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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09. 2016

위기의 서막

#35. 특급 슈퍼맨의 슈퍼 특급 능력


그녀와의 시간은 행복했다. 하루 걸러 바뀌는 향수 냄새까지, 그 모든 순간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이따금 사정 때문에 뿔테나 마로와 팀을 이루기도 했지만 봉다방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은 그녀와 함께였다.


마치 둘 뿐이던 수개월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이전과 같은 장면, 남녀도 그대로, 그런데 남자의 심경이 바뀌어 있다. 그 속이 전에 없던 꿍꿍이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불안감 같은 것들도 생겼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없어서인지 혹은 질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뿔테가 우리의 공간에 고개를 내밀더니 그 시간들을 잠식해나갔고  그만큼 내 불안은 커져갔다.






때 아닌 늦가을, 밤새 하늘이 깨진 것 같은 폭우가 내린 날이었다. 기상 뉴스에서는 호우주의보를 발표한 지 3시간 만에 호우경보를 발령했다. 그렇게 며칠간이나 묵직한 빗방울 떼가 지면을 때렸다. 이곳저곳 침수 피해가 일어났다. 지방에선 하천제방이 무너져 온 마을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봉다방도 이 시끌벅적한 하늘의 투정을 피할 수는 없었다.


출근하자 이곳저곳 양동이를 놓는 봉순의 모습이 보였고 천장 몇 군데가 물방울을 모아서 하나 둘 뱉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오픈 준비를 하기 전에 음악부터 튼다.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말이다. 그만큼 음악을 트는 것은 봉다방의 하루에서 그녀가 가장  우선순위로 여기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음악소리 대신 물방울 소리만이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불도 다 켜지 않은 상태였고 바닥은 물로 흥건했다. 참으로 고요했다. 예전 그녀의 지하실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물방울이 천장을 뚫고 일직선으로 낙하하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엔 낙담 같은 것이 있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쩌면 좋지, 이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있나 뭐. 그런데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산을 넘어야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를 한 번 보더니 자신의 생각을 숨기려는 듯 눈썹과 어깨를 올렸다가 내렸다. 시선은 다시 물방울들에게 옮겨졌다.


난 비가 새는 곳이 또 있는지 알아본 후 천장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닦아 봐야 소용없지."


그녀가 내 행동의 무의미함을 알리며 마대걸레를 집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뭐라도 하고 싶었다.


"아, 응. 그럼 건물주한테 얘기해보고 올게."

"해봤어."


그녀가 걸레로 바닥의 물기를 흡수하며 말했다.


"건물이  오래돼서 어쩔 수 없다네."


하기야 불필요한 돈 들여 건물을 손봐줄 리 만무하지. 이런 문제로 소송이 오가는 경우도 종종 봤다. 보통은 소모전으로 치닫다가 건물주가 수리에 필요한 일정 비용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소송을 벌였던 세입자가 머지않아 그 건물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을의 당연한 설움이기도 하다. 공사비용을 사비로  진행하던가 새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현실, 봉순과 그 현실을 암묵적으로 공유했다.


"내가 할게."


그녀의 마대걸레를 뺏어서 좀 더 큰 동작으로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걸레는 이미 너무 많은 물을 흡수한 상태였고 오히려 물을 뱉어내는 것 같다. 살짝 들어 올린 후 화장실로 가려는데 봉순이 주방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테리 바빠요?"


모퉁이를 돌아 나가며 그 익숙하고 불쾌한 단어를 들었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들며 귀가 쫑긋 섰다.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아 정말?"


- 하이(はい)! 안 그래도 비가 너무 와서 가보던 참이지!


고요해서인지 핸드폰 속의 그놈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 다 왔어. 앞이야!


봉다방 문이 열렸고 놀란 마음에 봉순 쪽으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어중간한 속도로 계단을 올랐다. 뿔테는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인사는 정중하게 했다. 그 급박한 두 발의 상체에서 뜬금없이 정중함이 나오니까 왠지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봉순! 걱정하지 마."


뿔테가 봉순의 어깨 혹은 등 어딘가를 토닥이는 소리를 들으며 화장실을 향했다.


걸레를 짜서 돌아왔을 때, 이미 뿔테는 양손에 고무장갑을 낀 채 손걸레로 바닥의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걸레가 흥건해지면 양동이에 주욱 짜내고는 다시 빠르게 물기를 닦아냈다. 난 갑작스레 실직당한 마대걸레를 잡고 선 채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봤다. 양동이에 물이 가득 차자 번쩍 들더니 빠른 걸음으로 봉다방 계단을 올랐다. 나에게 부탁할 만도 한데, 그렇게 봉다방을 나가서는 빈 양동이를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시 신속하게 바닥의 물기를 닦아냈고, 어느새 대부분의 물기가 제거되었다.


바닥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뿔테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지점에 의자를 놓았다. 그리고 물방울이 모이는 천장을 걸레로 꾹꾹 누르며 물기를 머금었다. 내가 할 때는 소용없다며 타박했던 봉순은 그 장면을 본 건지 못 본 건지 아무 말없이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봉순. 오늘은 봉다방 닫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가…?"

"아무래도, 이렇게 비새는 모습이 보기 좋진 않으니까 말이지."


뿔테가 좀 더 높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천장 모서리 틈새를 골똘히 보며 말했다.


"태리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 비가 너무 와서 사실 손님이 많이 오지도 않을 거야."


난 이 중대 사안이 둘만의 대화로 결정되는 것을 원치 않아 쫓기듯 말을 더했다. 그때쯤 내가 마대걸레 자루를 왼손 오른손 옮겨 잡으며 무의미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벽 모서리에 기대어 놓았다. 봉순은 수 초간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 말대로 봉다방을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럼 메뉴 개발이나 해야겠다."

