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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06. 2016

살인 커플

#33. 그들이 떠난 자리엔 긴 침묵만이


독거 여인과의 교감에 성공한 후 상당한 자신감을 얻었다.


그날 이후, 봉다방을 들어서는 손님들은 본의 아니게 연구 대상이 되었고 시간이 흐르며 그들에 대한 수다도 점차 면밀해졌다. 그렇게 오고 간 내용들이 봉팔의 정리 본능에 의해 비망록에 축적되었다. 참 많은 캐릭터가 그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단골 비망록은 봉다방의 핵심 무기인 <인간 노트>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비망록에 이름을 올린 이들, 그러니까 봉다방을 두 번 이상 방문한 손님에게는 그에 맞는 맞춤형 인사를 했다.


“어? 염색하셨나 보네요.”


봉순의 눈은 매의 눈.


“오늘은 나비 머리핀 안 하셨네요? 잘 어울리시던데.”


봉순의 눈은 매의 눈.


“엇! 못 보던 넥타이네요?”


봉순의 눈은 매의 눈.


“두 분 저번에 커플티 엄청 부러웠는데!”


봉순의 눈은 매의 눈.


“오늘 중요한 약속 있으신가 봐요? 화장이 평소보다 강렬하신 데요!”


봉순의 눈은 매의 눈… 인데 왜 말은 내가 다 하는 거야! 매는 입 없어? 너도 말해.


“오늘도 여자친구분이 계산하시네요.”


봉순이 마지못해 캔디보다 못한 석고 웃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 문장의 뉘앙스가 상당히 이상하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네. 얘는 백수거든요~ 거의 제가 내는 편이죠.”


딱 두 번째로 봉다방을 방문한 커플, 그 행색이 예나 지금이나 예사롭지 않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련하고 감각적으로 멋을 풍기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대충 던져놨다가 입은 듯 목 늘어난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다. 여자는 목소리나 행동에 생기가 넘친다. 남자는 자신의 여인을 흐뭇하게 바라보지만 어딘가 눈빛이 쓸쓸하고 두 어깨도 나사 빠진 듯 쳐져있다. 추측컨대 여자는 이미 오래전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남자는 그것이 중요한 시험인지 혹은 취업인지 몰라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고로 남자는 요즘 사막 모래바람처럼 흩날려버릴지 모르는 자존심을 움켜쥐며 지낼지도 모른다. 도시 향 물씬 풍기는 날개를 달고 자신을 떠날 듯 떠날 듯 맴도는 여인과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에이, 지금 나 돈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


남자는 미소라고 하기엔 애매한 것을 얼굴에 띄우며 농담인 양 대꾸한다. 하지만 그 머릿속에선 자신의 상황을 몰라주는 여친에 대한 서운함이 끓는점을 넘어섰을 것이다. 물론 여자는 이 작아진 남자의 작디작은 양은냄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리 없다.


“에이~ 무시하긴 뭘 무시해. 사실인데.”


게다가 이 여자, 봉순스럽다. 살면서 잘 보이지도 않던 봉순족들이 왜 이곳에선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손때 묻은 봉다방에 그들을 불러들이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


“맞아요. 저도 돈 없어요.”


그리고 원조 봉순의 일격이 이어졌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남자가 넋 놓고 바라본다. 그녀가 돈이 없는 것은 따지고 보면 사실이다. 그야말로 사실을 얘기했다. 하지만 저 남자의 시각에서는 다르다. 액세서리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꽤나 젊어 보이는 여사장이, 자기 소유의 카페 계산대에 서서는 ‘나는 돈이 없네.’ 푸념하고 있는 꼴이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만의 멋진 카페를 꿈꾼다. 이 여사장, 그 꿈 이뤄놓고는 “아쉬운 일 투성이야. 그런데 말이지. 너 같이 여자 친구 차 한 잔 못 사주는 백수는 정말이지…” 라며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아니 적어도, 이 남자에게는 그렇게 다가갈 확률이 높다. 카페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를 엿듣는 것처럼 느껴지고 누군가의 불규칙한 호흡이 비웃음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작을 알 수 없는 그 모든 사단의 원망은 자신의 처지를 신중하게 감싸주지 않은 애인에게 집결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얼굴 이곳저곳이 피멍드는 것 마냥 달아오른다.


“일단 가자.”


