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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0. 2016

버스의 옆문

#36. 옆문에도 앞뒤가 있다.


몇 번이고 이런 자리가 있었다.


그녀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광어회를 시키고 회색빛의 플라스틱 컵에 물을 따르고 그녀 앞에 수저와 젓가락을 놓은 뒤 내 앞에도 놓는다. 술부터 주세요, 주문을 더한다. 졸릴 때 나오는 하품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 하품이 쉬이 나오질 않는다.


벌써 몇 분째 핸드폰 속 인터넷 기사만 보고 있다. 어째서 평소에 관심도 없던 10대 가수들의 스캔들 소식을 몇 번씩 다시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끌벅적했던 횟집도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하다. 게다가 봉순도 어색하다. 봉다방만큼 익숙한 이곳을 괜스레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고 있다. 다 외웠기에 벽지 그 이상의 이하의 의미도 없는 메뉴판을 응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필시 어색함의 공기이다. 어색하지 않으려는 어색함이 어색한 공기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컵에 물을 따른다거나 수저를 놓는 사람은 없다.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알려줄까?"


결국 침묵에 더 취약한 사람이 말문을 연다.


"뭔데?"


그녀가 ‘두리번’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태리님 말이지."


히죽히죽. 이 얼마나 신명 나는 소재인가.


"성이 이씨인 거 알아?"

"응."


"이태리!"


이렇게 고급스러운 이름 또 없다.


"뭐 그렇지."


뭐지, 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그럼 요건 어때.


"음, 그럼 본명이 대리인 것도 알아?"


난 카카카 웃었다.


"어저께 우연히 신분증을 봤는데, 따악! 이대리 이렇게 적혀있는 거야!"


그렇게 웃으며 이대리래 대리운전 이대리 외쳤다.


"알아."


봉순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흩날리는 웃음소리를 끊으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웃지 좀 마."


"어, 그래…."


순간 밀가루 덩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희뿌옇게 변하더니 가슴 한구석이 저렸다. 박장대소 기대한 건 아니지만 실소 정도는 보여도 되는 게 아닌가. 얘기한 사람의 성의도 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뿔테를, 아니 다른 남자를 내 앞에서 감싸야만 하는 건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물러설 수가 없다.


"근데 너 있지. 태리님을 참 많이 아끼는 것 같단 말이지. 혹시~"

"너만 할까."


나름 능구렁이 전법으로 그 마음 떠보려는데 그녀가 먼저 한 수 지른다. 그런데 그 단어가 참 또 애매하다. 무슨 말일까. 내가 더 뿔테를 아낀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를 더 아낀다는 말인가.


"그냥" 혼란스러워하는 표정 때문인지 그녀가 부연 설명을 한다. "뒷말하고 그러는 거 별로야."


그래, 그 얘긴 알겠어.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데 말하는 게 죽기보다 싫을 정도로 뿔테를 아낀다는 거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내가 무슨 가루가 되도록 씹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딱 자를 필요까지 있을까.


“아, 물론 그건 그렇지~ 나쁜 의도가 있던 건 아닌데.”


그렇다고 좋은 의도로 말한 것도 아니다. 좋은 마음이 없는데 어찌 좋은 의도가 나오겠어. 그리고 말에 앞말 뒷말이 어디 있어. 버스에 앞문 뒷문이 어딨냐고, 다 같은 옆문이지! 운전석과의 거리가 중요한 거잖아. 지금 이 관계에서 그 사람을 안주상에 올릴 수 있는가의 문제잖아. 그 관계의 거리만 있는 거잖아!


궁금해. 우리 사이에서 얘기가 허락되지 않을 만큼 그 자식이 가깝다는 거야.

아니면, 너의 애매한 대답을 믿고 기대하고 착각해도 좋은 거야.


"왔어?"


이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 표정, 최근 유난히 자주 봤던 익숙한 표정이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이 소리도 익숙하다.


"오우! 봉다방 회! 식!"


