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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05. 2016

새로운 전략 3: 단골 비망록

#32. 대상관계 이론


자리를 고쳐 앉은 봉순.


“어떻게 하는 건데?”

“생각보다 간단해. 늘 하던 거니까.”


그들을 먼저 알아보는 것. 간단하면서도 사실상 쉽지 않은 이것이 두 번째 방문객을 세 번째로, 반가운 얼굴을 가족으로 이끄는 열쇠이다. 귀소본능과 제작 참여는 초석일 뿐!


"단골을 만들자는 거지?"

"으, 응"


뭔가 장황하게 내용을 풀어가려는데 봉순이 핵심을 찌른다.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라는 말이 떠오른다. 본디 그 말은 역전에 대한 뉘앙스가 더 강하지만, 수비하는 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칫 한 번의 실수로 모든 노력이 날아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는 매우 중요하다. 승리의 기운을 잘 이어서 그날의 경기, 그 스토리에 유종의 미를 더하는 역할인 셈. 오늘 나의 마무리 투수는 '단골 비망록'이다.


그런데 봉순이 타석에 들어서더니 마무리 투수의 초구를 때려 담장을 넘겨버렸다. 커브, 슬라이더, 포크볼 등 다양한 구위를 보이기도 전에 말이다. 더군다나 그 표정을 보니  기대감마저 그득하다.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영화인데도 재밌게 보려는 것처럼 욕심스러워 보인다. 자신의 영화 결말을 미리 알리고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감독이 몇이나 될까. 지금 난 초구에 홈런을 맞은 마무리 투수이자 결과가 알려진 영화의 감독이다. 그만큼 어렵다.


끝이 흐리멍덩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멍텅구리로 만드는 거야, 김 부장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 패션에 있어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지만 업무의 마무리는 깔끔했던 그였다. 프로젝트가 갈 길을 잃다가도 누군가 부장실을 다녀오면 거짓말처럼 해결이 되고는 했다. 모난 성격임에도 그 자리에 있는 이유를 알게 한다. 비록 홈런을 맞았지만 아직 동점은 아니다. 지금부터 잘하면 된다. 내용이 실한 영화는 이미 알고 있던 결과도 달리 보인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갈색 빛깔 투명한 눈동자의 연장선이 내 얼굴 곳곳에 달라붙는다. 그 갑작스러움 때문인지, 마무리에 대한 욕심 때문인지 말이 꼬인다.


“음. 그… 너도 알다시피 말이지.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말이야… 개개인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저마다 자신만의 뼈대를 갖고 있어서… 그, 아 뭐지? 음…아~! 그래서 친할수록 그 뼈대에 가까운! 그 비슷한 관계가 형성이 되잖아? 그러니까 마무리 투수가, 아! 아니지 그…”


세 사람의 하나 된 표정에 어떤 문장이 떠오른다. '얘 왜 이러는 걸까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저, 영화감독이… 아, 아니 그, 손님들! 그들 개개인의 뼈대를 파악하면 음…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지는 뭐 그런… 그 뼈대를 파악하려면 일단… 그 사람을 알아야 하는데… 알려면… 개개인 모두를… 연구해야 하고 그러니까 아마 우리가… 그들을…"


"봉팔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녀가 정색하며 채찍질을 한다. 일부러 그런 걸까, 그 덕에 정신이 든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들을 먼저 알아보는 방법은 그들을 먼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먼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들 개개인을 외우는 것이다. 사실 뭔가 외운다는 것은 어렵고 거북스러운 면이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엔, 특히 봉순과 나에겐 다르다. 그건 우리가 늘 해오던 거니까.


손님이 떠난 봉다방은 늘 그녀와 나의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그곳에 발자국을 남기고 간 손님들, 그렇게 그 누군가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그들에게 나름의 캐릭터를 부여하게 됐다.


땀 아저씨(컵 미끄러질라), 귀걸이 미인(귀걸이 발명가에게 한 턱 쏠 것), 사자후 삼총사(목소리 큰 세 명의 여자), 독거 여인(늘 혼자 후미진 자리에서), 살인 커플(그들의 애정행각을 보았나), 부럽남과 사주 만세(또 오실 건가요.), 걸화보(걸어 다니는 화보), 치매 여인(카드 안 된다니까 왜 맨날 물어봐!), 도롱뇽과 여치(커플)라는 식이다. 가령 우리는 ‘부럽남’이라는 캐릭터를 꺼낸 뒤, 그와 그녀들이 했던 행동이나 분위기에 대해 얘기하며 그 심리를 추측해보고는 하였다.


단골 비망록은 우리의 수다를 좀 더 자주, 그리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나의 메모 본능에 의해  이곳저곳에 적혀있는 파편을 모아도 꽤나 많은 정보가 된다. 중요한 점은, ‘도롱뇽과 귀걸이 미인’과 같은 짬뽕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또는 그녀가 왔을 때 알아보면 되는 것이다. 이왕이면 좀 더 섬세하게.


“연습해보자. 당장.”


적극적인 여자, 행동파 봉순.


“그럼, 독거 여인으로 해볼까?”


독거 여인. 봉다방의 가장 오래된 손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는 봉다방 개업 3일 차쯤 묵직한 유리문을 열고 나타났다. 옅은 갈색의 얇은 머리카락, 그  한쪽 어깨에는 커다란 가죽 가방과 카메라를 메고, 반대쪽엔 손을 다 가릴 정도로 큰 다이어리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테안경 속에는 얇은 만두피처럼 투명한 피부와 날렵한 콧날, 무미건조해 보이는 눈이 숨어있다.


