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의식과 인식에 대해

by 심하

들어가며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의문들을 마주하곤 한다. 그러한 여러 의문들 중에서 우리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여전히 같을까? 라든가 어떠한 것의 정체성, 본질 같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한다. 오늘은 그런 것들에 대해 한번 얘기해 보겠다.



정체성에 대해


나는 무엇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의 나는 나인가? 나가 아닌가? 나라 표현했으니 나 아닌가? 그런 수많은 의문들이 덮쳐올 텐데 일단 확실한 것만 남겨보자. 나는 결국 무엇인가? 남과 나를 가르는 것은 무엇이지 외모라든가 성격, 목소리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흔히 내가 다른 사람이 된다면 한다. 즉, 나의 겉모습은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럼 내 기억이 곧 나인가?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해보자 그럼 나는 내가 아닌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나다. 즉, 나라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다. 내 외모가 바뀌어도 기억이 바뀌어도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나이다. 기억을 잃어도 외모가 바뀌고 성격이 바뀌어도 내가 항상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확실하니깐. 만일 내가 무언갈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그걸 느낄 수가 없다. 잠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타인은 다르다. 왜냐 우리는 타인을 스스로처럼 느낄 수 없다. 스스로는 느끼지만 타인은 느낄 수 없다. 그래서 타인은 오로지 외관으로써만 정의된다. 그래서 사람이 변했다는 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혹은 관계로서의 정의로써 말이다.


그리고 같다는 건 언제나 그 범위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과 그림과 실제 사과가 있다 해보자 어떤 부분에서는 같은 사과다. 모습으로 쳤을 때 말이다. 그리고 만일 완벽히 동일한 것으로 따진다면 존재하지 않다. 어떤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일 뿐이기에, 그래서 과거의 나가 나라는 것은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관계로써의 정의냐, 지나온 궤적으로써의 정의냐, 기억으로써의 정의냐에 따라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과주스를 보자 사과가 별로 안 들어가 있지만 그건 사과주스이다. 왜냐 그것은 특징으로 따졌을 때 같기 때문이다. 그것의 구성은 그것의 특징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 대한 정의는 달라진다.


혹시 테세우스의 배를 아는가?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를 사람들이 보존을 했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테세우스의 배의 판자는 모두 교체되었을 텐데 그것이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런데 위에서 나온 바를 테세우스의 배에 적용할 수는 없다. 테세우스의 배는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다. 그 속성을, 타고 왔다는 속성을 정의할 수가 없다. 누군가에 손길이 닿은 물건의 표면을 갈아낸다면 그것은 아닌 것이 되는 것인가? 애매하다. 만일 테세우스의 배를 테세우스가 탄 배의 종류라 친다면 같은 것일 것이다. 그 형태만 유지한다면 될 테니깐 굉장히 애매한 문제다.


왜냐면 이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온 속성은 실존하는 특징이 아니라 그저 사람이 정한 것일 뿐이라서 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만졌던 속성을 지닌다 해보자 그럼 만약 겉 부분을 갈아낸다면 그 속성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냐? 또는 이미 누군가의 손이 닿은 순간 그 물건 자체가 무언가로 변하게 된 것이냐? 이렇듯 언제나 실제에 기반한 것은 실제가 사라지고 망하지만 가상에 의존하는 것은 실제에 의존하지 않기에 별개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과 형식이 나뉜다. 집단은 오로지 말로만 망한다. 모든 개념은 개념으로서만 망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가 아닌 가상은 오로지 가상으로만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실존하지 않기에 사람이 정하는 대로 형성될 따름이다.



존재에 대해


존재 즉,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는 것일까? 생각해 보아라 우리가 무언가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없음에 대하여 있음을 생각하고 있음에 대하여 없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물을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또 사람은 공기를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표현에서 나오듯 비었다고 표현한다. 공기가 있음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한평생 살았다면 절대로 공기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차이이다. 생각해 보아라. 내가 무언가가 있다고 느낀다는 것은 바로 어떠한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없다고 느낀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고기가 물에 사는 것을 모르듯이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有無는 오로지 항상 같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원이 하나 있다고 치자 그리고 그러한 원이 한쪽은 검은색 한쪽은 하얀색으로 되어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왼쪽의 검은 부분이 점점 커진다면 오른쪽 부분은 작아질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왼쪽 부분의 검은 부분이 커지다고 오른쪽이 사라지게 되었다면, 그 남은 것이 왼쪽이겠는가? 그것은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무언가, 전체일 뿐이다. 있음과 없음도 이와 같다. 공통된 무나 공통된 유나 그것은 우리가 아는 유나 무가 아니다. 인지될 수 없는 무언가이다.


