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새벽 바다, 고개 드는 해처럼
3일.
그녀의 잡동사니들을 치우는 데만 꼬박 3일이 걸렸다. 그간 깜짝 놀란 내 심장의 수명은 3년이 단축되었다.
"애벌레다!!"
모형이라고 한다.
"바, 바퀴벌레!!!"
역시 모형.
"이건, 사람 뇌잖아…."
"침팬지 뇌야."
모형이라도 이게 왜 필요한 거지!
소리 나는 고양이. 쥐 퇴치용 상품으로 만들었었다고 한다. 얼굴 모양 거울. 졸음운전 방지? 이게 왜. 그리고 그녀의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러 가지. 그중 일부는 중고시장에 팔았고 나머지는 폐기 처분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식을 유학 보내는 어머니의 눈빛을 보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애절할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몇몇은 결국 다락방으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다재다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학 시절 보여주었던 능력들은 예고편. 주섬주섬 꺼내 든 스케치북에 '다방 구상도'라는 문구가 보인다. 그 속에는 그녀가 꿈꾸었던 다락방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색연필로 알록달록 그려서일까, 딱딱해 보여야 할 구상도가 동화책 그림들처럼 따뜻해 보인다.
“정말 어두침침한 지하실이 이 그림 속의 세상으로 변하는 거야?”
“응. 재탄생이지.”
공사는 바로 다음 날부터 진행되었다. 전문가 냄새 물씬 풍기는 장정 두 명이 나타나서는 봉순의 지시대로 다락방을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마법 같은 광경. 답답하고 좁아 보였던 공간이 몇 배나 넓어졌다. 냉기 흐르던 지하실 바닥은 따뜻한 나무 바닥이 되었다. 마치 붓으로 슥슥 칠하듯, 그렇게 되었다. 먼지 낀 액자가 걸려있던 구석에는 깔끔한 싱크대가 생겨난다. 그 앞으로 작은 바가 생긴다.
이것도 생긴다. 저것도 생긴다.
생겼다. 생긴다.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면 그렇게 된다.
어느덧 벽에는 수납공간, 계단에는 책장이 붙고, 책들이 나열된다. 어디서 구해온 거지. 곳곳에 알록달록한 테이블이 놓인다. 크고 작은 조명들이 늘어난다. 곳곳에 미니 액자들이 걸린다. 넓고 좁은 컵들이 줄을 선다. 마법일까. 나의 시야가 다른 곳을 비추는 순간 마법봉으로 툭, 그런 것일까? 이곳저곳에서 꼼지락거리는 사내 두 명은 눈속임이군. 동작이 너무 클 때부터 수상했어. (아, 덩치가 큰 건가) 허우적거리는 사내들로 시선을 분산시키고,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현실적으로 납득될 수 없는' 그 어떤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적어도 그 마법은 많은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구상도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이처럼 똑같이 눈앞에 그려진다는 말인가.
놀란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봉순은 차분하게 공사를 감독할 뿐이었다. 하루, 이틀. 그 어두컴컴했던 다락방은 새벽 바다의 고개 드는 해처럼 점차 밝아오고 있었다.
잠깐.
갑자기 드는 의문점. 돈의 출처가 어디인가.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 한 번 건네지 않았다. 무심한 놈, 아니 정신없는 놈. 아마도 내가 대학 시절에 보았던 봉순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성이 맞는다면, 이 정도의 자금을 마련했을 확률은 매우 낮다. 그것은 경기 관람 중 날아든 야구공을 두 발바닥으로 잡을 확률만큼이나 낮은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녀는 '실제' 돈을 쓰며 봉다방을 완성해나가고 있다. 그간 그녀의 안부와 지금 상황에 대한 궁금증을 담아 질문을 던진다.
“돈 어디서 났어?”
바보 하나 추가요. 궁금할 때만 나오는 이 직진 화법.
“터졌어.”
터지다니 뭐가. 봉순은 가끔 말이 짧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성격인가?
“그동안 내가 뭐 했을 것 같아?”
졸업 후 그녀의 행보는 그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나의 뇌와 감성을 자극했던, 하지만 그 결과로써 현실의 냉혹함까지 함께 알려주었던 작품들.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현실에서 사라졌을 뿐, 그 기억에서만 추억이 되었을 뿐, 그녀의 드라마는 계속되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그중 하나가 ‘진짜 드라마’를 이루어 냈다는 것. 봉순의 두 발바닥은 보기 좋게 야구공을 잡아낸 것이다! '터졌어'는 그 '터졌어'이다. 또다시 궁금증이 솟구친다. 보챈다. 그녀가 뭐 그리 놀랄 일이냐는 듯 말문을 연다.
“2006년 월드컵.”
“뭐?”
2002년.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4강 진출로 인해 대한민국은 유례없이 붉고 뜨겁게 물들었었다. 그 열기는 월드컵이 끝난 이후로도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표출되며 4년 후를 기다렸다. 2006년, 그 날이 다가오자 대한민국은 한 번 더 신명 나게 끌어 오를 준비를 했다. 그 열기로부터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동시에 어떤 이들에겐 그 열기야말로 보기 드문 금전적 기회이기도 했다. 봉순도 마찬가지였다. 어두침침한 다락방에서 그녀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티셔츠와 각종 응원 도구를 판매하기 위해, 보디페인팅으로 수익을 얻기 위해 모든 상인들이 나서는 시각, 그녀는 집에서 유유히 쉬고 있었다. 경기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짐을 꾸렸다. 폼 클렌징과 식물성 보습 제품 그리고 몇몇 피부 관련 용품들. 그녀는 매 경기 월드컵 인파가 가장 넘치는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남다른 팻말이 세워진다. 낚시 의자와 함께이다.
<얼굴 페인팅 깔끔하게 지워드립니다.>
“뒤풀이는 개운하게 하세요.”라는 말만을 반복하던 그녀 주위로, 한 명 두 명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결국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일손이 달리던 봉순은 즉석 아르바이트생까지 고용했다고 한다. 몇몇 손님들은 화장 솜에 원하는 화장 액만 얻은 뒤 돈을 지불하기도 하였단다.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것이다. 월드컵 기간, 그 찰나에 봉순은 자신의 덩치만 한 ―꽃다발이 아닌― 돈다발을 쓸어 담았다. 그녀의 기적 컬렉션에서는 처음으로 일어났던 해피엔딩.
그 기적의 결과물은, 그렇게 통장 속에서 고이 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오늘 봉다방의 뼈대가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