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김유신의 명마
“준비들 해왔어?”
그녀는 오픈 준비 끝나기 무섭게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난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안 떠오르더라고. 빠가(バカ)인 걸까.”
태리가 양 손 끝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그게 너의 한계다.
“그래요. 태리는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여기 분위기도 잘 모르고.”
그녀가 뿔테를 감싼다. 내가 그랬다면 ‘고따위로 할 거야?’라며 차디찬 눈빛으로 쏘아볼 것이다. 이렇게 노골적인 차별은 세계사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마로는? 생각 좀 해봤어?”
“안됐어요.”
생각해봤는데 잘 안 떠올랐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정도면 이제 마로와도 어느 정도 소통이 되는 편이다. 봉순은 마로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음’하며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쪽으로 인광을 비추며 물었다.
“봉팔이는?”
“음, 그냥 뭐, 몇 개 생각나서 적어왔어.”
몇 시에 잤더라, 4시였나.
밤잠 설치며 생각나는 것들을 모조리 메모지에 적었고, 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을 고르고 골라 추리고 추렸다. 관련 심리학 서적을 탐독했다. 그렇게 세 가지 전략을 뽑았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숨긴다. 그게 프로의 시간이다. 뿔테는 모를 것이다. 어제 발 쭉 뻗고 숙면했겠지. 오늘 밤부터 새우잠 자게 될 거야.
“그러면 나도 한두 개 생각한 거 있으니까, 나부터 할게.”
봉순이 주방으로 가더니 뭔가 만들며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커피 네 잔을 내어왔다. 잔 위로 봉긋 부풀어 오른 우유 거품이 그 아래 숨어있는 액체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마셔보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섣불리 그 맛을 예상할 수 없으나 커피, 아니면 커피일 것이다. 어쩌면 커피일지도.
“오, 커피야?”
“일단 마셔봐.”
컵을 들어 입으로 옮긴다.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입술을 감싼 뒤, 익숙하고 달달한 액체가 혀 위로 미끄러졌다. 그런데.
“음?”
커피는 커피인데, 뭐랄까. 이 느낌은…
보이는 것이라고는 달빛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뒤덮인 설산을 걷고 걷다가, 모닥불 넘실거리는 오두막 찾아 들어가 먹은 것이 국내산 양송이 수프일 때의 느낌?
아니, 좀 더 일상적인 느낌이다. 예컨대 이탈리아 배낭여행을 하다가 2주 차쯤에 나폴리에서 우연히 비빔밥을 떠먹었다. 그때의 맛이랄까.
아니, 좀 더 일상적이다! (그리고 난 이탈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 허기진 배를 움키고 퇴근하다가 우연히 학교 선배를 만나서 식감 좋고 달짝지근한 돼지갈비를 얻어먹었다고 치자. 나오는 길에 식당 입구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었다. 그런데 그 커피가 돼지갈비보다 더 달달 씁쓸하면서 혀에 착착 감기는 게 너무 맛있는 거야! 그런 느낌. 그래, 이건 믹스커피의 맛.
“다방 라테.”
봉순이 한 모금 들며 맛을 확인하더니 그 정체를 밝혔다.
“오! 너무 맛있어, 봉순! 스고이(すごい)! 어떻게 만드는 거야?”
“파우더 커피랑 스팀 우유의 조합인데, 그 비율이 중요해요.”
그녀의 네버랜드는 녹슬지 않았다. 차분하게 자신의 아이템을 설명하는 모습에서 광채가 흐른다. 마로는 말없이 일정 간격으로 다방 라테를 홀짝거린다. 맛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훈훈한 향에 취하려는 찰나, 산통 깨는 말이 귀를 쑤신다.
“태리한테 고맙죠 뭐.”
“에? 내가 왜?”
“믹스커피 자주 마시잖아요. 여기 좋은 원두들 놔두고.”
“음, 그렇지. 믹스커피가 유독 당길 때가 있어.”
“응. 맛이라는 게 저마다 다른 추억을 담고 있으니까, 봉다방에도 누군가에게 좋은 향수를 불러줄 수 있는 커피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호오! 그럼 내가 어시스트한 건가~?"
태리가 뒷목 부근을 긁적이며 웃었다. 난 그녀의 말이 뿔테에게 좋은 원두를 먹이고 싶다는 의미인 걸까, 저마다의 추억이란 건 너네 둘의 추억인 걸까, 머리를 굴리다가 소갈머리 없는 추임새를 넣는다.
