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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11. 2016

그녀는 모든 걸 보여준다.

#11. 사회적 침투 이론 파괴자


“짧은 여행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한 달.

눈을 감았다 뜨자 지나갔다. 정오에는 신들린 연기, 오후에는 카페 기행을 했다. 카페 기행은 예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녀의 눈은 천리안이었다. 굳이 주방 근처에 앉지 않아도 그들의 눈주름까지 보인다고 했다. 놀랍게도 나의 귀는, 옆에 있는 사람의 말보다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 더 민감했다. (은근히 환상 조합일세) 그런 서로의 초능력 덕에 어렵지 않게 그들의 레시피와 노하우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저녁에는 방문했던 카페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새로운 메뉴도 연구했다. 오후에 느꼈던 미각을 최대한 기억해냈다. 커피를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연구하면서 또 마셨다. 코를 풀면 커피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


커피 머신이 힘없는 방귀를 뀌며 멈추기도, 크림기가 폭발하여 주방이 크림 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뜨거운 물이 눈에 튀어 놀란 마음에 봉순의 멱살도 잡았다. (다시 잡혔지만...) 실패한 커피를 버리기 아까워 가위바위보도 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한 달’은 지나갔다.


한 달 동안 봉순과 내가 마신 커피는 왕십리에 소나기 한 차례는 퍼부을 수 있는 양이였다. 소나기를 맞으며, 우리의 7년이라는 공백도 그 서먹함이 조금은 메워진 것 같다. 봉순은 정말 변한 것이 없었다. 웬디와 함께 떠나서는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피터팬. 하지만 네버랜드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를 반겨주었지.


봉순은 출퇴근길에서 떠올렸던, 혹은 삶이 고단하여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았을 때, 맞는 말만 늘어놓지만 정작 내 얘기는 아닌듯한 성공학 강연을 보았을 때, 예쁘게 장식된 트리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 그렇게 내 기억 속 아련한 네버랜드로 떠올랐던, 그때의 그 봉순 그대로였다.



게다가 새롭게 알게 된 특급 능력들도 있다. 거의 뭐 '매' 수준의 시력을 갖고 있는가 하면, 눈썰미도 셜록홈즈 급. 심지어 연기도 잘한다! 봉순은 (나를 잘 대해주는 것을 빼면) 못하는 게 없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봉순의 인테리어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새로운 카페를 방문할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던 생각이다. 배운 적은 없고 그저 관련 책을 틈틈이 보았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뭐, 말 되는 것만 찾았다면 난 지금 이 자리에 없겠지.


“봉순아-”


난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능력과 봉 다방의 인테리어를 칭찬한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의 칭찬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한결같다.  


“그렇구나~”


칭찬이 가면 올 대답은 아니다. 칭찬을 인정한다는 것인가. 칭찬인지 몰랐다는 것인가. 애매하다. 인정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인정하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밉상스럽지도 않단 말이지. 칭찬은 원하지만, 자신의 무언가가 들춰지는 것은 경계하는 대답처럼 들린다. 얌체같이 칭찬만 쏙 받아 챙기는! 봉순은 그런 대답을 즐긴다.


사회적 침투 이론(social penetratio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관계의 깊이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마치 양파의 껍질처럼 관계가 친밀해질수록 자신을 더 드러낸다는 것이다. 내가 마주쳐온 사람들, 그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들 역시 누군가에겐 자신의 숨겨진 면을 꺼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좋은 모습만을 보였다. 상대에 따라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하지만 그 관계에서 자신이 지정한 울타리 안쪽은 감추는 것 같은 느낌. 내가 매우 잘하는 것이기도 하다.


봉순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상대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비밀로 간직할 일을 서슴없이 꺼내기도 하며 보통은 부담스러워서 미뤄 둘 말도 그냥 뱉어버린다. 누추한 자신의 집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초대하는가 하면 어떤 일이든 툭, 털어 넘긴다. 전혀 울타리가 보이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이따금 되돌아오는 그녀의 대답들은 이처럼 애매하고 비밀스럽다. 어쩌면 더 큰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나머지를 모두 꺼내어 보이는 게 아닐까. 호기심은 질문이 된다.


“봉순아, 너도 비밀 같은 거 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


“없어.”


역시.

그리고 짧은 침묵 뒤 이어지는  단서.


“말하기 싫은 건 하나 있어.”


“뭔데!!?”


조건반사.   


“알잖아-”


“뭐, 뭘? 설마 남장 여자... 뭐 그런 거야?”


그녀의 손가락이 머리 옆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럼 말을 해주던가!


“말했잖아. 못 하는 게 아니고 하기 싫은 거라고. ”


또 그 표정이다. 아침 이슬의 표면처럼 투명하고 고요한 피부, 그 안에서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는 이목구비, 그것들이 규칙을 깨고 필요 이상으로 일렁이는 일은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는 미묘한 균열이 생긴다. 미간을 살짝 올리고 입 끝을 양쪽으로 당기며 '다 아는 얘길 왜 꺼내냐'는 듯한 표정. 봉순아 나는 정말 몰라. 그녀는 그저 어지러이 흩어진 커피 도구들을 정리할 뿐이었다.


“내일 늦지 않게 와. 첫 손님 받아야지."


내쫓기듯 다락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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