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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08. 2016

작은 죽음 앞에서

#34. 이럴 때는 타임머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


선택한 문장이 너무 상투적이었던 것일까. 그녀는 놀란 눈 반, 이상한 눈 반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네?”

“아, 잠시 앉아서 얘기를 좀…”


답답하다. 답답해!

그렇게 꺼낼 말이 없나? 쿠키 한두 개 들고 와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도 있는 거잖아! 무슨 연락처 받으려는 수작 같네. 뒤돌아 봉순을 본다. 그녀가 없다. 숨은 거야?


이럴 때는 타임머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 평소 잘 걸어가던 시간 녀석이 차츰 바닥에 납작 엎드리더니 포복을 시작하는 것이다. 머릿속에선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되지. 얼마 전까지 나는 넥타이를 동여매고 윤기 나는 개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상사의 눈치가 보이기는 하였지만 자랑스러운 경제 인구였다.


길쭉하니 품위 있던 넥타이는 어느 순간 나비가 되었다. 정장 바지 주위로는 앞치마가 둘러졌다. 상사의 눈치를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정쩡할 수는 없는 포즈로, 울고 있는 여자 손님을 앞에 두고 서있다. 그것도 연락처나 받아보려는 치 같은 표정으로 말이지. 왜, 어째서.


그렇게 영원할 것 같던 찰나는 흘러, 그녀의 입이 열렸다.


“왜요…?”


잘 대답해 봉팔.


“아, 그게…”


정리해. 정리해. 할 말을 정리해.


“그… 살인 커플이라고 아세요?”

“네?”


왜 하필 그 단어를 선택한 건지 모르겠다. 주방에서 개구락지마냥 빼꼼 나와 있던 봉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살인 커플, 우리만의 호칭이 튀어나와 버렸다. 벌떡 일어서더니 분주하게 주방을 정리하는 봉순의 실루엣이 보인다. 날 버린 것이다. 난 혼자다. 홀로 불을 끄려 하고 있다. 물론 꺼본 적 없다. 등 떠밀려 나왔고 손에는 물통이 들려있을 뿐이다. 통에서 묘한 냄새가 올라온다. 코끝을 울리는 휘발유의 냄새… 아무래도 통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그리고 날 등 떠민 나쁜 여자는 도피해 버렸다. 난 혼자다.


“살인… 뭐라고요?”


신기하게도 그녀의 눈물이 멈췄다. 난 휘발유통의 뚜껑을 연다.


“살인 커플이요. 그… 애인분이랑 오실 때마다 저희가 살인 커플이라고…”

“왜요?”


그녀가 조금은 빠른 타이밍에 질문을 잇는다.


“아, 그게…”


단어를 고르려다가 이내 포기한다. 고르기엔 뚜껑을 열었고, 잘 골라서 꺼내봐야 휘발유의 먼 친척 정도겠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직구를 택한다. 전진!


“꼴 보기 싫어서요. 하하하하!! 아, 아니… 죄송합니다.”

“아녜요. 계속 말씀해보세요.”


“아, 네. 두 분의 애정 행각은 제가 이곳에서 마주한 그 어떤 커플보다도 더 임팩트가 있었어요.” 약간 뜸 들인 후. “특히나 저 같은 만년 솔로남의 눈에는 가히 '살인적인’ 모습이자, 고문이었죠. 그래서… 살인 커플입니다.”


그녀가 웃는다.


“그래서 두 분이 오고 가면 저주도 퍼붓고,  재수 없다며 욕하기도 하고, 저쪽에 딴청 중이신 사장님과 함께 툴툴거리기도 하고…”


봉순이 자신의 거론을 느끼고 다시 개구락지의 행색을 취한다. 긴장감 고조되고 내가 가는 길 어딘지 모르나, 그냥 그렇게 잘난 입은 쉬지를 않는다.


“저 벽에 붙어있는 ‘연애 금지’라는 문구도 두 분을 향한 메시지였죠.”

“아…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애 금지’가 적혀있는 벽을 바라본다. 잠시 실소를 짓더니 무언가 연상되어 떠오른 듯 눈에 다시 물기가 차오르려 한다.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초점은 다시 나에게로.


“왜 그들이 미운 것인가! 왜 그들은 나의 고문자인가! 말이죠. 그 뿌리를 찾아 내려가다 보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단어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그게 뭔데요?”


그녀가 말 끝나기 무섭게 질문을 붙인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부러움이요.” 진심이다. “살인이라는 단어의 뿌리에는 부러움이 있었어요. 마치 나는 일부러 선택하지 않는 방식인 것처럼 자신을 속였지만 사실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던 건가 봐요. 내 눈앞의 호감 가는 여자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나 자신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솔직한 마음을 주고받던 두 분이 부러웠어요.”


