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설득과 동조 이론 그리고 '긴 막대 족'
방에 다섯 명의 사람이 앉아있다. 한쪽 벽엔 두 개의 막대가 그려져 있는데 그 길이가 서로 다르다. 잠시 후 진행자가 방으로 들어와서 질문한다.
둘 중에 어떤 막대가 더 길다고 생각하세요?
첫 번째 응답자가 두 막대 중 짧은 것을 가리키며 ‘저 막대가 긴 것 같다’고 대답한다. 순간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 사람도 짧은 막대를 선택한다. 게다가 첫 번째 사람보다 확신에 찬 목소리다. 그렇게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사람도 같은 선택을 한다. 결국 마지막 사람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짧은 막대를 선택한다.
설득과 동조에 대한 사회심리학 실험 중 한 장면이다.
사실 맨 마지막 사람을 뺀 네 명의 응답자는 모두 연기자이다. 그곳의 절대 다수인 네 명이 짧은 막대를 선택했을 때, 마지막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알아본 것이다. ‘마지막 사람’이었던 실험 참여자 대부분은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확한 정답이 있음에도 오답을 택했다. 짧은 막대를 가리켰다.
우리의 사고는 상당 부분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크게는 대자연, 작게는 지금 내가 속한 장면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광고 문구처럼— 모두가 “YES!”할 때 “NO.”라고 말하며 맥락과 반대되는 태도를 갖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생각만으로는 안 그럴 것 같지만, 막상 그 장면 속에 놓이면 짧은 막대를 향해 손가락을 뻗게 될지 모른다.
권위 있는 상사의 결정이 탐탁지 않을 때, 혹은 그가 목에 묶고 온 넥타이가 한없이 촌스러울 때, 좋은 결정입니다. 오늘 넥타이 멋지십니다,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틈에서 "NO! 그 거지 같은 결정은 뭡니까? 기획안을 보시기는 하셨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전 직장의 김 부장은 정말이지 특이한 사람이었다. 빛 받으면 화려하게 빛나는 은갈치 정장에 감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 파란색 넥타이를 즐겨 매는데, 때때로 어떤 쇼핑몰의 테러를 당한 건지 통이 큰 9부 정장 바지를 너풀거리며 입고 올 때는… 휴, 그가 지난 자리의 눈들이 서로를 마주 보게 된다. 너도 봤어? 하면서.
문제는 자신의 끔찍한 모습은 생각지 못하고 다른 직원들의 옷차림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물론 패션 감각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주제에서도 ‘내가 패션이나 그쪽으로는 감이 좋잖아?’하면서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인다. 때문에 그의 패션 발언을 부인하는 건 김 부장 자체를 모욕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한 번은 회식자리에서 과장 한 명이 그의 지적을 농담으로 받아친 적이 있다.
“와이프가 이렇게 맞춰 입으라고 사준 거라서 말입니다.”
김 부장은 선물은 선물이고 패션은 패션이라며 그 초록색 셔츠에는 빨간색 넥타이로 포인트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록색 옷에 빨간 넥타이라뇨. 서커스 공연도 아니고, 하하하!”
순간 김 부장의 얼굴에 스친 살기를 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과장은 수난의 시간을 보냈다. 업무는 물론, 사내 매너부터 복장까지, 부장의 트집과 호통으로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런 인물이 드라마 밖에도 실존한다. 사무실의 그 누구도 김 부장에게 업무에 대한 의견 개진을 할지언정, 패션에 대한 언급을 삼갔다. 그 장면의 누구도 ‘NO’를 외치지 못했다.
봉순이라면 어땠을까.
자신의 집시 패션을 지적하는 김 부장을 향해 “그 넥타이가 주는 혐오감부터 생각해보셨으면 하네요.” 몇 번이고 그렇게 ‘NO’를 외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처럼이나 그녀는 남들보다 덜 사회적일지언정 더 용감하다. 네 명의 결정과 무관하게 긴 막대를 가리킨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봉순은 그 ‘긴 막대 족’이다.
