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어야 즐거운 것들
종종 내가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더이상 내 외모가 이전보다 아름답지 않음에 한숨이 푹 나온다. 그럼에도 오늘도 글을 쓸 수 있는건 내가 나이가 들고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어 얻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가정(실과) 과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요리가 딱히 즐겁지도 않았고 특히 바느질이나 뜨개질 등 또래 여자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과제에 딱히 흥미를 느끼거나 재능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 친구와 함께 퀼트 공방에 다니게 되었는데 열심히 작품을 만들 때는 지겹던 바느질조차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공방을 가려면 시내버스를 타고 한시간 정도 이동해야 했는데도 그곳에서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집에 돌아오면 공방에 다시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공방에 다니며 지갑도 만들고 귀여운 곰돌이 인형을 만들어서 지인에게 선물한 적도 있었다. 친구와 멀어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공방에 가지 않게 되었지만 그 때 썼던 실과 바늘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방학이면 가장 부담스러운 숙제를 고르자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일기쓰기와 독후감이 떠오른다(물론 재활용품으로 만들기 과제도 즐겁지는 않았다). 요즘 큰아이가 숙제로 독서감상문과 일기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니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아이는 독서감상문을 쓸 때 ‘책을 읽었는데 아주 재미있었다’로 웬만하면 두 문장으로 끝낸다. 일기를 쓸 때도 ‘어디어디를 갔다. 또 가고 싶다/또 먹고 싶다’ 정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당연히 지도하는 입장에서는 안타까워서 잔소리를 하게 된다.
나의 경험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먹은 음식의 맛, 모양, 냄새 등을 떠올리게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려 유도한다. 누구와 함께 갔는지, 식당이름이나 음식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점이 좋았는지 등등에 대해 자꾸 물어보며 공통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한다. 아이는 어느 정도 따라오는 듯 하다가도 결국 일기를 쓸 때는 아까 함께 확인해본 시간 순서나 인과관계 따위는 없고 가장 좋았던 것 한가지만 달랑 쓰고는 ‘다음에도 또 하고싶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고 만다.
우리 아이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었던 나는 올해 일기장을 4개 정도 장만해서 쓰고 있다. 아쉽게도 여기저기 흩어져서 동시에 모두 잘 활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스티커로 꾸미는 일기장도 있고 그림과 함께 일상을 기록하는 sns도 활용하고 있다. 독후감을 쓸 때 줄거리로만 200자 원고지 5장을 꾸역꾸역 채워가던 학생이었는데 이젠 스스로 독서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는 왜 변하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일기와 독서감상문 쓰기는 매일 꾸준히 써야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정해진 분량을 채우기가 정말 어려웠다. 독후감을 쓸 때는 책의 줄거리는 짧게 쓰고 나의 생각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도대체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좋다고 느껴야 하는지, 혹은 별로라고 생각되어도 용기 있게 그것을 밝힐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아무도 나에게 어떻게 느껴야하고 어떻게 그것을 정리해서 써야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숙제로 정해진 도서들이 대부분 내게 흥미롭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왜 선생님들께서 그 책들을 읽으라고 권하셨는지 짐작이 되지만 학생일 때는 전혀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었고 책들의 내용이 종종 이해하기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활자상태로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넘기기는 했지만 내 마음에 남을만큼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느낌이랄 것도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지금이라도 용기있게 나의 느낌을 쓸 수 있다면 아마도 ‘더럽게 재미없는 책이다. 왜 이런 걸 우리한테 읽으라고 한걸까? 선생님도 읽으셨는지 궁금하다’ 등등의 의견을 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내가 하고 싶어야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른들 말씀에 ‘말을 개울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그 입에 물을 떠먹여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라는데 이것은 진리이다. 남이 아무리 좋다고 권유하고 강요해도 내가 싫으면 하기 싫은 일들이 세상엔 참 많다. 하지만 전혀 관심도 없던 일에 대해 내가 흥미를 느끼고 원리를 깨닫는 순간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고 중독된 사람처럼, 전문가 수준으로 그 분야를 연구하고 파고들게 된다. 그 경지에 가게 되면 더 이상 그 일이 싫거나 귀찮지 않다. 일상의 고단함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일단 ‘내 아이가 나처럼 책 읽기를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책을 그렇게 많이 읽고도 나의 생각을 담은 글을 쓰게 되기까지 30년이 더 걸린 나를 생각하면 조바심이 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또 고민이 된다. 내 아이가 스스로 그림일기와 독서감상문 작성을 즐거워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더 빨리 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지름길 몇 가지를 알려주고 훈련시켜야 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