“그, 그랬나요? 우린 잘 몰랐는데… 그럼 짝사랑 중이신 거예요?"

"에? 네?"


아,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눈앞의 여성분 말이에요. 왜 솔직하지 못하신 건지…”


뭔가 뒤바뀌는 것 같다. 최대한 무심하게 대답하자. 개구락지도 지켜보고 있어!


“아, 글쎄요. 겁이 나는 것이겠죠 뭐.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지… 거절당하지는 않을지… 뭐 그런 것들이.”

“그런 게 뭐 중요해요. 용기 가지세요. 고백도… 하세요.”


“그게 정말이지,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누구나가 힘들죠. 그래서 더 대단해요.”

“네?”


반격.


“남자친구분이요. 남자다움이라는 허울뿐인 체면 포기하고, 자신의 여자를 위해 언제 어디서나 솔직해질 수 있는 점.”

“아…”


그리고 습격.


“그런데 오늘은 어찌 홀로…”

“네. 그게…”


그녀가 띄엄띄엄 얘기를 꺼낸다. 시들어가던 꽃이 지난날의 회상으로 슬쩍 윤기를 띤다. 예상했던 대로 둘은 대학생 커플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학교 내에서도 유명하다고. 그렇게 그녀는 흡사 진부한 연애소설의 도입부 같은 연애스토리를 풀어놓았다.


입학과 동시에 첫눈에 반하여 사귀게 된 두 사람, 서로 자기가 먼저 반했다고 싸우면서 연애가 시작되었단다. (심하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흐른 요즘, 약 이주일 전부터 남자의 태도가 이상하다. 예전 같으면 1초만 떨어져도 사선을 넘나들던 그가, 갑자기 연락을 잘 받지도 만나주지도 않는 것. 이유 없이 화내기 일쑤 인가하면 매일 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는 늦은 새벽이 돼서야 전화 걸어 아무  말없이 있다가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전 그날 역시 새벽 전화벨이 울렸다. 반복되던 침묵은 깨졌다.


“우리 이제 각자의 길을 가자. 몸 건강히 잘 지내.”


이게 무슨 얘기지?

밑도 끝도 없는 남자의 태도 변화는 같은 남자인 나로서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보자. 사람의 변심이라는 것이 참, 하나의 단점이 두 개의 장점을 가리고, 그렇게 상대로부터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는 일인 듯싶다. 그러다 보면 장점과 단점을 구분할 수가 없게 되고 상대는 어느새 단점뿐인 사람이 되어 있겠지. 때문에 변심 중인 남자는 시간을 두고 전에 없던 짜증과 불평들을 드러내기 쉽다.


그런데 최근 이 남자에게서는 그런 변심의 태도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모습을 한시라도 놓칠까 보고 또 보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밤마다 술에 절어 전화한 것도 이상하다. 힘든 일이 있다면 애인에게 터놓고 의논할 것 같은 타입이다. 그럼에도 뭔가 말  못 할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겠지. 그런데 왜 자신의 피앙세를 그 일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떤 환경의 변화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20대 초반에 겪을 수 있는 일들이…


“아악, 앗!”


난 책상 모서리에 항문 어딘가를 찔린 치질환자마냥 짧은 비명을 반복해 버렸다.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 때문. 남자, 그것도 대한민국 남자들이 겪게 되는 역경 두 가지, 고래사냥!


그리고 군대.


“남자친구 분 군대 안 다녀왔죠.”

“네? 네.”


후… 그 쉐리, 확실히 낭만 가이다. 밥맛없는 놈!


“물론 틀릴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나는 조심스레 생각을 전한다. 여자 친구에게 ‘기다림의 2년’보다는 ‘이별의 짧은 고통’을 주고 싶은 참 어리석은 남자의 심경. 같은 남자가 봐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간혹 이런 비극의 주인공, 아니 비극의 띨띨이들이 있다. 만약 이 예상이 맞다면 그의 일상은 지옥과도 같을 것이다. 세상 온갖 고통 다 짊어진 것처럼 가슴 움켜쥐고 방바닥을 긁고 있겠지. 드라마가 따로 없다.


하지만 그에게 알려야 한다. 멋진 드라마도 주인공이 한 명이면 재미없다는 것을. 혼자 쓰는 드라마는 혼자만 울고 웃는다는 것을 말이다. 막상 군대 가면 주변 사람들 통해서 알게 될 텐데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무슨 상황인지 알게 되었다고, 문자 남겨 보시는 게 어떠세요?”


막연했던 심연에서 명확한 다음 행동이 정해지자, 그녀의 얼굴이 일출을 보는 듯 점차 밝아진다. 그러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만약 그것 때문이 아니면요…?”