“오. 태리님. 역시, 숨만 쉬어도 퍼지는 프로의 영향력!”
앉아서 업적만 넙죽 챙기는 저 뿔테보다 그럴듯한 분위기로 받아주는 봉팔이가 더 구리다.
“봉다방 라테 어때? 이름 말야.”
다급한 맘에 한 숟가락 얹었다.
“응. 좋네. 봉다방 라테로 하자.”
봉순의 윤허를 받았다. 그녀가 은은한 표정으로 잔머리를 귀 너머로 넘긴다. 그것이 몇 초간인지 혹은 순간이지 모르나 그 옆모습을 넋 놓아 보고 있나 보다. 그녀가 고개를 고정한 채 곁눈으로 날 보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평소 같았으면 뭘 봐, 왜, 라며 작은 눈을 치켜떴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은 왠지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진했던 내 시선을 못 읽은 것일까.
“왜?”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빠짝 돌리더니 정면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어? 아, 그, 두 번째 전략은 뭐야? 얘길 해야지.”
식은땀 숨기며 급하게 둘러댔다.
“아, 다음 거?”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내 식은땀 보다 더 요상하다. 이 어색함, 나만 느끼는 건가.
“흐흐, 봉 사장님. 뜸 들일 줄 아시는데요?”
태리의 단단한 목소리가 그 말캉했던 어색함에 몽둥이질을 한다. 봉순은 뭔가 정비하듯 자세를 고치더니 말을 더했다.
“장동건 씨?”
그 생뚱맞은 호칭에 모두 동작을 멈춰버렸다. 이 장면에 상관없는 냥 봉다방라테만 홀짝이던 마로조차 동작을 멈추고 바라본다. 봉순은 한쪽 손의 손바닥을 위로한 채 그 끝을 뿔테에게 향하고 있었다.
“주문하신 민트 초코 라테 나왔습니다.”
뿔테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해 그녀의 손끝과 얇은 손목 그리고 방금 말을 뱉었던 그 입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태리, 기분 어때요?”
“응? 좋은데? 나한테 장동건 사마(さま)! 한 거 맞지? 기분 좋아!”
“두 번째 전략은 '주인공 만들기'야.”
그녀가 테이블 위에 정사각형의 얇은 나무토막들을 꺼내 놓는다. 그 토막마다 이름이 적혀있다. 조인성, 송혜교, 전지현과 같은 스타들의 이름부터 꼭미남, 꼭미녀, VIP고객, 요즘 대세, 동네 주민, 단골, 모태 솔로, 외로워요 등 다양하다.
“주문을 한 다음에 번호표 대신 이 중에 하나를 갖고 가면 돼.”
누구나 한 번쯤은 유명인을 꿈꾼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고 싶을 때가 있다. 봉다방에서는 가능하다. ‘송혜교님, 주문하신 토스트 나왔습니다.’ 내 이름이 불리면 메뉴를 받으러 가면 된다. 적어도 그 순간, 난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귀가 쫑긋 서는 대스타가 될 수 있다.
연예인 생활에 회의가 느껴지면 ‘동네 주민’의 일상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다 어느 날은 ‘VIP 고객’이 돼 보기도 한다. 오늘따라 왠지 애인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면 ‘외로워요’ 팻말을 집어 든다.
정말이지 소박하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였다. 게다가 상당한 이점도 숨어있다. 지금까지는 봉다방의 직원이 메뉴를 테이블로 직접 갖고 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비좁은 봉다방의 특성상 직원들까지 테이블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것은 비효율적일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가시거리 내에 있는 손님에게 메뉴명만을 외치면서 받아가라고 하는 건 봉다방 분위기와 맞지 않았다.
이 팻말을 쓰면 손님에겐 작은 이벤트를 봉다방에겐 큰 효율을 줄 수 있다. 역시 봉순이다. 어쩌면 그녀도 늦은 새벽까지 프로의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봉순이 더더욱 봉순으로 보인다. 아, 봉순이여.
“봉쑤운! 정말 놀라운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뿔테가 두 손을 번쩍 들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상당하네.”
감동으로 격해진 마음 숨기고 태리의 감탄에 편승한다. 상당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마로도 잔을 내려놓고 팻말을 몇 개 살펴보더니 박수를 친다. 아니, 박수를 치기보다는 손바닥을 서로 맞대고 떼고를 반복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굉장히 느린 속도인 데다가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상당한’ 표현을 한 셈이다. 각자의 성격, 혹은 상황? 어쨌든 그에 맞는 감탄을 쏟아냈고, 그 고양된 기대감의 화살이 궤적을 그리며 나에게 향하고 있다.
