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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09. 2016

사기꾼들의 대전제

#10. 1종 오류의 힘


"김기자. 뭐 진솔~하면서도 흥미롭고, 또 한편으로는 훈훈~하며 또 한편으로는 은근 자극적이면서도 말이지? 그런 핫이슈 말이야…. 뭐 없을까?"


"안 그래도 제가 한 건 물어왔죠! 그게…."


주변 사람들의 귀가 기울어진다. 솔깃-


식당이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앉을자리가 없어 줄지어선 사람들도 보인다. 먹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사람이나 저마다 목에 무언가를 걸고 있다. 우리도 걸고 있다. 지역 신문사 앞 맛집. 우리는 기자다. 아니 우리는 기자의 연기를 하고 있다.


"그게 뭐냐면, 봉순이네 다락방이라고. 참나 별일이 다 있지. 여기가 말이죠. 왕십리에서…."


"김기자."


“주인 이름이 봉순이라나?”


"허어- 김기자!"


“네, 네?”


“그 얘긴 이따가 하지 그래.”


조용히 얘기하라는 듯한 제스처, 소리는 작게, 발음은 정확하게.



인지부조화의 늪을 파기 시작한 지 일주일.

시나리오 제작과 자체 연기 수업을 마친 우리는 일산 및 여의도 등지의 각 방송국, 신문사, 잡지사 근처의 맛집과 카페를 배회하며, 실험 아닌 실험, 연극 아닌 연극, 홍보 아닌 홍보를 하고 있다.


시나리오는 이렇다. 봉팔이의 헛기침과 '가십, 대박, 특종' 등의 관심 명사로 '솔깃' 만들기, 이어지는 김기자의 물오른 연기, 그리고 봉다방에 대한 약간의 소스. 자체 만족도 100점의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기자다워 보이기 위해 ―평생 안 할 것이라 맹세했던― 앞가르마 투혼을 불사했음에도, 봉순의 질문은 한결같다.


"그런데 이거 정말 효과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밀어붙이는 데 있어서는 물불 안 가리는 봉순 조차 물음표를 띄우자, 나 역시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와버렸다. 봉순아 미안, 미안해도 늦었다. 나는 심경을 토로한다.


"당연하지, 의심하지 마. 부정 타!"


초등학생 같은 대답, 이어지는 첨부 자료.


"너 사기의 달인들이 사기를 어떻게 치는 줄 알아?"


"사기?"


사기 달인들의 비법을 본 적이 있다.

먼저 표적 대상을 200명 정도 선정한다. 되도록 돈이 많은 사람들로만. 그리고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왠지 근사한, 예를 들어 <Royal Kingdom>같은 브랜드 로고와 번쩍이는 금장이 박혀있다. 편지의 내용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100명의 편지에는 <4월 7일 ㅇㅇㅇ 주식이 오릅니다.>, 다른 100명의 편지에는 <4월 7일 ㅇㅇㅇ 주식이 내립니다.>라는 간단한 문장만 들어있다. 당일 날 결과가 나타난다. 이중 100명은 예언이 적중한 편지를 받은 셈이다.


그 정도에 속겠냐고?


적중한 편지를 받았던 100명은 또 다른 편지를 받게 된다. <이번 주 로또 당첨자는 10명 미만으로 하겠습니다.>, <이번 주 로또 당첨자는 10명 이상으로 하겠습니다.> 각각 50명씩. 이번에는 또 다른 문구가 추가되어 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우연은 로열 킹덤이 만듭니다.>


그 다음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남은 인원에게 보내지고, 그때마다 또 다른 문구가 추가된다. <상위 3%의 놀이터>, <어제 그 사건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Royal kingdom의 가입조건을 알려드립니다.> 등.


그러다 보면 모든 예언이 적중한 십여 명이 남는다. 그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는 새로운 예언이 들어있다. <5월 2일 세 번째 게임에서 경주마 5번이 1등으로 들어옵니다.> 물론 그들은 각각 다른 경주마의 번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예언까지 적중한 사람에게는 또 한 통의 편지가 날아간다. 연락처와 함께 적혀있는 새로운 예언. <5월 10일 게임에서는 몇 번 말이 1등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Royal Kingdom이 알려드립니다.>


그 '비운의 주인공'은 부동 자산까지 팔아서 거액의 현금을 들고 약속된 건물로 향한다. 양복을 입은 깔끔한 사내들이 그를 귀빈실로 모신다. 벽의 한쪽 면에서는 스크린으로 경마장 상황이 중계되고 있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있는 와인으로 목을 축인다. 잠시 후 안경을 쓴 맑은 피부의 사내가 들어와 차분한 어조로 묻는다.


