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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May 07. 2019

불안이 내 방문을 열었다.

불안과의 밀당이 필요할 때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존경하던 은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고민은 간단했지만 맞물리며 밀려드는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어렵사리 꺼낸 첫마디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주저리 털어놨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현재에 대해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설령 나를 가늠해야 하는 확실한 장면에 놓이게 되었을 때,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는 정말이지 불안했다. 내 중심이 베팅되어 있는 큰 선택에서부터 점심 메뉴와 같은 작은 결정까지 그것은 일정하게 존재했다. 새로운 결정이 나에게 적합한 선택이었는지, 예상치 못한 문제는 없을지, 선택하지 않은 것이 정답은 아닐지, 혹은 어제저녁에 매운 음식을 먹었는데 오늘 점심에도 먹으면 배탈이 나진 않을지, 늘 걱정하고 고뇌했다. 발에 치이게 많은 그것들 틈에서 나는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불안은 더 커져갔다.


은사님은 담담하게 내 얘듣고는 다소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확실하지 않은 일에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하지 않아? 오히려 모든 게 확실하게 내 통제 하에 있다면 불안을 느끼고 싶어도 못 느낄 걸.”


불안을 느끼고 싶?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질문을 이었다.


“정말 자네가 원하는 만큼 불안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 불안과의 밀당이 필요하다?


'불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삶은 불확실함의 연속이고, 불안은 그런 삶 속에서 나의 내면에 집중하도록 돕는 알람시계와 같기 때문이다. 몰랐던 욕구를 알아채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막연히 나를 괴롭히기 위한 존재가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늘 두렵고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불안에게 있어 꽤나 섭섭한 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불안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에 달려있다고 한다. 이따금 짓궂게 굴지만 어떻게 대하는 가에 따라 나를 돕는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마치 '밀당'과 같다. 불안을 나의 절친이나 애인과 겪는 갈등이라고 상상해보자. 갈등 상황이 싫어서 무턱대고 피하기만 한다면 그 관계는 친밀하게 발전하지 못하고 희미해질 수 있다. 반대로 상대의 사소한 부분까지 너무 요목조목 따 갈등의 요소를 만든다면 그 관계로 인한 피로는 꽤나 증가할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능동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 왜 쉽지 않을까.


실제 관계가 그렇듯, 불안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서는 신체적 상태인 '흥분-차분'과 정신적 상태(기분)인 '좋음-나쁨'이 교차한 사분면에서 현 상태가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예컨대 '흥분-나쁨'에 위치하면 [분노], '차분-나쁨'은 [우울], '흥분-좋음'은 [환희], '차분-좋음'은 [행복]인 셈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안’이라는 정서를 느낄 때 반사적으로 그것을 '행복' 상태로 조정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숨을 몰아 쉰다거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지만 쉽지 않은 일. 특히나 큰 시험을 앞두었거나 면접실의 냉랭한 문짝 앞에서 초침을 보고 있을 때라면 행복? 평안? 그게 뭐였지, 하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그런 노력을 할수록 불안감이 더 커지기도 한다. 왜 그런 것일까.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피하고자 하는 불안을 때때로 공포영화나 놀이기구를 통해 일부러 체험하곤 한다. 정서는 갑작스레 큰 변화를 겪으면 본래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공포감을 통해 내 상태가 불안의 어떤 지점으로 이동되면 그 반대 방향으로 일정량 돌아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정서가 (다시) 좋아지고 있다'라고 느끼게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불안을 갑작스레 행복(기분이 좋고 안정적인 상태)으로 이동시키면 그만큼 강한 반대 인력을 감당해야 한다. 기존 상태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더 불안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 불안의 다른 얼굴


은사님의 말씀은 내가 심리학자로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불안을 내 의지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다른 정서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건 행복이나 환희가 아다. 불안과는 가까우면서도 전혀 다른, 국경의 반대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엉뚱한 녀석의 이름은 ‘설렘’이다.


설레다: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리다.


