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지부조화
언젠가 꼭 활용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막상 그 '언젠가'가 되자 희미한 아지랑이만 피어오른다.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책꽂이를 탐색한다. 두꺼운 심리학 서적들 틈에 겁먹은 듯 끼여 있는 노트가 보인다. 참 오랜만이다. 학생 시절 나의 보물, 나의 벗. 시험 때가 되면 대인 관계까지 넓혀 주었던 기특한 녀석, 인간노트.
표지를 본다. 신중한 필체의 문구가 적혀있다.
- 인간의 모든 심리가 이 안에 있다.
선언적 문구. 부끄러움에 슬쩍 기지개를 켠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실을 관찰하고, 보편적인 신념에 대한 정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 자네가 로저 R. 호크인가-?"
"네…, 네?"
"난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닌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거야. 심리학자의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네, 네… 그, 심리학자의 역할은….”
“뜸 들이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게!"
"네! 메스 없이도 인간을 해부하는 것입니… 가 아닐까요…."
조용했던 강의실이 폭소로 메워졌었지. 교수님마저 뒤로 넘어가셨었어. 실소가 삐져나온다. 그래도 그때는 열정이 넘쳤었는데….
지나고 되돌아볼 때, 종종 인용하였던 '로저 R. 호크'의 문구대로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이 심리학자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면, 당시의 봉순은 ―아니 그녀가 시도했던 무식할 정도의 일관적인 역발상들은― 연구와 이론으로 스며들지 못했을 뿐, 그 시도 면에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모범생이었다.
말이 좋아 모범생이지 세상과의 격돌을 원치 않아 도서관과 강의실에서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인간노트를 탄생시켰다. 봉순은 무작위로 세상을 읽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만큼 몰입하고, 집중했다.
세월에 바랬지만 당시의 온도는 인간노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금 그 노트를 품고 그녀에게 가고 있다. 정반대로 뻗어가던 우리가 다시 시작한다.
첫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펼친다.
1950대 초반, 미국의 한 사이비 교주가 중대한 발표를 한다. 지구의 종말을 예언한 것이다.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꼬집은 그 종말론의 핵심은 '진정한 믿음의 신도들만 비행접시로 구출된다'는 것이었다. 참 대담도 무쌍하다.
신도들은 난리가 났다. 하나 같이 자신의 직장을 퇴직하고, 삶의 터전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이 종교 단체에 기부하였다. '진정한 믿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들은 몇 벌의 여벌 옷만 들고 정해진 건물로 모여들었다. 교주의 사기극이 자명한 상황이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구원의 날이 다가왔고, 건물 내부의 사람들은 비행접시가 오는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 벌벌 떨고 있는 사람.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한 사람 등. 그 모습은 가관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종말이 코앞인데 뭐가 중요하리.
드디어 교주가 예언한 종말의 시간이 되었다. 문틈으로 강렬한 불빛이 스며든다. 성질 급한 몇몇이 황급히 문을 연다.
종말은 없었다.
불빛은 건물 주위로 모여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였다. 교주가 말한 대홍수나 비행접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뻔스러운 교주, 도망치기는커녕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아주 화끈하고 참신한 중대발표를 한다.
"신도 여러분들의 강한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전 세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기뻐하며 축제를 벌였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비행접시를 기다렸던 신도들이, '예언이 틀렸다'는 분명하고 간결한 결론 대신, 불분명하고 복잡한 결론을 선택한 것이다.
한 순간에 직장도 집도 없어진 신도들. 주위 지인들에게 확신에 찬 눈으로 호언장담도 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가족도 져버리고 그 냄새나고 음산한 건물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가짜’라는 단어는 이들이 투자하고 희생했던 모든 것들을 무효화시키는 것, 이들은 현실을 부인하고 다시 자신의 '믿음'을 선택한다. 이로서 그들은 사이비 교주에게 놀아난 바보가 아닌, 독실한 믿음으로 지구를 구원한 위인이 될 수 있었다.
페스팅거는 그들의 태도 변화 속에서 인지부조화라는 개념을 발견하였다. 내가 선택한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그 결과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간절히 바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그 목표의 가치를 낮춘다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를 인정해야 할 때 그 가치를 높이려 했다.
가령, 금연에 실패한 후 담배의 장점을 늘어놓는다거나 친구의 최신 스마트폰이 더 좋아 보여서 '그 회사 제품은 잔고장이 많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것, 이미 예약한 값비싼 펜션을 폭우가 쏟아져도 가는 것, 잘못 사 와서 뜯어버린 과자를 '사실 이 과자도 맛있지-'라며 먹는 것, 원치 않게 군대를 다녀온 후 '남자라면 군대는 다녀와야지'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 등, 인지부조화는 일상 곳곳에 숨어있었다.
특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을 했을 때 인지부조화에 빠질 확률이 더 높다. 게다가 이는 인간의 탄력적인 사고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흐름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도 모르게, 이 '늪'에 빠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래서 뭐."
"으, 응?"
"그래서 그걸 어떻게 활용하자는 건데?"
기회다.
노트 속에만 갇혀있던 내 열정이 세상으로 뻗어 나올 수 있는 기회!
“자, 우리가 당장 오픈할 수 없는 건 사실이지?”
“응.”
“준비를 잘해야겠지?"
"당연하지."
"준비기간 말이야. 한 달 정도 어때?”
“한 달? 너무 길지 않아?”
짧은 기간은 아니다. 그런데 어차피 최소 한 달 동안은 손님이 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홍보도 안 되어있을뿐더러, 이 골목을 지나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골목을 지나는 유동 인구도 다락방 간판이 있기 때문에 조금씩 잠재 고객이 될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 동안 제대로 준비하는 게 낫다는 거지.”
봉순이 듣는 사람의 자세를 취한다. 더 얘기해보라는 뜻이다.
“가볼 곳이 많아. 인지부조화의 늪에 빠뜨릴 사람들을 찾아야 하거든."
봉다방의 문제점 중 하나는 찾기 어렵다는 입지 조건이다. 하지만 그 조건으로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면?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맛있는 커피를 먹기 위해. 이 어려운 골목을 찾아온 것이야.'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그녀의 귀 끝이 쫑긋 선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 필요가 없는 사람일수록 좋아. 중요한 것은 커피 맛이 실제로도 좋다면 금상첨화! 유명 카페 돌면서 벤치마킹도 같이 하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 사람 몇 명 끌어들여서 딱히 얻는 게 있을까.”
예상했던 질문!
"그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 아닐까. 가령... 그 사람의 파급효과가 상당하다면...?"
그녀의 귀 끝이 사그라들고 그 눈의 시선은 나의 미간 그 어디쯤에 고정된다. 미세하게 입을 오물거리지만 그 멍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마치 화면이 멈춰버린 것 같다. 아마도 내 말을 곱씹고 있는 중인 것이다. 나는 세부적인 계략을 더한다.
"생각해보니, 약간의 연기력도 필요하겠다."
그녀의 귀 끝이 다시 쫑긋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