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차

연필이 주는 위로

by 글쓰는 달

나는 연필을 좋아한다. 글도 쓸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고 화가 날 때 북북 선을 긋기만 해도 좋은 연필.

조금 전문적으로 접근하면 연필은 H와 B로 나눌 수 있다. H앞에 붙은 숫자가 커질수록 연하고 단단한 심이고 B는 반대로 숫자가 커질수록 무르고 진하다. 평소 필기할 때는 2B를 선호하고 그림 그릴 때는 6B를 좋아한다. 연필이 단단하고 굵기가 가늘수록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해서 잘못 그렸을 때 자국이 깊게 남아 수정하기가 어렵고 그만큼 내 실력이나 실수가 아주 잘 드러난다. 그리고 바늘처럼 끝이 날카로워서 종이를 벅벅 긁게 되는 느낌이 불편하다. 그리고 연필에 힘을 꾹꾹 주어 눌러서 써야 하는 게 힘들다. 그에 비해 진하고 부드러운 연필은 내가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또렷하게 자신의 색을 보여줄 수 있어서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하루 24시간 중 12시간을 연필과 보내야 하는 기간이 있었다. 그때는 커터칼로 연필을 내게 맞게 다듬고 또 흑연이 엄지발톱에 낄 정도로 열심히 그려댔다. 하루 종일 연필과 씨름하고 나서 한밤중에 나를 데리러 오신 아버지의 차에 타면 내게서 나무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 말이 난 싫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그림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한참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리다가도 냉정을 찾고 객관적으로 내 작품을 바라봐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커다란 파란 플라스틱 통 앞에 서서 연필을 깎았다. 연필을 깎고 나서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내 그림과 관찰대상을 비교하고 또 다른 입시생들의 그림을 보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실수나 아쉬웠던 점이 잘 보이곤 했다. 어느 날은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실수로 놓쳐서 그만 허벅지 위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청바지 위에 두꺼운 캔버스 소재의 앞치마를 입고 있었는데도 뾰족하게 깎인 내 연필 끝은 국가대표 양궁선수가 쏜 화살처럼 날카롭게 그대로 내 다리에 꽂혀버려서 결국 점이 되어 버리기도 했다(이런 점이 두어 개 더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수학 문제집을 꺼내서 푸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내게도 연필 깎는 일이 위안이 되었다. 커터칼로 연필의 나무 부분을 깎고 다듬고 있노라면 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과 따뜻한 촉감이 느껴져서 내 마음이 포근해진다. 또 단순노동이다 보니 잡생각이 없어지고 그저 그 행위에 집중하게 되면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입시미술용 연필 다듬기과 실제 생활에서 자주 쓰기 좋은 심의 모양은 좀 다르다는 것?

낮에 아이들과 백화점에 가서 2B 연필 반다스를 샀다. 나의 주 무기인 커터칼 대신 손잡이를 돌려 깎는 연필깎이에 그 연필들을 넣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휘휘 돌렸다. 근데 연필깎이도 오묘한 재미가 있는 것이, 처음에 손잡이를 돌리면 느낌이 둔탁하다. 이 때는 연필의 나무 부분을 깎아야 해서 손에 힘이 굉장히 많이 든다. 손잡이를 돌리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어느새 칼날은 연필심을 다듬기 시작해서 결국 끝이 뾰족하게 깎여질 쯤에는 서서히 손잡이를 쥔 손이 가벼워진다. 무른 심의 연필을 깎을 때면 종종 연필심이 부러져서 회전식 칼날 사이에 박혀서 손잡이 쪽을 돌려서 칼날을 분리해서 두드려서 빼기도 했다. 연필깎이의 손잡이를 최대한 돌리면 결국 똑같은 모양으로 다듬어질지는 모르지만 내가 어느 정도에서 손잡이를 멈추느냐에 따라 내게 잘 맞는 정도의 연필이 되기 때문에 두세 바퀴마다 다듬기를 멈추고 연필심 끝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다 적당한 길이다 싶으면 깎기를 멈추고 꺼내서 쓰면 되는 꽤나 멋지고 귀찮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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