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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03. 2016

새로운 전략 2: 기회비용

#31. 선택하지 않은 것이 커질 때


"저기에 손님들의 쿠폰이 걸리게 될 거야."


봉다방의 쿠폰은 손님들의 빼곡한 지갑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벽에 있는 빨래터에 걸어 둔 뒤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줄지어선 쿠폰들은 곧 인테리어가 된다.


쿠폰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곳은 그들의 일부가 남아있는 공간이 된다. 나의 가족이 있는 집, 나의 일이 있는 회사, 나의 고뇌가 있는 화장실, 나의 마음이 있는 애인 등에 더하여, '나의 쿠폰과 미남 직원이 있는 봉다방’이라는 귀소본능이 추가되는 셈이다.


“벽에 쿠폰이 너무 많아지면 어떻게 하지? 더 이상 매달 곳이 없을 정도로.”


“상상해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 거 같아?”


곰곰이 생각하는 봉순. 머릿속 계산기가 돌아가는 소리, 갑자기 얼굴에서 환희가 피어오른다.


“좋을 것 같아!”


어깨에 힘 들어간다. 어이 뿔테, 보고 있나? 내 몇 마디에 환호하는 그녀의 모습.


"귀소본능! 너무 재밌어요! 역시 봉팔님, 듣던 대로 아이디어 뱅크!" 뿔테가 격하게 호응한다. 도대체 어디서 자꾸 들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말해준 사람이 없는데. "저기 그런데…"


그런데 뭐.


"뭐랄까 쿠폰 중에 내 쿠폰을 찾으려면 뭔가 나만의 표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순조로운 출발에 안도하려는데 뿔테가 불쑥 의견을 더한다.


"그건, 이름이나 별명을 적으니까."


봉순이 받아준다.


"아, 물론 그렇지만 좀 더 눈에 들어오는, 예를 들면…"


예를 들 수가 없겠지. 넌 어제 발 뻗고 잤으니 말이야. 넌 예를 들 수 없어. 예를 들어선 안 돼. 그게 예의야. 어디 숟가락을 올리려고.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면 딱딱 소리 나게 물어뜯고 싶던 찰나, 마로가 뜬금없이 수첩을 꺼낸다. 그러더니 그 어른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한 장씩 넘기는데 초반에는 벽화와 비슷한 꽃들이 나오더니 어느 장에서부턴가 선 몇 개로 표현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중 내가 아는 몇몇 손님, 말하자면 사주만세라던가 독거여인 정도가 지나갔다. 표현은 간단했지만 딱 알아볼 수 있었다. 마로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수첩을 꺼내서 뭔가를 끼적거렸다. 뭐하나 싶었는데 손님의 얼굴을 그렸었나 보다. 불길한 예감에 뿔테의 얼굴을 본다. 그림을 보자 그 반듯한 일자 코의 평수가 넓어진다.


"네! 맞습니다! 얼굴!"


너무 경직되어 소갈머리 없는 반응조차 못하고 있자, 뿔테가 흥분하며 질문을 더한다.


"마로 씨, 얼굴 그리는데 얼마나 걸려요?"


"10초."


마로가 허공에 그리는 시늉을 하더니 대답했다.


"쿠폰에 얼굴을 그려주면 어떨까요? 물론 마로 씨가 힘들겠지만…"


태리가 남은 셋을 번갈아 보며 얘기한다. 지금 우리 마로를 뭘로 보고, 그녀는 천재 바리스타다. 손님들 얼굴 그리고 있을 시간 없다.


"좋아요."


내 걱정이 주제넘다는 것을 알리듯, 마로는 기다렸던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오묘하다. 고양이 얼굴의 볼에 홍조가 스치며 소녀가 되어있다. 설마, 이 자식 좋아하는 거야?


"그럼 이렇게 하자." 봉순이 사장 포스 풍기며 정리한다. "좋은 생각인데, 모든 사람을 그리는 건 무리고 쿠폰에 도장을 네 개 받았을 때 그려주면 어떨까?"


