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대학교 선배가 자주 입에 담던 말이다. 그의 별명은 ‘두루’다. 별명만큼이나 넓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보유하고 있었고, 졸업한 후로도 그런 관계를 끊임없이 유지했다.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역시 관계를 넓히거나 유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좋은 첫인상은 무엇인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더 사회적으로 보이는 방법, 더 많은 사람들과 원활하게 지내는 요령 같은 것들이다.
그는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어느 날 물었다. 왜 사람을 가려 사귀냐, 두루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 두루: 빠짐없이 골고루
그는 대범인이다.
두루 선배의 적극적인 태도는 내가 많은 사람과 잘 지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도 전에 대인관계의 정설로 다가왔다. 다양한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능숙하게 적응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 때문에 대범한 방식에 대한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런 의문 자체가 덜 사회적이고 더 폐쇄적인 성격의 산물처럼 보였으니까. 자신감 없는, 소심한 이들은 뭔가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결국 나는 대범인의 옷을 입었다. 많은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능숙하게 대했다.
누구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중 어떤 사람과 좀 더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곤 한다. 누군가는 넓고 다양한 관계를 지향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소수 몇 명과의 깊고 연속적인 교류를 중시한다. 그럼에도 우린 자연스레 넓고 다양한 관계망을 구축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왔다. 그런데 이러한 추구는 더 눈에 잘 띄고 더 빨리 반응하는 대범인의 시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범인은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의 범위가 넓어서 상대방에 대해서도 무리 없이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성된 넓은 관계는 마치 그들이 소유한 강력한 에너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도 강력하다. 이 때문에 상대를 살피고,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데 시간이 소요되는 소심인은 자신의 신중한 성향이 마치 덜 대범해서 덜 훌륭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심지어 저명한 심리검사인 <다면적 인성검사 MMPI>에서는 사회적 내향성Social Introversion이 마치 하나의 병리적 특성인 것처럼 다룬다.
그런데 소심함은 대범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범함이 소심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저 이 두 성향은 서로를 흉내 낼 수 있을지언정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다를 뿐이다. 그 차이는 ‘리비도libido’라고 하는 정신 에너지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리비도는 쉽게 말해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내향적 기질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대범인의 리비도는 외부로 흐른다. 즉, 외부의 대상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나와 어떻게 교류하는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 때문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분출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선호한다. 자연스레 말이 많아지고 사교성이 높아지며 친절해진다.
반면에 소심인은 리비도가 내부로 흐른다. 외부 환경보다는 내면의 심리 상태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따라서 대범인과는 달리 에너지를 보존하려고 한다. 사색적이고, 조용하고, 초연해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성향이 반대편의 방식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거나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소심인은 타인과 상호작용을 할 때 에너지를 소비하고, 홀로 조용히 생각할 때 에너지를 얻는다. 대범인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고, 홀로 생각하며 에너지를 소비한다.
대범인과 소심인의 차이는 관계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대범인들은 ‘사교적’이고 소심인들은 ‘비사교적’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사교성을 ‘관계의 크기’로 판단하려는 관점에 기인한다. ‘누군가와 사귀려는 성질’은 소심인에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심인은 상대를 고르는 것에 신중하다. 별 볼일 없는 시시콜콜한 대화만 주고받으며 에너지를 축내는 관계보다는, 조금이라도 내면을 반영하고 교감할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따라서 상대방의 성향이나 서로에 대한 친밀함이 중요한 요건이 된다. 반면에 대범인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친밀함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행복의 조건에 대한 연구에서 대범인과 소심인에게 <행복노트>를 적게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행복했던 경험’을 나열하는 것이다. 결과를 분석하자 두 성향은 대인관계에서 추구하는 것과 얻는 것 모두 상당한 차이를 나타냈다. 대범인은 대인관계를 통해 ‘유쾌한 일상, 자부심, 즐거움, 사회적인 인정’을 추구한다. 대범인의 <행복노트>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보낸 일상, 특히 그들과 목적의식이 있는 뭔가를 하거나 긍정적인 성과를 얻은 것들이 적힌다. 산책이나 운동, 심지어 업무나 공부도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즐거움을 느낀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왁자지껄한 술자리를 갖는 것,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다양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것을 중시한다. 친밀함의 정도보다는 대인관계 자체를 통해 많은 행복을 경험하는 셈이다.
반면, 소심인은 '친밀함을 바탕으로' 교류하는 시간 속에서의 안락함을 추구한다. 소심인의 <행복노트>는 친밀한 지인과 보낸 시간으로 채워진다. 비록 그 시간 자체에 목적이나 성과가 없어도 괜찮다. 조용한 벤치나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혹은 꼭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함께 있는 것, 가족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거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들이 적힌다. 소심인의 행복은 그렇게 쌓인다. 쌓이고 있다.
내가 대범인의 옷을 입고 넓혔던 울타리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좁아졌다. 그리고 ‘넓고 다양한 관계’를 좋은 삶의 전제로 말하는 이에게 “왜죠?”라고 되묻는 소심인이 되었다.
얼마 전 두루 선배의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 선배는 잘 지내요? 나는 잘 지낸다. 저도 잘 지내요. 요즘 두산 야구 잘하더라. 에이, 삼성은 오래 누렸잖아요. 사람 욕심이 끝이 없더라. 올해는 저희가 갖고 갈게요. 그래, 조만간 보자. 나는 그러자고 답했다. 그의 연락이 반가웠다. 먼저 나를 떠올리고 찾아준 것이 고마웠다. 우리의 공감대인 야구 얘기로 대화를 튼 것도 편안했다. 하지만 그의 연락이 <행복노트>에 적히진 않는다. 나는 소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