예를 들어보자 선척적 시각장애인이 혼자 살았다고 해보자 그 사람에게 검은색의 개념을 없을 것이다. 만약 시각이 있는 이가 눈을 감았을 때,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할 수도 있지만 온통 새까맣다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시각이 원래 없던 이는 애초 인지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왜냐면 그것은 애초 알 수도 없었으니깐 안 보인다는 개념자체가 없으니깐 말이다. 마치 그런 것과 같다. 무언가를 까먹었는데 그런 무언가를 까먹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것이다.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왼쪽, 오른쪽의 비유를 할 때 왼쪽이 커져 그저 검게 칠 해졌을 때, 우리가 그것을 왼쪽이라고 또는 검은색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전 과정을 봤었기 때문이다. 만일 처음부터 그렇게 가득 채워진 채로 봤다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인식되었거나 아직 인식되지 않았지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누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 공통되게 있어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인지, 그 차이를 알게 된다면 존재하는 것이 된다. 또 반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원래는 차이가 있었는데 그 차이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전의 개념으로서 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낮이 사라져 평생 밤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시대 때 태어난 사람에게 밤은 없다. 그냥 하늘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밤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의식에 대해


의식이 무엇일까? 의식한다는 것은 생각한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감각의 재현, 느낌을 떠올리는 것이라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의식과 무의식은 무슨 차이일까? 생각해 보면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의식이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던가? 어떤 문제를 풀 때 그냥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해답말이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모르는데 결과만이 남은 것 말이다. 과정이 사라지고, 그래서 나는 이것을 이리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느낌을 떠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정보들을 연결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과까지 이르기 위한 정보의 사슬은 분명 존재할 텐데 결과만 나왔다는 것은 그러한 연결고리가 끊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생각을 할 때 과정까지의 고리가 연결되지 않아 의식할 수는 없지만 결과는 내게 의식되어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결과까지 이르기 위한 과정은 필시 선행되었을 테고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이 남았다. 그리고 생각은 결국 느낌의 떠오름이기에 의식은 상시 떠오르는 것이고 무의식은 떠오르지 않는 불이 꺼진 상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한 정보, 느낌들의 연결됨, 연결들을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연결이 끊어지고 결과만이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면 의문이 생긴다. 왜 중앙이 있냐는 것이다. 아까 말했듯 상시 의식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나뉘게 되고 그러한 연결이 중앙을 중심으로 되는데 왜 그러냐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신호라고 생각한다. 생존의 중요한 정보는 상시 선명하게 의식되어서 상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느낌들은 날 텐데 왜 특정 것만 의식되는가? 그 신호가 약해서 묻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의식은 서로 단단히 연결된 느낌들과 떠오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존에 중요해 상시 떠올려지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의식이고 중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식은 방향성이 있다. 싫어하는 것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호오와 의식은 왜 존재할까? 나는 이리 생각했다. 호오는 곧 판단이다. 그리고 생각도 곧 판단이라고 말이다. 판단을 위해서 생각이 존재한다. 판단 없인 생각도 없고 그는 의식이 없음을 얘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오가 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호오를 추구하거나 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엔 그 자체라는 것이다. 좋아해서 가까이하는 게 아니고 싫어해서 멀리하는 게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 곧 가까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몸은 분명 호오가 있고 방향성이 있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그런 기관은 없는데 말이다. 나는 항상성을 얘기하겠다. 특정한 수치가 있고 그 수치를 유지시키기 위해 자동으로 작동한다는 것이고 그러나 과정이 판단이라는 것이다. 전기적 작용과 화학적 작용이 서로 주고받으며 특정한 수치를 위해서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그 과정자체가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구조 자체가 그리 향한다고 생각한다. 물이 아래로 떨어지듯이 당연히 우리는 호오를 향해 움직인다. 애초 그런 구조라는 것이다. 그런 호를 향한 방향이 안정된, 변화하지 않는 방향이고 오를 향한 방향은 불안정한, 변화가 잦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우리가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된 것이다. 그런 생각의 집합이자 모임일 뿐이다. 왜냐 우리는 생각하고파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언제나 될 뿐이고 우리는 우리가 생각을 했다고 여긴다. 그런데 생각한 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생각인 것이다. 그런 생각의 집합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특정한 판단 기준이 있는 모든 것이 의식이 있다고 믿는다. 식물도 AI도 말이다.


