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차

여행 준비

by 글쓰는 달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늘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여행할 곳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것인가 아니면 그날의 기분이나 느낌을 따를 것인가.

아무 준비 없이 여행을 가면 막상 여행지에 가서 놓치는 것이 있을까 봐 아쉽다. 반대로 너무 사전조사를 많이 한 상태로 여행을 시작하면, 이 여행이 그저 내가 공부한 것들을 확인해보는 정도로만 느껴져서 지루하고 학습하는 느낌이 들어 썩 즐겁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아마 나 혼자 여행을 가더라도 혹은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더라도 갈등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높다.

평소에 나는 집에 있는 것을 워낙 좋아하고 집에서 하는 활동을 선호하는 편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나 번화한 곳에 가는 것을 썩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오랫동안 걷고 움직이는 것은 내게 큰 체력적인 위기감을 들게 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한 여행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여행은 이런 체력적 상황을 뛰어넘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즐거운 법이다. 초인적인 힘이 마구마구 생기는 경험은 실로 놀랍다. 내게 이런 열정이 있었다니 싶어 신기하기도 하다.

그러나 내게 더 적합한 쪽은 아무래도 사전 조사형인 것 같다.

일단 나는 지도를 잘 읽지 못하는 편이다. 몇 년 전 외국으로 가족여행을 갔는데 동선계획과 시간 관계상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내가 너무나 궁금해했던 문구점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끼니를 놓치면 예민해지고 기운이 뚝 떨어지는 내 생활패턴을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은 과감하게 식사를 포기했다. 대신 나 혼자 그 문구점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문구류에 큰 관심이 없는 다른 가족들까지 나하나 때문에 저녁을 굶게 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내가 갈 곳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글 지도도 그 날 처음 써본 것 같다. 여행의 길잡이 및 인솔자 역할을 하는 동생이 “아마 8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라고 말한 그 문구점까지 도달하기 위해 내가 길에서 헤맨 시간을 무려 40분 이상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다른 여행자들이 그 문구점을 찾아간 블로그를 몇 개 찾아보고 여행책에서 봤던 랜드마크들을 떠올리며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났다. 하지만 구글 지도의 화살표 의도를 엉뚱하게 해석해버린 나는 문구점과 정반대로 하염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한참 걷다 보니 점점 인적이 드문 뒷골목으로 진입했음을 깨달았고 핑크빛 조명들 사이에 혼자 걷고 있는 여자는 나뿐임을 파악하면서부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한 커플을 발견했고 말도 안 되는 외국어와 그림을 동원해서 겨우겨우 내가 나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다(다시 생각해도 그 커플은 천사다.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아마도 평소 내가 서울 구경 갈 때처럼 미리 계획을 세웠다면 이런 아찔한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배가 아픈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한동안 서울로 전시회를 보러 가게 되면 미리 분단위로 계획을 짜곤 했다. 버스와 지하철 도착 및 이동 시간은 거의 정확했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이동하며 시간을 적어보고 환승해야 할 역과 지하철 방향까지 미리 수첩에 빼곡히 적었다. 혹시나 지하철 방향을 잘못 알고 타서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을지, 한 장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쏟거나 그로 인해 이후 일정이 꼬이고 결국 미리 발권해 둔 버스표에 찍힌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미아가 될까 봐 불안했다. 오죽하면 터미널에도 버스 탑승 시간 20~30분 전에 도착하도록 계획을 세우곤 했다. 그래야 마음이 안정되고 미리 볼 일도 보고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너무 빡빡하게 짜인 계획을 소화하는 것은 버겁고 흥미가 뚝 떨어지기 때문에 내가 세운 절충안은, 일단 가보고 싶은 곳은 다 알아본 다음 당일 날씨나 컨디션에 따라 일정 개수를 정하는 것이다. 너무 평범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후회가 적었던 것 같다. 이렇게 바람도 하늘도 좋은 날 여행 가기가 어려운 현실이 참 안타깝다. 모두가 맘 편히 이동할 수 있는 그 날이 어서 왔으면 하는 진부하지만 진심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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