그런데 모두가 ‘YES’할 때 ‘NO’할 수 있는 긴 막대 족 중에서도 좀 더 특급이 존재한다. 이 특급 인간들은, 반대로 모두가 ‘NO’할 때도 ‘YES’를 할 수 있다.
그 차이가 뭐냐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돌진하는 지하철을 시야에 두고, 선로로 떨어진 이에게 뛰어들어 구출해냈던 남자. 거대한 불덩이가 닥치는 대로 뒤를 집어삼키고 유독가스로 호흡이 짧아질 때,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구로 모여들며 앞사람의 옷깃을 잡아당기거나 살기 위한 본능적 비명을 지를 때 침착하게 그들을 내보낸 후 가장 나중에 탈출한 여자.
이들은 그 장면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NO”라고 할 때 "YES!"를 외치며 선로에 쓰러져 있는 이를 향해, 언제 나를 집어삼킬지 모를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이들은 특급이다.
어제저녁 9시 뉴스에서 한 청년에 대한 기사를 봤다. 후미진 골목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여인에게 누군가 다가갔다. 그렇게 검은 그림자가 한 여인의 삶에 짙은 흉터를 남기려는 찰나, 주변을 지나던 청년이 있었다. 여인의 비명 소리에 청년이 다가갔고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림자는 도망쳤다. 청년은 그를 쫓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그림자는 각목을 집어 휘둘렀다. 이곳저곳 타박상을 입었지만 결국 청년은 상대방을 제압했다. 청년의 제압 영상이 누군가의 스마트폰을 거쳐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를 달궜고, 기자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냈다.
청년은 짙은 색 안경테의 다리 부분을 집어 올리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여성분께서 고맙다고, 너무 고맙다고 계속 얘기하시는데 저는 그게 참… 한편으로 안타깝더라고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게 이렇게나 고마운 일이 되었구나, 이제 그런 세상이구나 싶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어금니까지 보이는 환한 미소를 드러내며 말을 더했다.
“세상이 참 흉흉한가 봐요. 여성분들. 일단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어둡고 외진 길 피하시고요.”
그 사건은 <도심 속 슈퍼맨>이라는 기사 제목으로 꽤 오랫동안 인터넷 세상을 달궜고, 몇몇 패러디 영상들도 뒤이어 조명받았다. 패러디 속의 청년, 그러니까 청년의 배역을 맡은 이는 슈퍼맨 의상을 입고 있었다.
청년에 대한 댓글들을 봤다. 애인으로, 남편으로, 더 나아가 사위로, 그 청년은 여성들 대부분의 워너비가 되었다. 그렇게 그와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몇몇 기업과 사회단체에서도 러브콜을 보냈다.
그 청년이 바로 뿔테다.
뿔테는 그런 놈이다. 특급.
뿔테 덕에 손님도 늘었다. 슈퍼맨 때문인지 환상적인 디저트 맛 때문인지, 뿔테가 나타난 후 봉다방의 발 디딜 틈은 눈에 띄게 촘촘해졌다. 봉순의 선택은 옳았다. 물론 봉다방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나에겐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정말이지 눈에 가시 같은 놈이 나타난 셈이다.
“저기 봉팔님?”
“네?”
“괜찮으시다면 브레드 커팅, 제가 해도 될까요?”
오늘 아침, 또 하나의 봉다방 살림을 그 가시에게 빼앗겼다. ‘자신에게 좀 더 익숙한 일’이라며 정돈된 톤으로 얘기했지만 나는 안다. 칼을 불규칙하게 왕래하며 빵에 찰과상을 남기고 있는 초짜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게다. 과도한 극존칭이 오히려 나를 비웃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설거지, 마른 잔 닦기, 커피 머신에 원두 넣기, 빈 테이블 치우기, 청소기 돌리기, 화분에 물 주기… 가뜩이나 내가 하는 일들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국한되고 있다. 그나마 디저트를 준비하거나 만드는 일이 암묵적인 봉팔의 영역이었는데, ‘진짜’가 나타나서는 그 영역마저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앗아갔다 이미.