그녀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집중되어있다. 좀 전에 흘러내려가던 눈물조차 멈춰 서서 바라보는 것 같다. 신중하자.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냥 두세요. 전화도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떠나려고  마음먹은 남자, 붙잡으면 오히려 잘 안 잡혀요.  돌아오려다가도 가버리죠. 가만히 두면 돌아올 놈은 돌아오는 것 같아요…"


난 연애경험 좀 있는 양, ‘돌아올 놈’이라는 연륜 느껴지는 단어를 택했다. 그녀는 정지된 오르골처럼 몇 분간 침묵을 지키더니 서둘러 가방을 들고 일어서서는 고맙다고 거듭 말한 뒤 봉다방을 떠나갔다.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다시 예전의 느낌이 묻어난다.


“오, 봉팔.”


짧고 작은 봉순의 환호성. 상대적인 고요함에 어색한 기분이 든다. 감미로운 재즈 음악만이 이곳저곳을 훑어지나갈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참 대단하다."

"그르게." 


무심한 그녀의 반응 뒤로 나의 후기가 더해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야. 단지 새로운 경우의 수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어. 꼭 다른 배터리로 갈아 끼운 것 같아."


“그나저나 몰랐네.”


딴청 부리던 봉순이 갑작스레 주제를 바꾼다.


"응?"


"좋아하는 여자 말이야. 맨날 여기 있느라 힘들겠다. 잘 보지도 못하고.”


“그거 너야.”


봉순이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리고 눈썹 끝을 미세하게 흔들며 작게 되뇐다.


“그래?”


정적 3초.


“푸하! 네가 이런 장난에 속을 때도 다 있네? 크풉크크!”


그녀가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린다. 작은 메모지에 오밀조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왠지 종전보다 느려진 듯한 펜. 그리고 굳이 덧붙일 필요 없는 말.


“진심이면  해고하려고 했지.”


농담은 가벼운데 펜은 더  무거워지는가 보다. 느릿느릿. 너도 당황할 때가 있네.






며칠 뒤 살인 커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왔다. 남자는 이곳에서의 대화를 알고 있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워했다. 그의 머리가 상당히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예감이 맞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애인에게 '나 군대가. 우리에게 2년이라는 공백이 생길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녀에게 매우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생각 속에서 군대는, 이별이 아닌 오히려 '행복한 기다림'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싱글벙글.

이전보다 더 끈끈하고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래도 오늘은 왠지 얄밉지가 않네. 두 사람은 평소 각종 커플짓을 일삼던 후미진 자리를 마다하고 주방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와서 앉는다. 남자가 일어서서 좀 더 다가오더니 슬쩍 말을 던진다.


"저기… 감사합니다."


에이 뭘요, 짧고 신사다운 대응. 하지만 이어지는 대참사.


"그리고… 형님도 용기 내세요! 두 분 정말 잘 어울립니다!"


화들짝 봉순.

화들짝 봉팔.

그대로 정지.


여자는 놀란 듯 그의 팔을 낚아챈다.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비밀이었어?'

'내 예감이란 말이야!'

'우리 자키 예감이면 다 맞는 거지잉~"

'몰라 그래도 말하면 어떻게 해~ 쟈키쟈키 바봉!'


니네 귓속말 다 들린다. (저것들을 다시 엮는 게 아닌데 말이야.) 살인 커플은 테이블로 돌아가서도 '다 들리는 속닥속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는 슬쩍슬쩍 우리의 반응을 관찰하는 눈치다. 저, 저, 저, 저런 저런 웬수 같은 인간들!


봉순을 보고 싶지만 딱딱하게 굳은 목은 움직이질 않는다. 신체 중 가장 빠른 녀석인 눈을 돌려 본다. 그녀도 나의 눈알 소리를 들은 것일까. '웬일이니'라는 작은 혼잣말과 함께 부동자세를 깨트리더니 커피를 만든다. 나 역시 눈썹과 어깨를 엇박자로 올렸다 내린 뒤 굳은 몸을 움직인다.


메뉴가 뭐였더라. 허니 브래드니까 접시가, 멈칫. 오븐에 이걸, 냉장고에서 버터를, 멈칫. 시럽 통이, 나이프랑 포크를, 앗! 멈칫. 동선이 엉킨다. 봉다방의 좁은 주방,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레 발생한 움직임의 규칙이 어긋나고 있다.


자꾸 같은 쪽으로 피한다. 멈칫과 함께 몸이 굳는다. 그리고 —뇌에도 전달되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의— 시선 교환을 한다. 황급히 다음 일을 한다. 분란한 움직임, 묘한 엉킴, 애매한 침묵. 그리고 그녀의 생각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지금 내 어색함이 드러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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