아래의 그래프를 보면 설렘은 '약간 흥분/약간 좋음'에 위치한 정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참 모호하고 오묘하다. '좋음-나쁨'의 경계선 바로 위에 있기 때문이다. 단어 자체로만 보면 행복이나 환희보다 더 젊고 기분 좋은 느낌인데, 따지고 보면 아랫동네의 '불안(약간 흥분-약간 나쁨)'과는 대문 열면 보이는 이웃사촌인 셈이다. 때문에 설렘은 기분이 조금만 나빠져도 불안으로 바뀌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불안한 상태에서 '실수로라도' 기분이 좋아지면 설렘으로 바뀔 수 있다. 정서는 한 곳에 안정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이곳저곳을 오가는 방향성을 갖는다. 따라서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은 때때로 설렘이기도 하다. 불안을 확신하는 그 시간 속에서도 실은 설렘과의 경계를 오가며 그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안을 지속적으로  붙잡아 둘 없다.




#. 불안을 설렘으로 만드는 법


스릴과 불안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스릴은 불안에 비해 물리적 시간적 경계가 분명하다. 공포영화나 놀이기구는 끝나는 시간이 존재하며 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자연스럽게 그 시간의 불안(스릴)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일상에서의 불안도 끝나는 시점을 지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스릴처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일상에서의 불안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주 찾아온다. 대부분은 이 상태에서 호흡이나 스트레칭 등 저마다의 방법으로 컨트롤을 하며 그 상태를 '차분'하게 바꾸려고 한다. 내 몸에서 나타나는 심장박동, 열기, 떨림 등 다양한 각성 상태를 진정시키려고 하는 셈이다. 그런데 신체적 상태는 '차분 → 흥분'으로 이동하는 것은 쉽지만 그 반대는 쉽지 않다. 시간이 없다면 잘 될 가능성은 더 희박하다.


하지만 정신적 상태를 '나쁨 → 좋음'으로 바꾸는 건 의외로 쉽다. (긴장된 일을 앞두었거나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올 때) 그저 기분이 좋거나 행복했던 일을 회상하기만 하면 된다. 요는 불안이 소거의 대상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며, 쉽게 안정시킬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불안과는 다른 종류의 각성 상태로 가기 위함이고, 그 차이를 인식하게 되면 이후부터는 종이 한 장 차이인 설렘의 경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적 존중(Unconditional regard)과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에 대한 기억이 효과적이다.


‘무조건적 존중’은 말 그대로 별다른 조건 없이 지지받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실패하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묵사발이 돼도 나를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해줄 수 있는 대상. 그 대상이 자신의 마음을 나에게 표현한 경험이 해당된다. 가령 친척들 앞에서 재롱을 피웠던 경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지긋이 바라봐 주는 연인의 눈빛, 내가 큰 실수를 하고 낙심할 때 '뭐 다 그렇게 사는 거지'라며 술잔을 건넸던 친구의 얼굴 등, 무엇이던 내 인생의 가장 존중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면 된다. 심장은 더 빨리 뛸지 언정,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무조건적 존중의 경험이 없다면 ‘자기 효능감’을 느꼈던 경험도 효과적이다. 이는 '과제를 끝마치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라는 의미로써, 쉽게는 '성공 경험'으로 달리 말할 수 있다. 꼭 대단한 목표가 아니어도 좋다. 녹초가 된 몸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숙제를 마치고 잠을 청한 기억, 몇 개월 간 알바를 하고 원하는 물건을 샀던 기억, 긴장됐지만 성공적으로 끝냈던 발표의 기억 등 내 삶에서 의미 있는 성공 경험이 모두 해당된다.


무엇보다 현재 나의 정서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서는 자연스럽게 발현되거나 변화하는 상태이므로 스스로 따져보기 전까진 알 수 없기 때문. '설렘'이란 마치 첫사랑이나 첫 직장 등 뭔가 특별한 사건에 따른 선물인 듯 인식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저 기분이 적당히 좋으면서 각성된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긴장상태가 설렘은 아닐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떨까.

  


 

모든 일에 초연하면 그게 나무지 사람이야?



은사님의 메시지는 오랜 시간 내 주변을 머물며 위로해주던 지원군이었다. 그는 ‘불안으로부터 무뎌지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나무나 돌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불안과 낙심이 우릴 움직이게 한다고. 행복한 바람은 서서 맞고, 움직일 때는 불안하게 가자고.


당시 나는 불안했다.

허나 수많은 걱정과 긴장, 불안했던 그때가 있어서 더 깊은 삶의 의미를 게 되었다.


나는 불안하다.

그래서 더 설렌다.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 참고문헌

원문: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log/are-you-aware/201810/anxiety-is-fact-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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