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쓴다. 정확히는 마음속 배터리를 사용한다. 우연히 이웃과 마주친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넘치는 지하철에서, 동료에게 인사하는 출근길에서, 입김을 나누는 회의실에서, 저녁 모임에서, 지인과의 대화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배가 고픈데 누구도 음식을 들지 않을 때, 눈을 맞추고 대화할 때, 입으로 생각을 뱉어낼 때, 귀에 상대방을 차곡차곡 담아 넣을 때, 소란스러운 무리의 옆을 지날 때, 점원이 뭔가 도와주려고 할 때, 그렇게 대부분의 일상에서 나는, 마음을 쓴다. 그들이 나를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 그렇게 된다. 나는 소심하다.
소심(小心) : 대담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음
마음속 배터리의 용량이 그리 크지 않다. 일상 곳곳에 비밀 충전소를 만들어놓고 회복을 시도하지만 주변은 늘 그 속도보다 더 많은 양을 요구한다. 이 배터리가 발열에도 참 취약하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혹은 나쁜 일이든,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사건을 만나면 한여름 에어컨 실외기처럼 팽팽 돌다가는 이내 방전이 되어버린다. 고요하던 일상은 텅 소리를 내며 엉망이 된다.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며칠간 제대로 충전도 못하고 맘 구석 부스러기까지 탈탈 긁어 쓰던 어느 아침, 대범한 누군가가 내 몰골을 보곤 질문을 던졌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아, 뭐, 별일 없다’고 답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엔 그 이상의 호기심이 담겨 있다. 첫 질문까지는 이해한다. 습관적인 인사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 이상의 접근은 당혹스럽다. 분명히 더 얘기할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 같은데 모른 척 한걸음 더 다가온다. 난 상대방이 불쾌하지 않도록 반걸음 물러서며 적당한 웃음이나 유머 비슷한 것을 토한다. 한편으론 지금의 내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며 쓱 밀고 들어오는 상대방과 얽히고 싶다. 그럴 수 없는 성격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마음을 쓴다.
점심시간엔 회식 겸 부서 인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평소 말 몇 마디 섞지 않은 이들과 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른 밥알을 삼켰다. 분위기에 맞게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으며 무난히 무사히 식사를 마쳤다. 서둘러 들어와 오후 회의 준비를 한다. 신규 프로젝트이고, 사실상 가장 많은 의견이 나오는 ‘두 번째’ 회의이다. 사전 조사 자료를 검토한 후 회의실에 들어선다. 회의 주제는 유사 서비스의 시장 동향, 주요 타겟층 등을 공유하고 장/단점 및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대범한 자들의 맥락 파괴 발언을 시작으로 저마다 꼬리를 물며 의견을 던진다. 주제는 광범위해지고, 입김은 늘어난다. 난 그들의 의견을 노트에 꾹꾹 눌러 메모한다. 의견을 내지는 않는다. 발표했던 문서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퇴근 시간이 임박하자 팀장이 허겁지겁 오더니 업무를 투척한다. 그것을 고요하게 받아 든다. 이유가 있겠지, 마음을 쓴다. 팀장은 ‘자기가 해도 되니 더 급한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만, 난 이미 그 일을 시작했다. 큰 불평 없이 빠르게 처리해주는 게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오히려 화근이 되었나 보다. 기분 나쁘냐고 묻더니, 그런 게 아니고 빨리 처리해서 드리려 했다는 나에게 얼굴을 구기며 한 소리 한다. 할 거면 기분 좋게 하라고. 이유가 있겠지, 마음을 쓴다.