지금 이 순간,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 중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설령 지금 내 방귀소리를 들었다 치자. 횟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유를 꿈꾸며 숨죽이고 있던 그 녀석이, 긴장의 틈 비집고 나와서는 눈치 없이 우레와 같은 비명을 지른 거지. 그 어디 비명뿐인가, 큰 소리 끝 정적 메우는 가공할 만한 향기가 이 좁은 공간을 뒤덮을 테고, 사무라이 아저씨의 칼끝도 무뎌질 테고 그렇게 광어회의 식감도 맛도 없어질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봉순의 달궈진 눈동자가 이쪽을 향할 것이다.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럼에도 지금 들었던 이 소리보다는 덜 싫을 것 같다. 굵직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이 높은 톤의 목소리.


"같이 온 거예요?"

"아니, 앞에서 만났어."


뻣뻣해지는 목을 돌려 보니 뿔테와 마로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 거였다. 아롱아롱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평소 다하지 못했던 표현을 넘나들다가 그렇게 서로에게 다가서는 자리가 아니었던 거다. 봉순아, 이제 정말 내가 안 보이는 거야?


실망감 감추며 웃으려는데 마로가 앉기 무섭게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언젠가 한두 살 먹은 아이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다. 사람 좋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아이는 따라 웃지 않았다. 골똘히 바라보는 그 눈빛은 마치 내 얼굴 뒤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웃음 니꺼 아니잖아. 너 지금 웃을 기분 아니잖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저 눈빛이 그렇다. 왜 너까지 그러는데... 나 지금 충분히 아슬아슬해. 좀 참아줘.


뿔테가 능숙하게 휴지를 놓은 후 그 위에 젓가락을 놓는다. 봉순은 젓가락 아래에 휴지 까는 것을 싫어한다. 음식물로 인해 젓가락 끝에 점성이 생기면, 그 휴지에 머물던 미세먼지가 젓가락에 달라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다. 뿔테의 서비스를, 그 우아한 손짓을 보고만 있을 뿐이다.


마로도 내 슬픔이 평소보다 구구절절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시선을 거두고 컵에 물을 따랐다. 봉다방에 새 식구가 생긴 후 맞이하는 대망의 첫 회식은, 그렇게 실망스럽게 시작되었다.






기다리던 회가 나왔다. 아껴아껴 먹어도 촘촘하게 빛났던 회 장판엔 듬성듬성 구멍이 생긴다. 한 점에 한 잔 오가는 두 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씹고 있는 이 녀석이 마지막 한 점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회님을 받들고 있던 천사채가 티 없이 완연한 모습을 나타내면, 바삐 오가던 젓가락은 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엄지 검지가 서둘러 새우 잡이를 시작한다.


"워우 봉순! 그렇게 까면 안 되지~."


뿔테가 봉순의 새우를 낚아챘다. 그게 무엇이던 자기 것을 빼앗기면 이목구비로 불을 뿜으며 다시 앗아가는 봉순인데, 어쩐 일인지 당황한 표정만 잠시 스치더니 가만히 뿔테를 바라본다. 저, 저 표정, 꼭 그를 볼 때만 나온다. 지들끼리 뭔가 대단한 과거라도 숨기고는 아무도 모르게 그 시절의 향수를 나누는 것 같은 눈빛. 싫다 정말.


"머리 부분을 살살 돌리듯 빼고."


뿔테가 새우를 조심조심 발라서는 봉순의 입가에 들이대다가 아 맞다! 하고는 접시에  놓아준다.


"이제 숙녀인데 입에 바로 주는 건 좀 아니지? 그쵸 봉팔님! 하하하!"


그가 크게 웃는다. 그런데 난 보았다. 벗겨진 새우가 입가로 다가오자 슬쩍 벌어지려 했던 그녀의 입술을, 그리고 그 새우가 접시를 향하자 당황한 듯 혹은 아쉬운 듯 올라가던 미간을.


이제 숙녀라니, 이제 숙녀라니. 도대체 언제부터 알았길래 이제 숙녀인데!? 그리고 숙녀인지 아닌지 봤어? 이제 숙녀면 작년까지는 숙녀 아니었나? 어떻게 구분하는 건데? 그 기준이 뭔데? 왜 그걸 니가 정하는데? 니가 뭔데.


"봉팔, 너무 달리는데?"


한 잔 털어 넣자 그녀가 제동을 건다. 방금 수줍게 올라갔던 미간은 제자리로 돌아와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양새 참 심각하다. 대하는 게 어쩜 이리도 다를까. 저 작은 미간조차도.


