳이 질 필요가, 부과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책임의 크기는 정확하게 의지의 크기와 같다. 정확히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을 매기게 된다. 능력만큼의 책임말이다. 이는 불공평하다. 동등하게 매기는 것도 아니고 더할 수 있으면 더 할 수 있는 만큼 책임을 부과시킨다는 것이니, 물론 그렇다고 법체계자체가 이런 논리로 세워진 것은 아니다. 만든 사람도 따르는 그 누구도 이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계속해서 사건이 발생하고 무언가 일이 터진 다면 당연히 그 방향성은 이러한 방향성을 띌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 못하는 이는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항상 해온 이는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져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만큼 하게 된다면 좋게 보겠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고로 언제나 시대나 문화에 따라 그것이 가능하냐 안 하냐에 따라서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는 다를 수밖에 없었고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권리와 의무와 자격은 그저 사람들이 만든 개념이자 그저 보장할 따름이니깐 말이다. 그것은 신이 주어준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의 인정 일뿐이지.
우리는 우리의 의지 대로 행동한다. 우리가 세운 나름의 기준대로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 그 자체를 선택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은 선택될 뿐이다. 흔히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나는 그리 생각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왜냐면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써 움직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리 생각하고 이리 행동하는 데에는 나의 과거가 존재하기에, 생각해 보아라 어릴 때 특정한 걸로 인해서 특정한 것을 좋아한다면 당연히 그와 관련된 걸 하러 갈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기에 미래는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나의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나의 의지가 발한 대로 나는 나의 미래로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결정되어 있다고 절망하거나 슬퍼할 이유도 없다. 나는 그저 지금껏 하던 대로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의지를 발할 뿐이니깐 말이다.
그렇다고 나는 법체계의 붕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법체계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깐 말이다. 우리는 책임을 통해서 그 책임의 수준까지 그 사람의 행동을 끌어낸다. 어릴 때는 덜 지다가 어른이 되면 될수록 더욱더 지게 됨을 통해서 책임을 지게 끔, 질 수 있게끔 단련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저 사람도 했으니깐 당연 그와 동일한 너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책임을 부과하고 의무를 부과한다. 그런데 애초 그리 행동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능력과 책임이 맞지 않다는 불일치를 얘기해 준다. 애초에 초과해 버렸다는 것이다. 능력이 책임에 미달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들에게는 무엇을 하든 항상 미달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을 더욱더 법을 어기고 책임을 아예 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리 하나 이리 하나 똑같으니 말이다. 고로 모든 의무와 책무는 점진적으로 능력의 발달과 같이 부과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책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자들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그리운 아이 때로 돌아가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