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진리가 있을 수 없는 이유

당위와 절대성에 대해

by 심하

들어가며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올바름을 바라고 올바름을 위해 나아간다. 삶을 살아가며 끝없는 의심의 파도를 헤쳐 나아간다. 스스로 일부로 그릇되게 행위하고 싶은 이는 없기에,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행위를 할 때 바람직했나 하곤 뒤돌아 보곤 한다. 스스로가 정녕 옳았는지 말이다.


스스로가 그릇된 행위를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실망과 죄책을 안겨주기에 그래서 우리는 확실하고도 변치 하고 영원하고도 확실할 그런 북극성을 원한다. 이랬다 저랬다 변하는 것이 아닌 온전한 것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별을 바라왔다. 그런 변치 않고 영원하고도 확실한 옳음을 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하늘에 그런 별은 없다. 절대적으로 항상 변치 않고 보편적으로 옳은 그런 것 따위는 결코 존재자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애초 옳음의 속성 자체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옳음에 대해


왜 옳음의 속성자체가 절대적 옳음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일까? 그 이유이전에 옳음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옳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언가에 대해서 옳다는 것이다. 어떠한 기준에 대해서 옳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로 사람마다 저마다 가진 기준이 다르기에 당연 옳음도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남과 다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폭력을 가할 수 있게 된다. 남이 그른 짓을 하고 있다면 당연 교정해줘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지랖을 낳고 옳음이 그름을 없애는 것은 정의로운 것이니 우리는 각자의 옳음으로 타를 향한 폭력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 되지 않으려면 참견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옳다고 두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기준이 변한다면 그에 따른 옳음도 달라지게 된다. 어린 시절 사회와 부모로부터 그들의 기준을 물려받고 그러한 기준대로 판단을 이어나가다가 점점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흐르며 그 기준이 점점 변화해 가고 또 문화권마다 옳다고 또는 선하다고 평가받는 것이 다른 것이 그 예이다. 결국 선이라는 것도 어떠한 사회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행위나 그러한 것들을 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이란 그 사회에서 옳다 여겨지는 것 일종의 미덕인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옳음이 형성될 때에는 모든 것을 옳음으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니 옳음이라는 게 존재하려면 기준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러한 기준조차가 없는데 어찌 분별하여 받아들이겠는가 애초 판단의 선제조건은 기준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분별적으로 밖에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마치 오리는 꽥꽥 병아리는 삐약삐약 같이 그저 경험하는 대로 머릿속에서 구성되고 조직될 뿐이다. 부모의 말과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끼리 연결 짓는 것이다. 그러니 그에 어긋나는 무언가를 본다면 그것은 응당 부당한 것이 된다. 즉, 맞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이냐 또는 가상이냐의 구분또 한 나중에 나름의 분류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적 표현인 비유는 그저 비유한 것이 아니다. 느낌으로 따졌을 때 그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듯한 마음이나 따듯한 음식이나 둘 다 동일한 느낌을 주기에 그것에 구분이 필요 없다. 언어적으로 물리적 따듯함과 심리적 따듯함은 따로 구분된 단어로 존재하지 않듯이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깰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불완전한 세계를 물려받고 그러한 세계를 스스로 계속하여서 만들고 다시 깨트리는 것을 반복해내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생긴 우리의 한계를 언제나 다시 돌파해 나가며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계를 미워하지 마라. 한계는 우리는 제한하지만 보호하고 또 구성하게 하는 그릇이다. 한계 없이는 우리는 애초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그 기반 없이 어찌 생각할 수가 있겠나.


그런데 그러한 변화하는 기준의 올바름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올곧아야만 하는데 만일 그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준이 변화한다는 것은 그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던가 기준의 변화는 그 또한 옳음에 부합해야 하는데 그러한 옳음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당연히 기준이 바뀐다면 옳음도 변화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우리는 무언가 절대적인 뭔가가 있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올바름을 위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당위에 있다.



