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타(他)를 느낄까?

집단과 소속감에 대해서

by 심하

들어가며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가 참 많다. 그럴 때 그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정말로 강렬하게 이 사람은 이 집단은 나와는 다르다는 그런 이질감을 느끼고 또는 강렬한 소속감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집단이 형성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럴까? 왜 소속감을 느끼고 어떨 땐 이질감을 느낄까?



자타(自他)의 구별


우리는 왜 동질감과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정확히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진화론적으로 그것이 도움이 됐기에 그랬을 것이다. 무언가 다른 싸한 사람은 거리고 꺼리는 것이 도움이 되고 비슷하고 같은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기에 그랬을지 모른다. 쨋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느끼게 되었는지 보다. 우리는 결국 그러한 감정들을 느끼고 그에 따라 우리가 판단하고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러한 판단들에 따라 타인을 결정하고 그에 따른 대우를 결정하게끔 되고 그것은 차별과 편견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그러한 이질감이나 동질감으로 우리는 집단을 형성하거나 소속감을 갖지만 우리의 감정은 유도하나 그러한 속함 자체를 결정짓지 않는다 결정짓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개념이다. 우리는 그러한 감정들을 토대로 남과 우리를 결정짓는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고리를 형성한다. 그러한 인식은 그러한 감정을 만들고 그러한 감정은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 낸다. 가족이라는 인식은 가족이라는 감정을 들게 하고 가족이라는 감정은 가족이라는 인식을 들게 끔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집단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다. 집단에 대한 공격을 스스로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집단을 나같이 여기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집단을 소중히 한다. 그 방식이 제일 효율적이어서 그런 건가 싶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집단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스스로와 집단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 대한 악감정은 그 국민에게까지도 그대로 내비친다. 그리고 스스로도 본인의 국가가 공격받을 때 분노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당연 큰 문제가 된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세상은 쉬이 둘로 나눌 수는 없다. 나눌 수는 있어도 그것이 효과적인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아닌 것임이 확실하다. 한 나라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은 다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집단과 그 속한 개인을 동일시하게 바라보는 방식으로써 우리는 짐짓 개인을 섣부르게 판단하고 집단에 대한 악감정을 그대로 내비친다. 당연 그 악감정을 받은 상대도 공격받은 것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내비치고 그것은 당한 상대가 속한 집단에도 마찬가지인 것이 된다. 일반화해 판단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리 행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지 않을 수 없다. 집단의 잘못을 개인에게 욕하고 집단에 대한 공격을 스스로에 대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말이다. 집단은 도구에 불과하다.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집단은 아무런 감정이 없고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사람들 그 자체는 아닌 무언가이다. 그것은 이미 사람이 아니고 되려 자연에 가까운 것이다. 그 자체는 무엇도 아닌 허상이지만 그것은 만인은 지배한다. 그리고 그 지배권은 우리 자신들이 준 것이다. 고삐를 잡아야지 되려 고삐에 휘둘리면 어떡하는가?


물론 그러한 방식은 집단이란 여러 사람이 모인 개념뿐인 허상을 지키는데 도움을 주긴 했다. 그래서 집단은 변질되기도 한다. 그 세를 불리기 쉬울수록 그것이 살아남기 용이한 형태로 말이다. 종교를 보아라 처음엔 종교가 아니라 그저 사상에서 시작했지만 점점 종교화되었다. 그리고 점점 원래 의미와는 동떨어진 것들이 추가되었다. 사람들의 희망과 요구를 담는 것을 말이다. 그래야 더욱더 잘 믿고 더 번성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집단은 기본적으로 배타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뭐 협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외는 전부 결국 한정되어 있다면 애초 집단을 나 같이 여긴다는 것 자체가 최우선순위로 따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머지는 밀려나지 않겠는가?


타 라는 인식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밖이다. 그래서 우리는 차별의 근본은 타자화이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인간으로 생각함은 나와 같이 대함이다. 왜냐 논리상으로 따졌을 때 나는 인간이고 재도 인간이라면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공평성과 형평성은 고개를 든다. 왜 같은 인간인데 대우가 다른가? 우리는 그걸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바꾸고 싶다. 귀찮기에 싫기에 그래서 당연히 우리는 합리화한다. 재는 인간이 아니라고 그러면 우리는 이제 다르게 대우해도 정당한 것이 된다. 이런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운 기준은 우리의 도리가 우리의 행위규범이기에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뀐다면 내가 틀렸다는 것이 되고 나의 모든 것이 말 그대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내가 행해온 행위가 말이다. 어떤 국가가 싫다고 국가와 국민을 동일시하고 그 국민에게 안 좋은 재난이나 재앙이 터졌을 때 꼴좋다 하는 행위같이 집단에 잡아먹힌 거다. 집단과 스스로를 동일시해서, 반대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욕을 받았을 때 스스로가 받았다고 생각해 반박해하는 것 이러한 모든 행위는 스스로를 집단의 일부화 한 거나 다름없다. 이러한 틀을 세상을 왜곡한다. 우리가 집단의 종이 되게끔 하고 세상을 집단으로 나누어서 차별하고 편견을 가능하게 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제나 우리의 인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집단의 분화는 개인에게서 출발한다. 만일 공통된 이념과 그에 대척대는 무언가가 있다면 하나가 된다. 그래서 언제나 집단은 적이 있어야만 성립가능하다. 왜냐면 결국 모든 인간에게는 다름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점을 찾자만 끊임없이 찾아 그 이름을 댈 수 있다. 그러나 공통된 가치아래라면 그것은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이 사라진 순간 그런 공통의 가치는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집단은 해체된다. 그렇지 않던가? 언제나 학창 시절 반에서는 그룹이 나뉜다. 그리고 아이들은 끼리끼리 논다. 그러나 체육대회 날이나 그런 반끼리 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하나가 된다. 언제나 그렇다. 우리는 타인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꺼림을 느낀다. 이자와 난 다른 이라고 그러나 그런 것을 한 꺼풀 벗겨내면 있는 것은 그저 나와 같은 인간이다. 모든 것은 언제나 범위와 그 정도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다르다 보면 달라질 테고 같다 보면 같아질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일 뿐이다. 개성과 차이는 언제나 남에 비추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글을 마치며


결국 지속적으로 내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좁디좁은 창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저 보고 싶은 부분만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군맹무상과 같이 말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생각한 세상은 악하거나 선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없지도 않다. 세상은 언제나 그저 있을 뿐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바꿔보는 것은 어떠한가? 막연한 꺼림으로 저 사람과 나를 가르고 전혀 다른 별세계에 산다고 나눠놓는 대신 그저 한번 다가가 보고 말 걸어 보고 같은 인간임을 느껴보는 것이 어떠한가? 그러다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거나 좋은 스승 좋은 후배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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