이따금 던지는 사소한 농담에도 보일 듯 말 듯 미소로 답할 뿐이다. 웃을 때는 옅게 보조개가 파이고는 하는데, 그 차갑고 고요한 분위기와는 상반된 느낌을 주었다. 어디엔가에서는, 혹 누군가와는 저 보조개 골 쏘옥 파일만큼 활짝 웃으며 대화할 것 같았다.


보통 봉다방이 오픈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나타나는 편이다. 앉은 지 십여 분 만에 자리를 뜨는가 하면, 때때로 구석 자리에  뿌리내리고는 몇 시간 동안이나 무언가를 끼적거린다. 침전되어 있는 분위기와는 달리 누군가와 언성 높이며 통화하기도 한다. 주로 주문하는 메뉴는 에스프레소 더블인데, 수화기 저편 누군가와 다툰 날에는 자몽 주스를 시켜서 한숨에 들이켰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와서 했던 말이 기억난다.


“금연인가 봐요.”


당시 내 말을 전해 들은 봉순은, 독거 여인이 항상 앉는 자리의 앞 쪽 벽에 ‘돈 많이 벌어 흡연석 만들겠습니다.’라는 쪽지를 붙였다. 며칠 뒤 독거 여인이 그 쪽지와 눈 마주치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도통 감정을 알 수 없는 여자다. 봉순아 네가 남긴 쪽지 봤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어. “그게 뭐”, 너도 같은 여자. 사실 그녀의 별명을 ‘봉순 유전자’라고 짓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럼, 독거 여인이 왔을 때 어떻게 대하면 되는데?”

“글쎄…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할 얘기가 있는데, 늘 비슷한 차림이라…”

“비슷하다고? 아니야. 늘 달라.”


그녀가 커피 잔을 입에 데려다가 멈추고 말했다.


“그럴 리가… 매번 비슷한 것 같았는데.”

“비슷한 톤의 옷을 즐겨 입을 뿐이지 모양은 조금씩 달라.”


잊을  뻔했다. 그녀의 눈썰미는 타짜 수준이다.


 “옷은 그렇고.”


타짜가 잔을 내려놓더니 약지 손가락으로 이마 선을 긁적이며 말을 잇는다.


“좀 더 확연하게 자주 바뀌는 게 있어.”

“그게 뭔데?”

“다이어리 커버.”

“다이어리 커버?”

“응. 재질부터 색상까지 자주 바뀌곤 해.”

“왜?”

“모르지.”


나의 반사적인 질문에 봉순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그렇지. 넌 눈은 타짜지만 생각은 봉순이지. 이 부분은 내가 생각할 부분이다. 굳이 같은 톤의 옷들을 여러 벌 사서 입을 정도라면 그녀가 변화에 민감하고  그만큼 자신의 스타일에 대한 고집 점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다이어리 커버는 항상 바뀐다. 그 재질과 색상을 마치 귀걸이나 향수 고르듯, 그날 혹은 그 주의 기분이나 컨디션에 따라 달리 선택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녀에게 다이어리는 —나 같은 수준의 눈썰미를 가진 사람은 알아챌 수 없을지라도— 중요한 포인트인 셈이다.


“여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변화를 알아챌 때 좋지?”

“그럴걸.”


봉순이 여자의 표정을 짓는다. 그녀도 여자다. 독거 여인도 여자다. 다이어리 커버를 통해 그녀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뭔가 순조로운 기분이 든다.


“그럼 전략회의는 이 정도로 끝.”


손 네 쌍이 서로 맞부딪치며 짝짝 소리를 낸다. 밤늦게까지 준비했던 전략들은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간혹 염치없는 무임승차가 있었지만 괜찮다. 왜냐하면 좀 전까지 입방정을 떨던 뿔테의 입이 잠잠하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있나. 쉽게 쉽게 머리 굴리다가 남이 피땀 흘려 만든 아이디어에 떡하니 숟가락이나 얹는 그가 경험 기반의 섬세한 대화에 낄 수 있을 리 없지. 바람 빠질 땐 요란스레 날아다니다가 어느새 바닥으로 툭 떨어진 풍선이랄까, 지금 저 입이 딱 그렇다. 마무리 투수가 봉순 이후의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셈이다. 묘한 희열감이 든다.


게다가 이제, 봉순과 둘만 일할 수 있다.




다음 날, 오픈 준비가 끝나자 여지없이 독거 여인이 나타났다. 봉순이 그녀의 정수리에서부터 그 발의 끄트머리까지 찰칵 소리가 날 것처럼 스캔한다. 그중 몇몇 유효한 정보를 나에게 전송했다. 전송된 정보 중 적합한 것들을 선별한다.


얘길 듣고 보니 정말 다이어리 커버가 바뀌어있다. 저번에 보았던 것은 짙은 카키색의 가죽 커버였는데 오늘은 오렌지색의 딱딱해 보이는 하드커버에 불규칙한 패턴의 무늬가 있다. 선별된 정보를 사람의 언어로, 그 언어 중에서도 꽤나 친절하고 신사적인 카페 직원의 언어로 순화한다. 최적의 타이밍을 노리며 목청 장전, 그리고 발사!


“어? 다이어리 바꾸셨네요. 커버가 바뀐 건가… 전에 쓰시던 카키색 커버도 예뻐서 사장님이랑 얘기했었거든요."


처음이다. 그녀가  돌아본 것은.

그 고요했던 표정이 깨진다. 보조개 골이 깊이 파인다.

친구가 되는 소리, 들린다.


“네. 고민 많이 하고 바꾸었는데… 전에 쓰던 것이 더 나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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