"잘 오셨습니다. 익명 보장, 수익금은 전액 현금, 그 밖에 사항에 대해서는 통화 내용으로 전달받으셨을 것입니다. 이번 게임에는 총 세 명의 회원님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수익률은 참여하는 회원님 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 게임의 수익률은 정확히 1.65배이며, 10억부터 투자 가능하십니다."


비운의 주인공은 10억이라는 단어에 새삼 놀라지만, 앞에 있는 '간부로 보이는 남자'에게 무시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게다가 Royal Kingdom의 회원이라는 특혜 역시 놓치고 싶지 않다.


"10억 투자하셨습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회원님은 게임이 끝난 후 16억 5천 만 원을 받게 되십니다. 문 앞에 저희 직원이 항시 대기 중이니, 원하시면 우측의 버튼을 눌러주십시오."


그는 명료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뱉은 뒤 그곳을 나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 모두.




"내가 왜 이야기를 하냐면? 사기꾼들의 대전제 때문이야."


심리학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이 극히 낮을 때 그것을 기각하고 정반대의 가설을 입증한다. 그런데 극히 낮더라도 그 확률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1종 오류라고 한다. 가령, 복권이 당첨될 확률은 0.01% 미만이므로 '복권을 사는 것은 손해'라는 가설을 쉽게 입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매주 당첨자는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복권을 산다. 1종 오류의 힘이다. 사기꾼들의 대전제도 이 안에 있다. 한 개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높은 경우 그 가능성이 매우 낮더라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덫에 빠지는 사람도, 바로 그 오류의 주인공이 된다.


"지금 사기를 치자고!?"


예를 잘못 들었다.


"그… 얘기의 요점은 말이지."


우리의 덫 역시 마찬가지다. 걸려들기는 확실히 어렵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걸려들 경우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희박한 확률로 걸려든 그 누군가는, 수소문을 해서라도 봉다방을 찾아올 것이다. 골목에 골목, 트럭에 트럭이라도 세워져 있으면 더 찾기 어렵겠지. 간판을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다. 안으로 들어온다. 같은 시간 더 좋은 기사 거리들이 다른 기자의 손에서 재탄생하고 있다. 이 비운의 기자가 다락방 문을 여는 순간 그가 인식하지 못하는 강한 동기가 발생한다.


'이곳에서 뭔가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적당한 소재가 없기 때문.

봉다방은 그저 작은 지하실을 예쁘게 꾸민 다방일 뿐이다. 애절한 뒷이야기나 훈훈한 탄생 배경 같은 건 없다. 단지 옆 사람들의 대화만을 듣고, 왕십리에 등록된 상가 목록을 모두 검토해서, 그 골목골목을 찾아온 자신을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경은 어느덧 커피의 맛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그렇구나. 커피가 맛있구나. 아니 맛있어야 돼. 인터뷰해서 적당하게 극화시키고 커피 맛에 중점을 실어보면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시장 골목의 젊은 언니 봉순 그리고 다락방> 같은 기사 제목도 생각해내겠지.


"실전 경험이 있어서 그른가? 좀 달라 보이네."


이제 안거야?


“그런데 만약 그 중요한 사람이 한 달 내에 오면? 봉다방은 닫혀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더 좋지. 더 큰 인지부조화를 겪고 다시 찾아올 테니까."


그녀가 별 대답 없이 나를 응시한다. 좋은 시선이 느껴진다. 눈이 마주친다. 그 눈이 평소와 다르다. 1초, 눈썹을 살짝 올려본다. 2초. 봉순아? 3초. 눈을 피해야지. 4초, 무슨 말이라도 하던가. 지금 그 눈은 너무 깊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커피의 맛이야. 벤치마킹하러 가자. 카페골목으로 출발."


황급히 자리를 턴다. 내가 자리를 비운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초점을 유지하다가 천천히 짐을 꾸린다.


나였을까. 그 눈에 담기고 있던 존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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