성큼성큼 나서는 남자, 물음표를 여럿 띄우며 뒤따르는 여자. 계단을 오르면서도 여자는 ‘왜 그러는데?’만을 반복한다. 남자는 말이 없다. 그저 계단을 두어 칸씩 빠르게 오를 뿐이다. 우리 사장님 역시 어깨를 한 번 더 으쓱이며 ‘왜 저래?’하고 묻는다. 봉순들 틈에서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색한 폼을 잡아야 했던 남자, 그 고독이 와 닿는다. 잠시 묵념.


아무래도 봉순에게 맞춤형 인사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도 팻말 하나, 멘트도 하나, 무표정은 덤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이런 서비스 센스를 쌓았을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그건 나의 몫이다. 그녀와 세상의 소통 수단은 나뿐인 셈이다. 눈이 매이면 뭘 하나? 뱀의 혀가 없는데. 그녀에겐 내가 필요하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날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그런 필요성 자체가, 아니 그런 선택이자 마음이 사랑은 아닐까. 사실 봉순도 깨닫지 못했을 뿐, 날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뭘 그렇게 실실 웃어? 테이블 정리해.”


그녀의 뾰족한 혀에 찔리고서야 내가 마귀 할배같은 음흉한 낯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독심술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매우 잘 다루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 생각만큼은 정확하게 읽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내가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눈에 가시 같던 훼방꾼이 없어서인지, 그녀와 나의 호흡은 착착 맞아갔다. 매의 눈을 가진 뱀이던 혹은 뱀의 혀를 놀리는 매이던 그것은 대단한 조합이었다. 나는 그녀의 몇몇 단어만으로도 손님들에게 건네야 할 최적의 말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간간이 ‘반가운 얼굴’에 달하는 손님이라도 나타나면 굳이 그녀의 도움 없이도 혀가 춤을 췄다.


손님 대부분은 자신을 알아볼 때 놀라는 눈치였다. 사람 잘못 본 게 아니냐는 듯 눈만 껌뻑이며 저요? 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후속타가 날아들면 이내 그 메시지의 당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부터는 반응이 제각각이다. 홀로 오는 손님의 십중팔구는 ‘아, 네.’하며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가장 좋은 반응은 약 3인조 이상 규모의 여성그룹에서 나온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오빠 센스 짱이다!”


매의 눈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만 그냥 ‘센스 짱’을 택한다.


남성으로 이루어진 그룹은… 일단 그런 그룹은 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에서 두 명 이상의 남성이 이렇게나 아기자기한 카페에 앉아 있는 그림은 익숙하지 않다. 이따금 그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 그려지기는 하는데, 우리의 맞춤형 인사에 대한 반응이 참 오묘하다. 무언가를 들킨 듯 놀라는 눈초리 그리고 경계. (당신들은 잘못한 게 없어!) 사장님, 남성그룹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해요.


물론 봉다방 손님의 대부분은 커플이다. 그런데 커플 내에서도 또 남성의 반응이 재미있다. 맞춤형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여지없이 이런 말이 들려온다.


“너 여기 자주 왔어?”


아마도 그 반응은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본능에서 오는 게 아닐까. 그녀의 일부분을 익숙하게 묘사하는 미남 직원에게 경계 태세를 취하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화살 역시 ―봉순의 말에서 시작된 분노를 애인에게 뿜었던 백수 남자처럼― 자신의 애인에게 가버리고는 한다. 뜬금없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앉아서는 여친의 말에 썩어가는 미소로만 응대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서비스 차원에서 손님들을 기억한다며 해명해보지만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찝찝함이 묻어난다. 어쩌면 대한민국 남자 대부분이 이런 인지의 오류를 갖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해한다. 나도 갖고 있다, 그 오류.


그렇게 몇몇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봉다방은 개개인에 맞는 안정된 인사 시스템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지부조화 같은 어려운 접근 따위를 비롯한 여느 때보다도 심리학적 접근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단골 비망록도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이 붙었다.


재밌는 점은, 손님 저마다 각자의 개성이 있지만 방문이 거듭될 때마다 공통된 인사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 느낌이랄까. 예를 들어 어떤 커플이던 통용 가능한 인사를 만들 수 있었다. 백화점 점원의 '애인 분 피부 톤이 워낙 좋으셔서 그 옷이 정말 잘 어울려요!'역시 이와 같은 통용문이다.


하지만 모든 커플들이 보편성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살인 커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키자키~”

(해석: 자기야 있잖아.)


