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말하자면 신고식
“이건 부동산, 요건 떡집 그리고... 이건 봉제 공장. 출발해-”
어째서 나만 배달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봉순도 나름의 할 일이 있지 싶다. 그런데 내가 출발할 때마다 의자에 앉으며 책을 펼치는 봉순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당연한 태도 때문일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마치 이렇게 역할이 정해진 것만 같다.
아슬아슬 3개의 쟁반을 들고 봉다방을 나선다.
봉다방 진보를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전략은 아군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실 아군을 만든다, 라기보다는 봉다방을 이 왕십리 시장 골목의 구성원으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기 어렵다고 했다. 인체의 모든 기관과 뇌는 단지 플러스 마이너스 신호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가족부터 조직, 사회, 국가, 지구촌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인체 흐름에 맞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봉다방도 마찬가지. 작은 컵, 봉순, 테이블, 커피콩, 그득한 나무 내음, 지폐, 휴지통 등, 이 작은 모든 것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그 형태를 이루어 가는 유기체인 것이다. 봉다방은 '왕십리 시장 골목'이라는 더 큰 유기체의 일부가 되어 공생의 흐름에 합류하기로 했다. 비장하다.
어려운 말들을 주고받았지만 사실 '떡 돌리기'를 하고 있다. 신고식이랄까. 봉순은 꽤 오랜 기간을 이곳에서 지냈다. 주변과 어느 정도는 안면이 있기에 떡을 돌리며 인사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공생의 흐름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떡은 내가 돌리고 있다. 뭔가 이상하다.
코에 커다란 왕점이 있는 부동산 아저씨. 징그러. 곱슬머리 떡집 사장님. 떡집에 떡을 돌려? 앞머리 숱이 없음에도 과감하게 앞가르마를 감행하는 봉제 공장 사장님. 이분도 왕점이 있네. 왠지 신사다워 보이는 분식집 아저씨. 지내보니 실제로도 매너가 좋으시다. 화장품 가게 언니. 항상 들고 있는 손거울이 손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휘파람을 간드러지게 부는 철물점 청년. 정말 잘 분다. 하루 일과의 70% 이상을 앞마당 쓸기에 투자하시는 옆집 할머니. 욕과 입이 혼연일체를 이룬 위층 아저씨. 욕 강습이나 받아 볼까. 폭탄 맞은 머리의 미용실 언니. 얼굴은 참 순박한데 말이지. 초여름부터 비지땀을 흘리고 계신 구멍가게 덩치 아저씨. 내 얼굴 크기의 시루떡을 한 입에. 양말 공장 식구들. 쇼핑몰 운영 중인 언니들. 나의 옷매무새를 고치게 한 편의점 아가씨. 사무라이 느낌 강하게 풍기는 횟집 사장님. 그래서 칼을 쓰시나. '솰라깔라' 소수 이주민들. 빵집 식구들. 노래방 노부부. 술집 사장님들. 그리고 우리의 존경하는 건물주 아저씨를 비롯한 그 가족 여러분까지.
한 명 한 명 인사하며 관찰하는 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지난 회사생활에서 갈고닦은 사회성으로 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비판도 있었다. 걱정도 있었고, 격려, 칭찬, 응원, 비아냥, 정보, 약간의 텃세, ‘술도 갖고 와야지 이 사람아’도 있었다. 하지만 –진심이던 빈말이던– 그들이 던져준 메시지는, 앞으로 봉다방의 궤도를 계획하는 데 있어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다.
"다 돌렸어?"
읽던 책을 슬쩍 덮으며 어정쩡하게 일어나는 봉순. 무슨 책 이길래. 커피 전문 서적인가. 만화책이었어? 밀려오는 배신감을 담아 한 마디.
"응 다 돌렸어. 생각보다 재미있던데?"
소심남. 뭐 이젠 그러려니 한다.
"자 그럼, 봉다방- 그 긴긴 역사의 출발을 기념할 겸... 한 잔?"
거절 할리 없지.
술자리에서 일 얘기하는 사람 밥맛이라 하였던가. 봉순과 나는 술자리 내내, 그리고 술이 떨어진 이 후로도 2시간 동안이나 봉다방에 대한 열변을 주고받았다. 여러 가지 논박이 있었지만, 공통된 의견은 우리가 연구했던 심리학을 십분 활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제야 너도 비싼 등록금 값을 하는 건가?"
봉순은 말을 참 이쁘게 한다. 내 지난 시간을 고작 등록금 잡아먹은 수준으로 보다니. 말 나온 김에 얘긴데 난 그녀가 기억하던 학생 봉팔이가 아니다. 그래도 메이저 저널에 이름 한두 번은 올린 나름 훌륭한 학자다. 심지어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실전 감각도 쌓았다! 길 안 잃어버리게 잘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은 봉다방보다 넓으니까.
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이건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다. 안 하는 것이며 곧 이타적인 거다. 그런 의미에서 봉순은 참 인복이 좋다. 나 같은 인재를 맨 입으로 꿀떡했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봐?"
"어? 아, 그, 아니야. 자, 건배."
허우적대며 빈 잔을 앞으로 내민다. 그녀가 얼빠진 사람처럼 왜 그러냐며 잔을 채워준다. 그 길게 뻗은 눈매와 차가운 낯빛을 상대로 할 말 다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하여간 난 아니다. 하루 종일 혼자 떡을 돌렸지만 불만 한 마디 못 뱉었다. 슬쩍 그녀를 쏘아보며 인복이 어쩌니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 아, 잠깐.
"봉순아, 혹시 자기합리화 기억나?"
"응?" 그녀가 음미하던 술잔을 내리고는 골똘히 뇌의 태엽을 돌리다가 대답한다. "그, 인지부조화, 맞나?"
"어, 맞아!"
흥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놀랄 수밖에. 그녀가 인지부조화라는 지극히 학문적 용어를 기억해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현실과 싸웠다. 그 시간 동안 그녀 안에 있던 심리학 지식이 다 빠져나갔다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아니다. 그녀도 기억하고 있다. 승산이 있다.
"봉순아, 그 인지부조화 말이야."
"어, 그게 왜?"
그 많은 심리 효과 중에서도 유독 흥미로웠다. 별난 연구도 많았지.
"그것부터 활용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