마로는 그 실력이 봉순을 넘어섰고 커피 만드는 비중이 봉다방에서 가장 높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봉다방에서 드립 커피를 주문하는 '대담한'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각자 틈틈이 연습을 했는데, 역시나 마로의 실력이 단연 돋보였고 그 성장 속도도 빨랐다. 좁다란 드립 커피용 주전자의 터널을 떠나 자유 낙하하는 커피의 굵기가 얇은 기둥처럼 한결같았다. 그녀는 타고났다.
봉순은 커피를 만들거나 남는 시간엔 봉다방 곳곳을 수선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봉다방의 규칙에 균열이 일어나면 거짓말처럼 알아채고는 나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긴장했고, 어정쩡해졌고, 그렇게 실수가 늘고, 내가 맡는 일의 중요성은 암묵적으로 더 줄어갔다. 그리고 단순 업무의 점유율이 늘어났다. 봉순과 동창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지금의 난 그저, 초저가 알바생에 불과하다.
당연하다. 난 심리학자다. 내 역할은 좀 더 고차원적이고 음, 좀 더 추상적이고 음, 그런 거야. 말하자면 브레인 같은 거지! 내 씁쓸한 위로와 별개로, 뿔테는 방금 갈취한 칼로 능숙하게 빵을 자를 뿐이다. 마치 이미 두 동강 나 있는 빵과 빵 사이를 지나가듯 부드럽게 단 한 번, 그렇게 빵은 반듯하게 잘렸다. 그 놀라운 프로의 손길을 곁눈질하며 잔을 닦는다.
“다들 일찍 왔네.”
봉순이 아침 장을 보고 돌아왔다.
“태리도 일찍 왔네요.”
뭐야, 저 뿔테는 '다들'에 포함 안돼? 저 놈 빠지면 나 하나인데, 내 이름이 다들도 아니고.
“태리님 빵 자르는 거 예술 이셔. 장난 아님!”
맘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떨까. 웃고 있을까. 정말 웃는 얼굴일까. 이 표정을 마로가 봤다면 놀란 고양이 표정을 지었겠지. 아, 그러고 보니…
"마로 왜 안 오지?"
"거기 있잖아."
"아악!"
언제부터 있던 거지. 마로는 비좁은 주방 구석에서 레몬을 자르고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놀란 것이 민망하여 봉순을 살폈다. 다행히 별 관심 없이 주방으로 들어선다. 두 사람 서 있어도 꽉 차는 주방에 네 명이나 들어서자 딱 만원 지옥철이다. 봉순이 주방을 탈출하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파트를 나눠야겠지?"
하긴, 지하실이었던 다방에서 이 많은 사람들이 일 하는 건 손님 공간을 뺏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명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은 봉순이도 알고 나도 알고 홍자도 안다.
"태리. 커피랑 음료 만드는 법은 노트에 따로 정리해 놓기는 했는데." 그녀가 마로를 가리켰다. "마로에게 배우는 게 더 나아요. 제일 잘하니까."
역시 난 빠지는 군. 잠깐, 그렇다는 건?
"봉팔이는."
그렇다는 건.
"쭉 그래 왔던 대로 나랑 하고…."
봤냐 뿔테. 이게 원년 멤버의 결속력이다. 그 같은 새내기들이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굴러온 돌이면 굴러오던 그대로 굴러가버려.
"아, 태리님이랑 하면 좋은데… 제가 실력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네요. 하하""
고양이 눈빛 외면하며 또 맘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딴생각하다 나오는 트림처럼 자동화되어 있나 보다.
"흐에! 그런 게 어딨어요~ 센빠이(先輩)! 다음에 같이 할 때 많이 알려주십시오!"
같이 할 일 없다. 알겠냐. 웃지 마.
"그리고 앞으로 봉다방을 좀 더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와 줘." 봉순이 제법 사장님 포스를 풍기며 말했다. "고로 내일까진 전원 출근."
역시 죽으란 법 없다. 오늘따라 일이 잘 풀린다. 내 자리 넘보는 저 거구 뿔테에게 보여줄 때가 된 것이다. 허드렛일이 내 주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봉다방에 슈퍼 브레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만 슈퍼맨인 줄 알아?) 그리고.
아무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