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Feb 12. 2016

방향 정해진 함선

#37. 필요한 역할의 범위


눈 떠 보니 그녀의 방이었다.


때마침 그녀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숙취를 걱정해줬다. 씻고 아침을 먹자고 했다. 그렇게 내가 씻는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우린 함께 잠이 들었던 걸까?


해장국 집에 갔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은 수수했고 그 눈매에는 소녀가 있었다. 반들하니 빛나는 얼굴 보고 있자니 만져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내 눈빛을 마주하며 웃어주었다.


함께 봉다방 문을 열었다.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달콤한 맛이 났던 것 같다. 그녀가 잔을 들어 향을 맡아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작은 테이블을 지나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품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품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꿈이었기 때문일까. 경험하고 있는 순간인데도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미간을 살짝 구긴 채 부끄러운 듯 응시하던 그 눈빛을 잊고 싶지 않았다. 시린 눈 치켜뜨며 봄 햇살 같은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 했다. 그럴수록 현실의 온도가 목을 감쌌다. 깨어난 곳은 봉다방이었다.


예전처럼 캔디를 안고 있지는 않았다. 테이블 아래에서 그 기둥에 몸을 감고 있을 뿐이다. 주방 쪽에선 식기들을 정리하는 소리, 문 쪽에선 분주한 발소리가 들렸다. 오픈을 준비하는 중인 것 같다. 그 남자다운 발소리가 캔디를 안고 깨어났던 아침보다 더 싫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기둥에 말려있던 몸이 굳어버려서가 아니다. 두 번이나 이곳에서 깨어났다는 충격 때문도 아니고 뱃속 가득 이죽거리는 숙취 때문도 아니다. 창피해서도 아니다.


몇 초전까지 현실이라 믿었던 순간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실재 같던 순간들이, 그저 머릿속 기억의 편린들이 얽히며 만든 상(像)에 불과했다니. 무엇보다 테이블 밖에서 기다리는 현실이 그 꿈같던 장면과는 꽤나 상반될 거라는 예감에 그렇게 몸을 더 구부렸다.


"야! 봉팔! 빨리 안 일어나!?"


현실의 소리가 다그친다.


"봉순~ 아직 오픈 안 끝났잖아. 좀 더 이따가 깨워도 될 듯해."


그놈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정말이지 니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까 그러죠. 상습범이야.”


상습범!? 고작 두 번째라고.


“에이~ 저번에 딱 한 번 그랬다며.”

“어쨌든요.”


뭐야 어떻게 알아. 니들 사이에 비밀은 없어? 심지어 그건 니들 얘기도 아니고 내 얘기잖아! 뒷말하고 그러는 거 싫다며!


“아, 음... 구, 굿모닝입니다.”


더 이상 소재거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말려있던 몸을 펴고 일어섰다.


“뭐? 굿모닝?”

“핫! 봉팔님 구드모닝입니다! 속 좀 괜찮으세요?”


두 눈에 불 지르는 그녀를 막아서며 뿔테가 인사를 받아준다.


“어제 좀 많이 마셨나 봐요. 봉순아 미안.”


감겨있던 몸 이곳저곳에서 관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걸터앉으며 사과를 했다. 봉순은 으이그 하며 주방을 향했고 뿔테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오픈 준비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렇게 몇 분간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을 뿐, 분주한 시간 사이에서 홀로 정지해있는 느낌은 그대로였다. 따뜻한 눈빛의 그녀는 없다. 한때 자기 방에 가서 씻고 오라 했던 봉순도 없어졌다. 역시 뿔테라는 존재가 생겼기 때문일까.


“봉팔아.”

“어?”


깜짝이야.


“커피 한잔 내려줘?”

“응, 아, 아니. 속 쓰려.”

“으이구.”


그녀는 등을 돌리고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역시나 씻고 오라는 말은 없다. 집에 가려고 늘어지는 몸을 일으켰다. 불판에 한참 동안 달궈진 인절미 같다.


“앉아 있어.”

“어?”


“나도 아침 안 먹었어.”

“어, 그래.”


“이거만 하고.”


봉순이 원두의 포장을 뜯어 유리병에 담으며 말했다. 인절미를 의자에 다시 앉힌 후 그녀를 기다린다.


“아, 씻고 먹을래?”


그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어? 어.”

“그래. 씻고 와.”


“근데 어디서...”

“응?”


그녀는 내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작은 눈을 껌뻑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들더니 천장 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방이 있는 곳이다.