"네 잔엔 얼굴, 여덟 잔엔 커피!?"


봉순이 제안하자 태리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녀가 생기 넘치게 추임새를 품으로 당긴다.


"응. 맞아요."


"이야- 역시 봉쑤운! 사장님은 달라!"


그런 그녀의 화답을 태리가 다시 당겼다. 마로도 느린 박수로 하나가 된다. 셋이 짠 걸까.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이라더니, 저 개가 물어가도 버릴 데라곤 없는 완벽한 놈이 내 작디작은 밥상에 삽을 올렸다. 믿었던 마로마저 고춧가루를 뿌렸다. (이럴 거면 내 표정은 왜 자꾸 알아채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새벽이슬과 함께 짜낸 첫 번째 아이디어는 모두의 공으로 돌아갔다.


"역시 우리의 팀워크는 환상 그 자체!"


있는 힘껏 좋은 표정을 끌어 모은 뒤 젖 먹던 힘 다해 훈훈한 멘트를 날렸다. 여기서 무너질 순 없다.


"자 그럼 두 번째 전략을 얘기해 볼게요."


"흐아, 아직 두 개나 남았어! 행복합니다!"


절제라곤 없는 터미네이터가 자꾸 내 앞 길에 꽃을 뿌린다. 밟고 갈 수 있으면 가보라는 듯이.

봉순과 둘만 일하게 될 내일을 떠올리며 발을 뻗는다.


"두 번째 전략은, 커피의 제조 과정을 손님에게 참여시키는 거예요.”


음식 만드는 취미 있는 사람은 안다. 같은 음식이라도 배고플 때 배부를 때 다르듯, 자신이 만든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만든 양념에 내가 다듬은 채소와 갖은 재료들을 털어놓고 볶고 지지며 그렇게 음식이 완성되어 갈 때쯤,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미각의 향연을 위해 나만의 간으로 화룡정점을 찍는다. 옅은 맥의 리듬으로 몸 상태를 파악하는 한의사처럼,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그 음식과 정이 들어 버린다.


"손님에게 요리를 시킨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데 과정 일부를 참여시킬 수는 있다. 사실 이미 손님들은 그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보통 봉다방에서 커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단순화시켜보면, 메뉴를 고르고, 만들고, 전달하는 게 전부이다. 그중 메뉴를 고르는 초기의 과정을 손님이 참여하는 셈이다. 더불어 어떤 메뉴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그 가치를 지불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여기가 포인트!” 난 종전 3인 강도단의 악몽을 잊으려 의식적인 강조점을 둔다. “이 초기 과정의 의미를 좀 더 강조하는 거야.”


손님들이 참여할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일반적으로 커피의 주문은 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제 봉다방에서는 자신의 선택을 주문서에 적어야 한다. 중요한 건 그들이 받는 주문서에 형식이 없다는 점이다. 그저 막 오려진 갱지,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는 공간이지만 손님들은 메뉴에 있는 것들 중에 한 가지를 골라 적어 넣는다. 선택이 끝난 것.


그리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남긴다.


“선택하지 않은 것? 그게 뭐예요?”


뿔테가 묻는다. 그 질문에 내가 봉순만 바라보며 얘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색하지 않게 뿔테에게 대답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리스트에서 선택하지 않은 메뉴 정도겠죠. 그런데 이 경우에는…”


그녀가 온 신경을 기울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기며 작은 눈의 높이가 더욱 좁아진다.


“무엇이던 그려 넣을 수 있었던 공간이야.”


선택하지 않은 것이 크게 느껴질수록 선택한 것을 더 크게 인식하는 존재,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무의식 속 사고에서의 '카페라테'는 어떤 규칙이나 형식도 없는 갱지의 표면에서 굳이 건져 올린 네 개의 낱말이 되는 것이다. 카페라테를 먹기 위한 ‘적지 않은’ 참여를 하는 셈이다. 그 맛있는 녀석이 잠시 후 앞에 놓이고, 입 속 전체에 달콤한 따스함을 번지며 스며든다. 싸웠던 애인과 극적인 화해를 하며 주고받는 키스처럼, 미각은 그 모든 자극에 반응한다. 평소보다 더 민감하게, 더 진하게.