“이제 봉팔님 차례! 대단한 분이시라는 풍문이!”
태리가 화살대를 좀 더 탄탄한 것으로 바꾼 뒤 화살 끝에 독을 묻힌다. 그런데 대단하다는 말은 봉순한테 들은 건가.
“아하하, 별말씀을요. 봉순 사장님이 절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녀가 난색을 표했고 태리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풍문으로만 들은 거였어? 그냥 인사치레였네. 시작부터 쉽지 않다.
“그럼 제 것을 얘기해보겠습니다.”
봉순과 둘이 있을 때는 어렵지 않았는데 네 명 앞에서 얘기를 하려니 입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긴장감 때문인지 입 속에 사막이 찾아온다. 봉다방라테를 한 모금 집어삼킨 뒤 말을 이었다. 미세한 떨림을 숨긴다.
“비록 안정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비록 안정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봉다방은 평균 20~30잔의 판매량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게 본전 턱걸이를 간신히 해나가는 요즘, 가장 필요한 것은 첫 손님을 두 번째 손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발길을 세 번째로, 그렇게 세 번째는 네 번째가 된다. 네 번째는 자주 보는 얼굴이 되고, 자주 보는 얼굴은 반가운 사람이 되고, 그 반가운 사람은 봉다방의 가족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함선 봉다방'의 든든한 골격이 되어줄 것이다. 불특정 다수보다는 정겨운 친구들을 사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과 봉다방만의 무언가를 공유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필요한 세 가지 전략이 있어요.”
“오, 세 개씩이나! 역시 대단하십니다!”
넌 좀 가만히 있으면 안 될까.
“아하하, 네. 그 첫 번째 전략은 쿠폰입니다.”
“쿠폰? 전략이라 할 만한 수준은 아닌데?"
봉순의 차가운 반응이 입을 때린다. 태리와 봉순이 뜨거운 물과 찬 물을 번갈아 뿌리고 있다. 둘 다 달갑지 않다.
“물론이지, 쿠폰은 이미 흔하디 흔한 동기 강화 수단! 우리는 조금 달라.”
일반적으로 쿠폰은 10진법에 기초하여 사용되고 있다. 열 개를 모아야 새로운 단위의 한 개가 완성되는 셈. 전 세계 인구가 가장 익숙해져 있는 규칙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다방 쿠폰은 깜찍한 차별화를 둔다. 8진법, 여덟 잔이면 한 잔이 무료! 이것은 단순히 두 잔이 줄어드는 개념이 아니다. 이 안에는 봉다방만의 깊은 철학이 숨어있다.
“그게 뭔데?"
“내 이름이 봉팔이니까, 팔….”
입을 쩍 벌리며 '웬일이니’를 연발하는 봉순. 미안, 그게 진짜 이유야. 하지만 이건 단순 차별화에 불과하다. 봉다방 쿠폰의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다. 운전자가 딴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동네로 차를 모는 모습에, 바에서 양주와 함께 제공되는 키핑(keeping) 서비스에, 김유신이 자신의 명마를 내려쳤던 서슬 퍼런 칼날에.
“귀소본능?”
“응.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오려는, 말 그대로 본능이지. 그 본능을 자극하는 거야.”
“어떻게?”
“봉다방 인테리어에서 힌트를 얻었어.”
‘너의 인테리어’라는 말로 그녀의 공을 높이려던 의도는, 종전의 사건들 때문인지 ‘봉다방 인테리어’로 바뀌었다. 내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얇은 노끈들이 줄지어있다. 봉다방의 한쪽 벽면, 선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간, 양쪽 끝이 나사못으로 고정된 노끈에는 참새 발가락 크기의 앙증맞은 집게들이 매달려 있다.
그 집게마다 봉다방의 엽서 그리고 그녀가 사진으로 담았던 추억의 조각들이 걸려있다. 마치 요정들의 빨래를 널어놓은 듯 정겹고 귀여운 느낌. 은은하다 못해 어둑한 봉다방의 조명들 틈에서 유유히 할로겐램프의 집중 조명을 받는 것이, 마치 '요정들의 빨래터'라는 연극 무대 같기도 하다.
“저게 뭐?”
“저기에 손님들의 쿠폰이 걸리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