“가방에 열쇠 있어.”

“아, 응. 알겠어.”


마치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일어서서 그녀의 가방으로 갔다. 방 열쇠를 집어 들고 돌아섰다. 심장이 꽤나 빠르게 뛰었다. 저 여자 그야말로 나를 들었다가 놓는다.


계단을 오르자 뿔테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이제 화분에 물 줄 수 있는 날도 며칠 안 남았네요.”

“네?”


나의 갑작스러운 계절 타령에 그가 돌아봤다.


“슬슬 추워지니까요.”

“아! 그렇죠! 화분들 사무이(寒い)! 속 좀 괜찮으세요?”

“아뇨... 좀 씻으면 나아지겠죠.”


그렇게 눈인사를 한 후, 봉순의 방으로 향했다. 일부러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로 그녀의 방을 들락거릴 수 있는 존재다.


뿔테는 활짝 웃은 후 다시 일에 열중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뒷모습을 보니 이죽거리던 숙취가 사라지는 것 같다. 설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뭐, 상관없다. 지금 당장은 테이블 아래의 시간들마저 치유되는 것 같다.


문고리에 열쇠를 넣은 후 돌렸다. 여느 문고리에서 날법한 그 철컥 소리가 꼭 나에게만 허락된 특권처럼 느껴졌다. 들어선 후 문을 닫았다. 다시 철컥 소리 나게 문을 잠갔다. 이 두 번의 소리가 뿔테에게도 들리길 내심 바랐다.


봉순의 방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 가운데에 몸을 뉘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이곳에 누워있었다. 기억난다. 천장의 격자무늬 벽지도 아슬아슬 쌓여있는 잡동사니들도, 그녀의 기호대로 옅은 오렌지톤 도배된 저 화장실 문까지도, 뚜렷하게 기억난다. 그래도 그녀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올 일은 없다.


몇 가지는 꿈과 매우 비슷하다. 내가 이곳에 누워있다는 것, 그리고 곧 그녀와 아침을 함께 먹을 것이라는 점. 꿈속의 일들이 순서만 뒤바뀌며 일어나는 건 아닐까, 묘한 기대감이 든다.




휘파람 불며 샤워를 끝내고 계단을 두어 칸씩 뛰어 내려갔다. 달달한 빵 냄새가 코로 스며든다.


“봉팔님! 이거 드세요.”


주방에선 뿔테가 어깨 들썩이며 뭔가 만들고 있었고 봉순은 그 앞의 바에 앉아 뿔테가 만들어 준 크로크무슈를 먹고 있었다.


“미안, 빵이 너무 맛있어.”


봉순이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침 먹으러 안 간다는 얘기겠지. 돌처럼 굳어가는 몸을 드르륵 끌고 가서 옆자리에 앉았다.


“오 태리님 역시 센스~! 잘 먹겠습니다.”

“밥 안 먹어도 돼? 밥 먹고 와.”


그녀가 물었다. 걱정이야 비아냥이야, 아니면 배신에 대한 미안함이야. 아니지, 네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그냥 먹자 먹어.


뿔테가 만들어준 크로크무슈는 숙취로 버석해진 입속에서조차 부드럽게 흘러 들어갔다. 그 놀라운 맛만큼 명치 부근이 저렸다. 그러고 보니 하필 오늘이 뿔테와 봉순이 함께 일하는 날이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우연할 날에 이곳에 앉아서는  그놈이 만들어준 천상의 브런치를 먹고 있다.


왜 이곳에서 잠들었을까, 택시라도 타고 가지. 차라리 길에서 잠들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정신 차리고 생각해봤다면, 그렇게 빠르게 집으로 갔다면 이 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같이 밥 먹을 생각에 들떠서는... 바보바보 상바보 같으니. 후딱 먹고 집에 가자, 봉팔아.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결국 봉다방을 떠나지 못했다. 빵을 다 먹은 뒤에도 한참 동안을 앉아서는 봉순과 뿔테가 키 잡은 봉다방 함선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뿔테는 프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으며 적정 컨디션을 유지했다. 몇 번의 주문이, 몇 개의 메뉴가 나가던 그의 주방은 본래의 그 상태였다. 시나몬 가루 통이 손 근처로 내려와 있다거나 어딘가에 우유 거품이 튀어있는 일은 없었다. 뒤이어 같은 메뉴가 주문되면 어차피 같은 재료 용기를 다시 꺼내야 한다. 냉장고에 넣지 않고 둘만도 한데 뿔테는 그러지 않았다. 모든 재료들은 완성된 메뉴가 나간 후 뚜껑 꾹 닫히며 제자리를 찾아갔고 새로운 메뉴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 시럽을 쓰고 나면 노즐 끝을 닦아줘야 돼. 여기 램프 열이 강해서 상하기 쉽거든.”