당위와 절대성에 대해


당위는 말 그대로 어떠한 것이 합당한 지 그 기준이자 합당함 그 자체이다. 우리가 무언가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면 그 모든 것은 당연 당위에 맞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옳음을 추구하고 위하기에 우리는 당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당위에 당위가 있던가? 뭔 뚱딴지같은 소리라 할지 모르겠다. 당위에 당위가 있냐니? 그렇다. 당위에 당위가 있냐는 말은 확실히 이상한 말이다. 애초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자로 자를 재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것은 확실히 문제이다. 우리가 맞다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당위가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당위가 왜 있는지, 왜 당위로운지, 왜 당위가 되었는지 모르는 게 말이 되는가? 도대체 이러한 당위는 어디서 솟아난 거란 말인가?


답하자면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로부터 이다. 생각해 보아라 우리가 이건 옳은 것이 아니라 했을 때 그때 왜 아니라 했는가? 아닌 게 왜 아닌 것인가?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우리에게 그런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당위를 준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바로 우리가 어떠한 것을 해야 된다 고 생각했고 그 자체가 당위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응당 합당하다 느껴 행하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절대성도 바로 우리에게서 온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해야 한다 믿었기에 우리가 그러한 의지를 보였기에 이것은 해야 되는 것이 되고 그에 반하는 것과 상황은 당연 의지를 거스르는 부당한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 자신의 법칙인 것이다. 고로 우리의 모든 당위와 절대성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내게 있어서는 절대적이나 상대의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라지 않았던가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기를 그런데 우리는 경험 속에서 절대적인걸 보지 못했다. 그래서 절대성은 추방당해야 했다. 우리의 인식바깥으로,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저 먼 하늘로 말이다. 그리 되어서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 절대성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성은 이랬다 저랬다 휘둘리면 안 되기에 휘둘릴 수도 없는 고정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이랬다 저랬다 일렁이는 이곳과는 달리 명확하고 분명한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성이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의 진리는 절대적인 무언가이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니


정리하자면 당위는 바로 우리의 행위규범 그 자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해야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말이다. 그리고 당위는 우리의 호오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 그를 통해서 하지 말아야겠다 한 것이 곧 우리의 당위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올바름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올바름이 곧 추구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어떠한 것을 할 때 우리가 그것이 당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그 당위자체가 하고 싶다 또는 해야 된다 라는 말인 것이다. 그렇기에 당위가 있다는 해야 된다는 말과 동치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정확히는 의미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이리 하든 저리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당위가 없기에 의미를 부여하든 부여하지 않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 의미를 잃고 추락한다. 의미를 떠오르게 하거나 고정시키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말 뿐일 테니 우리는 말로써 어떠한 것이든 띄우거나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그 어떤 의미도 이유도 없다. 산에서 물이 흘러 강을 이루고 강이 바다를 이루듯이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그저 일어나듯이


그리고 당위를 또 다른 당위로써 판단해 그르다고 하는 것 그 조차 당위일지니 그저 그리 될 뿐인 것이니 물이 흐르고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듯 그저 그런 것이다. 필요가 있기에 그리 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리 되었을 뿐인데 후에 그 이유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말로 표현될 필요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그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의 존재이유도 그 의미도 그 가치도 그저 그냥 그렇게, 그래서 당위는 곧 행위규범이자 판단규범이다.


그러니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같다. 같은 것은 같다는 말뿐이다. 인간 사고의 근간이자 근본은 그저 같은 것을 같게 보는 것이고 모든 것은 그것에서 출발한다. 결국 모든 것은 추락하고 확실한 것은 오로지 같은 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뿐이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 당연한 것이 되고 나의 의지가 곧 당위이고 내가 맞다 하면 맞는 것이 되고 틀리다 하면 틀린 것이 된다. 당위가 있다 하면 당위가 있는 것이고 당위가 없다 하면 없는 것이고 의미가 있다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 하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충족할 뿐이다.



글을 마치며


그러니 분노할 이유도 기쁠 이유도 슬플 이유도 원망할 이유도 억울해할 이유도 없다. 그리 해야 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관하거나 절망할 필요도 없다. 또 도덕과 윤리나 법이나 예절을 어길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애초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위해서 당신이 느끼는 해야 됨을 체계화한 것이니 그 의미를 안다면 조금 더 좋게 보완하고 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지 않던가? 그저 그에 맞게 스스로 길을 정하고 스스로의 별을 향해 나아가면 될 것이다.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을 찾아 헤매지 말고 고개를 내려 스스로의 별을 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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