"좋아! 그럼 나는 이 처참한 수해현장을 복구하겠어!"


봉순이 혼잣말을 하자 뿔테가 기다렸다는 듯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는 둘 다 서로의 일의 집중했다. 나는 마대걸레로 이미 뿔테가 정리해 놓은 바닥을 한 번 더 닦았다.






오후가 되면서 맹렬히 퍼붓던 비도 거짓말처럼 그쳤다. 뿔테는 산책이 허락된 멍멍이 마냥 건물 안팎을 바삐 다니며 비가 샜던 지점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러더니 왜 비가 새는지 알겠다고 쾌재를 불렀다. 건물 우측 벽과 지면 사이의 시멘트에 세월이 흐르면서 틈이 생겼고 많은 비가  그쪽으로 모여들어 봉다방까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맘때부터인 것 같다.

봉다방 생활에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더 크고, 더 아릿한 위기가 찾아왔다.


대홍수가 지난 며칠 후, 뿔테가 이른 아침부터 해머를 들고 나타나서는 건물 옆의 지면을 모조리 깨뜨렸다. 단단해 보이던 시멘들은 괭이질 몇 방에 빵가루처럼 으스러졌다. 그는 셔츠의 어깨 부분을 당겨 이마선의 땀을 닦은 후, 삽으로 빵가루들을 걷어냈다. 격한 움직임 때문인지 그 팔에 붙어 있는 근육 덩이들이 유난히 웅장해 보였다.


그는 새로  사 온 시멘트를 모래가루와 섞어 걸쭉한 반죽을 만들고는 능숙하게 빈틈을 메웠다. 도와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비교되고 싶지 않았다. 봉순이 그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오픈 준비에만 신경 썼다. 그게 더 중요한 일인 양 집중하는 척했다.


봉순은 오픈 준비가 끝날 때까지 내 쪽은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녀가 서 있는 근처에 화분을 놓을 때 조금 큰 소리로 놓았다. 그러나 인광은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특급 슈퍼맨의 슈퍼 특급 능력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뿔테는 마치 무언의 봉인이라도 풀린 듯 굳이 자신의 근무 날이 아닌데도 수시로 출몰하며 봉다방 이곳저곳을 수선했다. 봉순의 수선이 갈라진 나무 책장 모서리에 얇은 나무를 덧대는 아기자기 영역이라면, 뿔테의 수선은 좀 더 남성적인 영역이었다. 봉다방의 노란색 유리문에 들어서기 전에는 건물의 계단을 네다섯 칸 올라야 한다. 얼마 전 그 계단이 봉다방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며 나무 계단으로 바꾸었다.


봉다방 또한 뿔테의 손길을 원했던 것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터뜨렸다. 누전으로 인해 램프가 터지는가 하면, 싱크대가 막히기도 했고, 어떤 날은 냉동고가 운명하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뿔테는 어디에선가 하얀 건치미소를 드러내며 나타나서는, "카페 하다 보면 뭐..." 땀 한 번 닦고, "이런 일 많지." 안경 한 번 올리고 "특히  일본에서는."이라고 말하며 사태를 해결했다.


그때마다 난 그야말로 손가락을 빨아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니, 그 자식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봉다방의 사고는 곧 나에게도 위기가 되었다. 난 점점 더 경직되었다. 마치 밤하늘에 박쥐 불빛을 보며 배트맨이나 나타나길 기다리는 '시민 1'처럼, 봉다방의 사소한 기침 하나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 괴로운 점은, 허락 없이 자신의 것에 손대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는 봉순인데 뿔테만은 예외인 듯 그의 행동들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뿔테의 집중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게다가 가끔은 '하는 김에…'라며 좀 더 요청을 하기도 했다.


더더더 괴로운 건, 뿔테의 빈번한 출몰로 인해 봉순과의 깊은 대화, 그러니까 조금은 애매하고 끈끈한 긴장감이 맴도는 그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눈에 띄게 줄어버렸다는 점이다.


믿었던 마로도  한몫 거들었다. 손님인 척 와서는 앉아서 뭔가 멍하니 생각하다가는 갑자기 스륵 주방으로 오더니 드립 커피 한 잔 토스트 한 덩이를 챙긴 후 다시 손님 모드로 돌아가고는 했다. 마로는 봉다방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림만 그렸다. 예전 손님으로 오던 그때의 마로 그대로였다. 완성된 그림이 맘에 들면 봉다방 어딘가에 붙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인이 봉다방에 오면 묵묵히 얘기를 들어주었다.


어느 날은 꼭 졸고 있는 것 같은 뒷모습으로 앉아 있어서, 볕 쬐는 고양이 모습을 기대하며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마로는 봉다방 테이블에 놓기엔 좀 커 보이는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꽤나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이 맘에 안 드는 건지 아니면 내가 봐서는 안 되는 그림인지 모르나, 평소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뭐 그렸는데?”

“미완성 그림.”


미완성 그림은 완성하지 않기 위해 그렸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미완성 자체를 표현했다는 것일까. 어렵다. 그런데 사실은 그녀에게 다가갈 때 그 미완성 그림 일부를 어깨너머로 보았다. 앉아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고 남자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검고 길쭉한 뭔가가 걸쳐있었다. 아마도 그건 안경이겠지.


그렇게 뿔테와 마로의 출몰 시간이 빈번해지면서 내가 설자리도 눈에 띄게 줄어갔다. 그 알 수 없는 고독과 위기감이 커져가던 어느 날, 뿔테도 마로도 웬일인지 안 보이던 어느 날 밤. 마감 정리를 하던 봉순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 낱말 하나하나가 강렬하게 귓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끝나고 회 먹을까?”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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