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차

mixed media

by 글쓰는 달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가면 ‘무제’만큼이나 많이 보게 되는 작품 설명 중 하나가 ‘mixed media’이다. 말 그대로 한 가지 재료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미술을 다소 늦게 시작한 내게 이 mixed media는 정말 정말 어려운 주제였다.


내가 그리기 좋아했던 것은 주로 인물화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순정 만화 주인공들을 그리는 것이 참 좋았다. 비현실적으로 예쁘게 이목구비가 발달한 그들을 그리는 것이 좋았고 그리고 있다 보면 그들의 감정을 따라 내 얼굴도 그림 속 주인공의 표정을 그대로 띄고 있곤 했다. 주로 한 가지 재료(연필이나 펜)로 그림을 마무리하거나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펜으로 선을 정리한 후 수채 물감 등의 채색 재료를 입혀 작품을 완성했는데 재료를 섞어서 그린 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유치원 때부터 자주 사용한 기법인 주인공을 크레파스로 그리고 배경은 수채물감으로 색칠하기 정도가 나의 혼합 재료작의 전부 일 것이다.

사실 한 가지 재료만 가지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대단하지만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내게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재료 각각의 특성을 잘 알고 있어서 작가가 그 재료를 잘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며 재료끼리 조화를 잘 이루면서도 작가의 의도를 극적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흡사 지휘자의 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단색으로 주로 건식 재료(연필, 파스텔, 펜 등 금방 마르거나 건조한 재료)를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다(이처럼 작가가 그린 대상을 감상자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작품을 흔히 ‘구상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쉽게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추상화(비구상화)’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하도록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재료의 역할이 아주 컸다. 그림 도구들로만 그려서 작품의 표면에 요철이나 질감이 없고 그저 매끈하면 ‘뭔가 아쉽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추상화를 제작할 때 재료 선정은 너무 중요했다. 이 관점에 너무 빠져들면 세상에 한 번도 쓰지 않은 특이한 재료에 집착하게 되는데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가 어떤 재료를 발견했더라도 그건 이미 이 세상 어디에선가 쓰인 재료다. 최초의 재료에 목매지 말아라.’

비단 혼합이 어려운 건 그림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사람들과 잘 섞이는 것이 어렵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정해놓은 범위 안에서의 자유이지 상대방을 온전히 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식성에서도 나타나는데, 비빔밥을 제외하고는 웬만해서는 다르 그릇에 담긴 음식을 서로 섞어서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국밥집에 가서도 공깃밥 하나를 국에 때려 붓는 일은 잘하지 않는다. 대신 밥을 입에 넣고 그다음에 국물을 다시 떠먹는다. 사실 웃긴 상황이긴 하다. 어차피 입속에서도 밥과 국은 섞일 것이고, 위장 속으로 들어가면 이미 서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섞여 몸에 흡수될 만큼 작게 분해될 텐데 그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입속에서나 아주 잠깐의 분리를 즐기는 꼴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밥의 맛도 따로 느끼고 싶고 국물의 맛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 둘이 섞이는 맛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서로의 맛을 따로 알고 싶다(둘을 섞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지 않은가). 비빔밥의 재료들을 비비는데 주저함이 없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채소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고추장과 고기, 김가루의 힘을 빌어야만 나물도 맛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즐겁게 섞이는 일은 늘 동경하는 일이면서도 두렵다.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고 싶은 내 마음이 가식처럼 느껴지진 않을까? 친해졌다고 생각되어서 편하게 한 농담이 사실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나는 상대방의 생각에 딱히 동의하지 않지만 거짓말도 하고 싶지 않은 이 상황을 이해받을 수 있을까?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경직되어 보이는 건 아닐까?

나 조자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상대방에게 비치는 이미지가 서로 다르지는 않을까 겁먹고 때론 경솔하게 실수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걸 깨닫고 이불 킥을 날리거나 미안한 마음에 점점 연락을 꺼리게 되는 관계도 많다.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느낌의 그림을 그리는 작가님이 있다. 예전에 일러스트 페어에 가서 그 분과 직접 이야기도 나누고 작가님의 필통 속을 보게 될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연필이나 색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큰 면적은 물감으로 먼저 채색했다. 물의 번짐을 이용해서 우연의 효과를 살리기도 했고, 물감과 색연필, 펜 등의 다양한 재료로 작품의 두께를 점점 쌓아가고 있었다. 따스한 색감도 닮고 싶었지만 재료들끼리 서로 부딪히고 어울리게 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것이 참 부러웠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다른 취미에 빠져 잊고 있었던 그림을 다시 시작한 요즘 들어 나는 부쩍 연필, 수채 물감, 수채 색연필의 혼합을 즐기게 되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색연필로 채색하면 꼬질꼬질하고 지저분한 색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물감 위에 색연필을 칠하고 다시 녹이고 또 얹고 하는 과정이 꽤 즐거웠고 빈티지하고도 따스한 느낌이 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을 허물고 남과 같아질 필요는 없지만 너무 경직된 관계나 내가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는 편이 서로에게 더 건강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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