"아, 오늘은 좀 달리고 싶…."

"맛있어!"


고독한 사내의 감성 토해내려는데 새우를 입에 넣은 봉순이 감탄사로 그 감성을 토막 낸다.


"이럴 때 그 뭐지?"

"뭐? 뭐?"

"아니 그 놀랍다, 굉장하다 그런  뜻있잖아요. 스..."

"아! 그건 스고이(すごい)!"

"맞아, 맞아. 스고오이!"


둘이 마주 보며 까르르 웃는다. 술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 봉순의 얼굴에서 그야말로 웃음의 꽃이 핀다. 그들이 웃을수록 나는 웃음을 잃는다. 그러다가 다시  힘주어 웃음을 만든다. 마로가 본다. 마로의 눈을 피해 그녀를 본다. 좋다. 좋은데 웃음은 더 빠르게 사라진다. 힘을 더 준다. 마로가 본다. 그 눈 피해 그녀를 본다. 그 모습에 한잔 털어 넣는다. 마시면 마실수록 웃는 얼굴은 쉬워진다. 아릿한 마음 진해진다.


"2차 갈 수 있을까?"

"왜요?"

"봉팔님 좀 취하신 것 같은데~"


그들이 날 바라본다. 하나 된 저 표정도 싫다.


"에~ 아니죠. 저 이제 시작이죠."

"오오! 역시 봉팔님. 듣던 대로 주당!"


듣긴 뭘 들어. 이제 안 속는다.


“2차는 봉다방에서?”


안 돼 인마. 봉순이가 싫어해.


“날이 날이니 만큼-”


봉순이 짐을 들고 일어선다. 뭐야. 왜 저 자식은 안 되는 게 없냐. 일어나며 한잔 더 털어 넣는다.






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앉아 있다. 앞엔 큰 고양이가 작은 고양이를 안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뒤로는 그녀와 그놈이 요리하는 모습이 보인다. 기름이 무언가를 튀기는 소리, 몇 마디의 목소리, 옷깃의 부딪침, 뭐 그런 그들만의 소리들… 아무리 취했어도 알 수 있다.


그 소리가, 참으로 달다.


“으퓨...”


한숨 소리에 큰 고양이가 눈을 좀 더 크게 뜬다.


“마로야.”


고양이도 술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네.


“넌 요리 안 해?”

“앉으래요.”


“아, 그러면…” 술잔이 보인다. 아 아니다, 에스프레소 잔이네. 모르겠고 원샷. “그러면 연애는 안 해?”


큰 고양이가,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로, 작은 고양이 머리를, 빠르게 쓰다듬는다. 뭐 그게 그렇게 오래 생각할 일이야?


“넌 누구 좋아해 본 적 있어?”


쓰다듬는 손이 더 빨라진다. 평소보다 빠른 혹은 거친 손길 때문인지 작은 고양이가 그 품에서 벗어난다.


“좋아해 본 적 없어?”

“있어요.”

“오… 있어? 누구… 지금도 좋아해?”


마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헤하하… 왠지~ 누군지 알 것 같네….”

“몰라요.”


모를 거라는 얘기지?


“에이~ 알아 다 알아~ 그런데 모른 척해줄게. 그 사람  얘기하고 싶지 않거든….”


마로가 두 손으로 잔을 들더니 반쯤 술을 넘기고 내려놓는다.


“그럼 너도 잘 알겠네.”


술잔 응시하던 고양이 눈이 나를 향한다. 그 눈에 물음표가 있다.


“내 기분이 지금 어떤지 말이야.”


“이 달달한 소리 말이야… 너무 화가 나.”

“말해봐. 알 것 같아…?”


눈이 감긴다.


"버스 말이야… 옆문인데도 분명 앞뒤가 있어."


"저기는 앞이고…"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는…."


캔디, 너도 여기 구나. 인마 너도 끝났어 이제.


"여기는 뒤."


이름은 저놈이 대린데, 현실은 우리가 대리였던 거야.


"마로야."


“나 계속 이렇게 되는 거겠지…?”


“니 생각은 어때.”


마로는 말없이 나를 바라봐주었다. 그 표정이 조금은 아련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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