인식에 대해


그리고 나는 형이상학적인 것에도 딱히 좋게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인식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인식만이 전부다. 그런데 우리가 나눈 모든 토의는 인식의 영역인데 자꾸만 외부를 얘기한다. 그것은 전제를 깜박한 것이다. 모든 말은 항상 전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가끔씩 무시되고 당연 논리상 문제를 일으킨다. 외부는 알래야 알 수가 없다. 밝혀지기 전까지 말이다. 그것이 대두되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이리 생각한다 있음에 대해 없는 거고 없음에 대해서 있음이 있는 것이다. 있음도 없음도 아닌 것은 어떠한 변화도 없는 정적인 영원이라 생각된다. 왼쪽이 커져 다 덮으면 그건 더 이상 왼쪽이 아닌 그 전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정적인 상태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아직 인지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인지되지 않는다면 그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이 바뀔지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칙들이 바뀔지 아닐지도 모른다. 정적인 게 다시 유와 무의 상태로 나뉘는 지도 나는 알 수가 없다.


의식이 무엇일까? 의식은 달리 말하자면 생각한다 하고 표현할 수 있을 테다. 그럼 생각은 무엇인가? 생각은 곧 감각의 재현, 즉, 느낌의 떠올림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가리킨다. 나는 이전에도 말했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언제나 진짜는 그저 먼저 들어온 것일 뿐이고 그것이 먼저 사실로써 자리 잡을 뿐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 세상이 실제인지 아닌지에 대한 또는 통속의 뇌라든지 그저 재생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모든 구분은 의미가 없다. 왜냐면 결국 똑같이 우리에게 느낌으로써 들어올 뿐이니깐 그리고 결국 우리가 느끼는 것이 곧 우리의 세계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리 생각한다. 세계는 그냥 우리가 느끼는 것 그 자체일 뿐이라고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이다. 이리 말하면 이리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가 느끼는 것 그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 왜냐 감옥이 있다. 해보자 우리는 그 감옥창살로 보이는 밖을 보고 밖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할 수 또 있다. 그런데 만약 세상을 게임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런다며 감옥창살밖보이는 배경이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그래픽만 있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밖이라고 느낀 것조차도 모두 결국에 내가 느낀 것인데, 결국 내가 느낌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결국 그저 보일 뿐이다 보이는 게 다다. 그 이상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 있어 보이는 흔적이 그저 그 흔적만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너머를 얘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지는 곧 나다. 너도 나다. 생각하는 나와 인지되는 세상은 다르지 않다. 둘 다 똑같은 느낌으로써 다가올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인식되는 느껴지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뿐이고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런 느껴지는 세상이다. 왜냐면 느낌이 곧 나니깐, 세계도 곧 느낌이니깐 말이다. 인식이 인지가 곧 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같은 것은 같다는 말 뿐이다. 있는 것만 다룰 수 있지 없는 건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연역이나 귀납이나 순환논리나 모순이나 다 같은 것이다. 다 같은 세상, 인지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던가? 어떤 사실도 결국 인지 내에서 인지 내를 가장 잘 추측하는 것을 골라내었을 뿐이다. 모순은 인지로써 인지전체를 보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로지 인지로서 인지의 일부밖에 볼 수 없다. 눈으로 눈을 볼 수 없듯이 그러나 파편적으로는 가능하다. 한순간에 전체를 다 볼 순 없지만 부분 부분을 본 뒤에 나중에 합치는 식은 가능할 것이다. 마치 고개를 돌려 전신을 볼 수 있듯 말이다.


인지 전 세상이 어떻냐 물을 수 있지만 나는 답할 수 없다. 나는 내 인지하에서만 답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결국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인 인지 하에 과학을 이용하겠다. 왜냐면 그것도 내 인지하에 것이니 말이다. 과학과 철학이 어긋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다 끼워 맞추기 아니냐 할 수 있다. 근데 그게 답 아닌가?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게 답 아니던가? 무언가 내가 바라던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어서 실망인 것인가?


인간은 미지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미지를 인지 안에다 가둔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고 그것을 특정한 틀로 규정해서 틀 안에 있는 불확실성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건 예상되는 것이니깐 설령 그 예측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예를 들어 완전 랜덤이라는 일도, 그 일이 랜덤이라는 것을 알면은 안심한다. 사실 알던 모르던 똑같이 위협인건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지에 대한 규정을 멈추지 않고 그럼에도 불안해서 명확하고 정확한 결과를 바란다. 그래서 절대성을 바란다.


글을 마치며


글을 다 읽고 나서 여러 의문점이라든가 비판이 필요한 부분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부디 알려주길 바란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내 나름대로 살면서 고민해 왔던 여러 의문들에 그나마 내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리해서 쓴 것이라. 당연히 틀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뭐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당당히 얘기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얘기한 것에 대해서 의문과 비판이 합당하다면 그런 것들을 받아들여서 더욱 세상을 더 잘 해설하는 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모순점이라든가 문제점이 보인다면 부디 얘기를 해주기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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