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행은 처음이야
여행에 대한 독특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체력보다는 정신력으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을 가거나 혹은 그저 집을 떠나 친척이나 지인 집에 머물게 되더라도 꼭 겪곤 하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집을 떠난 다음 날 체력적 한계를 심하게 겪는다는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갈 때도, 명절에 시댁을 갈 때도, 하다못해 친구들과 놀러 가서도 이러한 일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내가 체력이 부족하다 보니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우리 어머니의 통찰력 때문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어딜 가더라도 조식을 꼭 챙겨 먹어야 한다’는 쪽이었고, 남동생과 아버지는 ‘조식은 쿨하게 패스하고 차라리 잠을 자겠다’는 쪽이었다.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숙소는 5성급 호텔이 아닌 저렴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조식을 해결할 곳을 찾아야 했는데, 빡빡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늦어도 아침 6~7시에는 식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외국에서 꼭두새벽에 여자 둘이 동네를 활보하며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결국 숙소 근처의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을 이용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모녀의 조식 챙기기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을 꼭 챙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의 지론으로, 당신께서는 매일 여행을 시작하기 전 한 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식사를 해야만 큰 일을 보실 수 있고 그래야만 하루 종일 편하게 구경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나 역시 비슷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아침에 시간이 늘 부족해서 식사도 겨우 하고 허둥지둥 나가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 아침에 큰 일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하루 종일 배에 가스가 점점 차오르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바지가 꽉 껴서 불편했던 날이 많았다. 그런데 일을 쉬는 동안 나의 아침 습관을 돌이켜보니, 어머니 말씀처럼 나도 가족들을 출근시키고 나서 천천히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신호가 왔던 것을 깨달았다. 유레카!
그동안 여행이 힘들고 하루 종일 더위 먹은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것도 다 큰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평소 장 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라 외부활동이 많은 날은 식음료 섭취를 최소로 하는 편인지라, 내 마음이 불편하고 평소 습관을 벗어나 식사나 수분 섭취, 커피 마시기 등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어김없이 장이 활동을 중단하였고 반드시 체기를 동반한 체력 저하가 왔다. 먹어도 불편하고 안 먹으니 힘이 부족한 그런 악순환을 겪고 나서 그다음 날 아침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을 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내가 나 스스로를 관찰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습관이다. 지저분하게 읽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누구나 먹는 것만큼 비우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배변으로 인한 불편감이 없이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일을 해결할 수 있었고 덕분에 고생하지 않고 장거리 운전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첫 번째는 친구가 내게 준 유산균 스틱을 먹었기 때문인 것 같다. 친구는 내게 유산균 섭취를 매우 권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장이 안 좋을 때 오히려 유산균을 평소보다 많이 섭취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고 꾸준한 복용으로 느낀 효과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친구가 내게 준 유산균 식품의 맛은 꽤 괜찮아서 나도 평소에 먹기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구입처를 물어봐야겠다). 두 번째는 막걸리와 맥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평소 맥주나 가끔 먹을 정도의 수줍은 주량을 자랑하는 나이지만 친구와 함께 방문한 식당에서 직접 만든 막걸리를 한 잔 마셔보았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막걸리의 맛과 냄새와 다른 달큼하고 알싸한 향과 목 넘김을 느낄 수 있어서 나 혼자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 딱 한 번 먹어보고 제대로 실망한 막걸리의 기억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어쩌면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 이유와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이유는 여유와 기다림이 보장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박물관을 구경하고 잠시 정원에 앉게 되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친구는 잠시 내게 시간을 주었고 나는 열심히 주변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을 수 있었다(그 그림이 8일 차 글에 첨부한 사진에 있다). 빡빡하게 짜인 일정이 아닌 충분이 멍하니 있을 수 있고 주변 풍경에 깊은숨을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을 맘껏 누리도록 나를 기다려주고 토닥여준 친구의 배려가 있었기에 모든 일정이 다 순조롭게 흘러갔던 것 같다.
여행을 하다 보면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경험하며 즐거움을 얻는 것도 크지만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내 모습을 통해 평소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이 참 흥미롭다. 그래서 또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