늦어진 퇴근 탓인지 엘리베이터 앞이 한산하다. 다행이다. 승강기의 오르내림으로 인한 금속의 마찰 소리, 다른 층의 ‘문이 열린다’는 안내 방송, 그렇게 적당한 수준의 고요함을 즐기고 있는 찰나, 누군가 다가온다. 아침의 질문쟁이보다는 좀 더 가까운 관계. 하지만 그에겐 집요한 면이 있다. 나는 배터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한 후 미량의 그것을 알뜰하게 모은다. 일상적인 소재 몇 가지가 오가고 업무 얘기, 점심 메뉴, 최근 쇼프로에 출연한 스타의 사생활 얘기 등이 이어진다. “근데 진짜 별일 없어요? 표정이 평소랑 좀 다른데.” 그는 마치 내 고갈된 상태를 알기라도 하듯 변칙적이고 끈기 있게 대화를 잇는다. “아, 뭐, 별일 없어요. 그런데 오늘 좀 습한 것 같죠?” 남은 배터리 몇 방울로 목을 적시며 주제를 돌린다. “에이, 뭔 일 있구먼~! 뭔데요?” 돌아가는 주제를 상대가 잡아끈다. “뭔데, 뭔데~ 누구랑 다퉜어요?” 마치 양 볼을 두 손바닥으로 잡힌 것만 같다. 방전된 배터리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힘주고 있던 안면근육이 흩어지며 한마디 툭 뱉는다. 아, 그만 좀 물어봤으면 좋겠는데요.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부정적인 경우라면 특히나. 그날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내 모습만 놓고 보면 딱히 화를 냈다고도 보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는 조금 전과 다른 내게서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저 걱정이 돼서 물어봤을 뿐인데 불쾌감을 드러내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 테지. 실제로 그는 잘못이 없다. 그저 이 소심한 성향을 이해 못할 뿐이다.
이따금 소심인은 이런 경험을 한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공간에서 마음을 쓰고 쓰다가 결국 소진되어버리는 것. 집에만 가면, 혹은 친밀한 누군가와 얘기할 수 있으면 충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집에도 편치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때가 있다. 친구와도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여실히 그 상황들을 감내해야 한다. 마치 불경기처럼 잔고는 바닥인데 돈 쓸 일은 줄 서 있는 셈이다. 그래도 잘 버틴다. 다른 중요한 것들을 잘 참아낸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카롭고 엉성한 반응을 해버린다.
상대의 놀란 표정을 눈에 담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그 순간을 되새긴다. 그에게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아 사과할까, 연락할까, 오해를 풀까 겹겹 고민을 쌓는다. 괜스레 연락해서 별일 아닌 걸 확대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사과하는 게 맞겠지. 왜 평소처럼 차분하게 반응 못 했을까. 얼굴 보고 말하는 게 좋겠다. 너무 늦어지면 말 못 할지도 몰라. 그래도 전화로 하는 건 좀 그렇지. 아니, 얘기하는 게 맞나. 괜히 더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잖아. 그래, 당황했을 거야. 사과는 해야지. 내일 얘기해보자. 평소보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얘기하면 돼. 오만 생각의 행성을 오가며 수렴을 유도한다. 그 오랜 시간 홀로 또, 마음을 쓴다.
그렇게 고민 고민 끝에 말을 꺼내면 정작 상대방은 그 순간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필요할 때 말 못 하고 해야 할 때 망설인 경험, 셀 수 없이 많다. 마음을 쓰고 쓰다가 마지막에 걸린 엄한 놈에게 텅 빈 배터리를 던진 적도, 그 순간을 곱씹으며 후회한 적도 많다. 나에겐 큰 고민을 별일 아닌 양 툭 얘기해버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대범한 그들은 배터리 용량도 큰데 심지어 에너지 효율성도 높아서 능수능란하게 타인을 대한다. 부럽게 바라본 적도 꽤 있다. 보고 있노라면 이 성격 때문에 뭔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같은 경험을 몇 번 반복하고, 마음 쓰는 일에 조금은 무뎌지거나 나름의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게 되었을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스스로를 대범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구나. 결국 나는 어설프고 느리더라도 사소한 자극에 온몸으로 반응하며 차곡차곡 쌓아가는 존재. 그래서 더 넓고 깊게 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소심인은 의외로 꽤 많다. 그들 역시 대범해야 손해 보지 않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때론 흔들리고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여전히 고요한 자신의 시간을 사랑한다. 소심해서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쓰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세상 모든 걸 밝히는 해보다는, 이따금 어둠 속에 몸을 숨겨줄 수 있는 달이 되고픈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 우린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