“말이 돼?”

“믿, 거나 말거나. 밑, 져야 본전! 선택하지 않은 것들의 심리적 크기를 키운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어.”


그녀가 흐린 초점으로 테이블 어딘가를 응시한다. 표정 변화는 없지만 그 귀는 초파리의 날개처럼 파들거린다.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그렇게 동하는가 싶더니 문득 입을 뻐끔거린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잖아."


"응?"


"메뉴 선택 말이야." 그녀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본다. "선택하지 않은 것이 커진다면 선택한 것에 대한 기대도 커지는 것 아니겠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뭐랄까, 그녀가 가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길어진 끝음절, 순간적으로 스친 눈의 빛깔, 어색한 타이밍에 흩어지는 시선. 가끔씩 드러나는 이 아련함은 뭘까. 나만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아니면 나에게만 보내는 것일까.


"하하하 너무 좋아요. 재밌어요! 스바라시!" 오묘한 침묵을 뿔테가 깼다. "그런데…"


또 왜!


“그냥 든 생각인데, 제작 참여라면… 그래도 뭔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도쿄에서 자주 가던 나베 집이 있었는데, 면하고 국물을 따로 주는 거예요. 더 맛있어지게 따르는 법이 적힌 종이도 함께.”


“아.”


나도 모르게 추임새를 붙인다.


“그 방법에 따라 국물을 그릇 테두리 쪽부터 중심부까지 시계 반대방향으로 따라서 먹으면 정말 맛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뿔테가 봉다방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린다. 그의 경험담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직감했다. 내 전략은 또다시 모두의 공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봉순의 입에서 그 아이디어가 정리되어 나오는 것은 원치 않았다. 뿔테의 ‘두리번’이 드립 용기 어딘가를 스칠 때쯤 망설이던 입을 연다.


“와! 역시 태리님 대박!”


격한 반응에 셋의 고개가 나를 향한다.


“그러니까 우리도 메뉴마다 제작의 과정을 넣는 거야. 예를 들면…” 드립 용기를 잽싸게 갖고 온다. “예를 들어 드립 커피는, 커피가루가 있는 드리퍼를 컵 위에 올려서 일인용 드립포트와 함께 주는 거야.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드는 매뉴얼과 함께 말이지.”


* 드리퍼(Dripper): 여과지를 올려놓고 커피를 담는 도구. 필터 안에 여과지를 깔고 필요한 양은 커피 분말을 담은 후 끓인 물을 중심에서 주위로 조금씩 주입하면, 분말에서 기포가 발생하고 추출된 커피는 필터 밑에 뚫린 구멍을 통해 포트로 내려감.

* 드립 포트(Drip Pot): 드립용 주전자. 배출구가 S자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임. (네이버 지식백과) ]


“직접 따라서 먹으라는 거야?”


그녀가 물었다.


“응.”


잠시간의 침묵이 있었고, 봉순은 쾌재를 외쳤다. 태리는 만세 자세를 취했다. 마로의 박수가 더해졌다. 봉팔은 또 우리가 드림팀이니 어쩌니 하는 영혼 없는 말들을 쏟았다. 세 가지를 준비해왔지만 마지막 전략을 얘기할 만큼의 의욕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고양된 분위기의 셋은 그 대미(大尾)를 장식할 수 있는 세 번째 전략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 마지막은…”


봉순이 집중하며 바라본다. 시선이 날 향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건 날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입에서 나올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도, 좋다. 그녀의 눈빛 끝에서 느끼는 이 긴장감이 좋다. 언젠간 나를 볼 것이라는 기대감도.


“마지막은 단골.”

“단골?”


봉순과 뿔테가 눈을 키우며 복명복창을 했다. 난 몇 글자 더 이어 붙이며 그 단어를 완성시킨다.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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