“움? 움~? 자키 왜 불려~?”

(해석: 왜 불러.)


“요기요기~ 나 요기 크림 무더쪄염~”

(해석: 알고 보니 내 턱에 크림이 묻었네.)


“아! 아! 야이! 나쁜 크림! 우리 쟈키의 고운 얼굴에서 떨어져 버렷!”

(해석: 내가 떼어줄까.)


“흐으음~ 휴지가 너무 까칠거려염~ 아야~ 아포~”

(해석: 휴지 치워.)


“아~ 이런 오빠가 우리 쟈키 맘도 몰랐네. 뽀뽀~”

(해석: 손으로 닦으면 묻으니 아쉬운 대로 입으로 닦아주련다.)


“아~ 아휴~ 부끄려워염~! 요기는 사람도 많운데~”

(해석: 이곳은 사람이 많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잠시 참아보자.)


긴말할 필요 없이 이런 식이다.


두 남녀는 그렇게 ‘살인적인’ 행각들을 봉다방 이곳저곳에 흘려 놓은 뒤 유유히 떠나간다. 그들이 떠난 봉다방에는 긴 침묵만이 이어진다. 오랜 솔로 생활로 인한 ‘안티 커플’이 첫 번째 이유. 소심한 봉팔과 무심한 봉순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그들의 대담한 행각에 놀란 가슴이, 첫 번째보다 강한 두 번째 이유였다. 봉순의 표현에 따르면 샴쌍둥이인 그들은, 그렇게 단골 비망록 속에서도 블랙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죽고 못 살던 한쪽은 온데간데없고 여인 홀로 봉다방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놀란 나는 ‘어서 오세요.’라며 상투적인 인사밖에는 할 수 없었다. 봉순 역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메리카노, 주세요.”


창백한 얼굴, 꺼칠한 피부, 갈라진 입술. 누가 봐도 그녀의 상황이 짐작될 정도이다. 퉁퉁 부은 눈은 지난밤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녀는 ―지난밤의 넘쳐흘렀던 눈물이 부족한 듯― 자리에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다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실연.

한 시인이 ‘작은 죽음’이라 표현했던 그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한 향과 윤기 넘쳐흐르던 꽃은,

그 수분 버썩 사라진 채 남은 것을 끌어 모아 울고 있었다.


봉순이 얇은 눈꺼풀 뒤의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다가 속삭인다.


‘가서 뭐라고 말 좀 해봐!’


내가 왜? 여자인 네가 가야지.


‘난 연애해본 적 없어서 몰라! 그리고 넌 심리학자잖아!’


아니, 그건 너나 나나…


‘아, 빨리 가! 커피 나왔어.’


뭔가 잘못됐다.


이런 경우엔 같은 여성이 다가가 자신의 옛 경험을 훈훈하게 나열한 뒤, 다 안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진정시키는 게 보통인데. (왜 여기는 보통이 없는 걸까.) 내가 왜, 그것도 ‘여자’와 ‘엄마’를 동의어로 알며 살아온 내가, 검디검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 걸음 전.

투명한 벽, 슬픔으로 가득 찬 그녀만의 벽.


두 걸음 전.

차가운 새벽이슬이 피부에 와 터지는 것 같다. 그녀의 차디찬 영역으로 들어선다.


한 걸음.

그 중력이 느껴진다. 발이 무겁다. 행동이 느려진다. 느린 손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린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눈물.

대답은 눈물뿐. 그냥 돌아서기엔 너무 춥고 무거운 공간에 들어와 버렸다. 울고 있는 그녀, 가만히 서있는 나. 고개를 돌려 공간밖에 있는 봉순을 본다. 걱정하는 눈빛. 살짝 찌푸려진 미간, 이 와중에도 그녀의 귀여운 표정에 눈이 고정된다. 뭐랄까, 내가 뭔가를 해주기 바랄 때만 저런 표정이 나온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다르다. 봉순의 눈에서 이 여인의 슬픔이 스친다. 이 공간에서 바라본 봉순의 눈은 마치, 이 슬픔을 멈춰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계속 그렇게 남겨두면 무너져버릴 것만 같다. 이곳의 아련함이 주는 착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눈을 외면할 수가 없다. 봉순을 위해서라도, 이 여인을 진정시켜야 한다.


나는 무거운 입을 뗀다.


“저기, 괜찮으시면… 잠시 앉아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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