“응. 알겠어요.”


봉다방의 왕이자 주방의 지배자 봉순도 그의 옆에서는 온순한 사자가 된다.


“허니브래드 빵 세팅할 때 말이야.”

“어?”


“칼집을 여기 끝까지 확실히 내는 게 좋아. 버터 굵기도 좀 더 얇아야 되고.”

“네.”


“버터가 조금만 두꺼워도 확 느끼해 지거든. 거기다가 칼집까지 애매하면 향이 빵 전체로 퍼지지도 않고.”

“아~ 그렇구나.”


그 순순한 모습이 왜 이리도 서운한지.


“지금 아포가토 만들고 있지.”

“네.”


“아직 아이스크림은 푸지 마세용~ 이거  마무리할 때쯤.”

“아, 네~”


뿔테는 무언가를 만들 때 절대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뭘 하는지 지금 메뉴의 흐름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봉순은 그의 몇 마디에 기다렸다는 듯 척척 반응했다.


둘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나와 일할 때의 봉순이 얼마나 많은 내 역할을 대신해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둘은 단순히 잘하는 두 사람의 합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때문인지 그 이상의 시너지가 있었다. 내가 지켜보는 그 시간 동안에도 둘의 조합이 더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손님의 관점에서 둘의 장면을 보고 있자니, 현재 봉다방에 대한 명료한 생각이 자꾸 노크를 했다. 몇 번은 모른 척을 했다. 그런데 그 집요한 녀석이 잊을 만하면 툭툭 치더니 결국은 쾅쾅 머리를 두들겼다.


이제 봉다방은 4인 식구 임금은 쥐어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단골 층도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 하루 한 둘씩 새로운 얼굴도 보인다. 모든 테이블 꽉 찬다거나 줄을 서야 될 만큼 주문량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봉다방 함선이 수평선에 닿는 것도 이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지점으로  가는 데 있어서 더 이상의 새로운 아이디어나 심리학적 접근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봉다방엔 가능한 모든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 누구든 이곳을 들어선다면 다시 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저 지금 내 눈앞에서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처럼, 더 좋은 커피로 화룡정점을 찍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이다. 방향 정해진 함선이 수평선에 잘 닿을 수 있게, 함께 밀면서 시너지를 일으키면 된다. 낡은 도면 펴고 앉아서 선체가 어떠니 갑판이 어떠니 하는 사람은 이제 필요 없다. 어쩌면.


“봉팔!”

“어? 아, 네? 사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 그냥.”

“빵 떨어졌어. 좀 사 와.”

“나 오늘 손님인데~”

“내일도 손님이고 싶어? 사와.”


어쩌면, 이제 내 역할은 끝난 건지도 모르겠다.



시장 골목을 헤치고 나간다. 대로 건너편에 조금은 생뚱맞게 도시적인 건물이 박혀 있고 그 안엔 대형 빵집이 있다. 빵을 사서 다시 시장 골목을 지나온다.


봉제 공장 사장님이 눈인사를 건넨다. 이제 앞머리가 거의 안 남으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르마는 존재한다. 화장품 가게 언니는 오늘도, 아 아니다. 사람이 바뀌었네. 앉아있는 모습이 너무 비슷해서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겨울의 한기가 어슬렁거리는데도 이불가게 사장님은 반팔에 반바지다. 분식집 사장님은 뭘 잘못하셨는지 사모님이 만든 벼락을 맞고 계시다. 그러고 보니 이 골목에 새로운 가게가 여럿 정도 들어섰는데, 모두 다 음식점이다. 해장국 집도 있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 저기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녀도 있었다.


“어제 쫌 많이 마시더만! 집에 안 들어갔으?”

“그렇죠 뭐.”


사무라이 사장님께서 수족관에 붙여 놓았던 검은색 비닐을 뜯어내며 물었다. 가게 문을 닫을 때는 수족관 전체를 저렇게 검은색 비닐로 덮으시고 다음날 문을 열며 다시 떼어내신다. 이유가 있었는데 뭐였더라.


“조만간에 또 가겠습니다.”

“그려. 전어 철 지나기 전에 와. 만날 광어만 먹지 좀 말고!”

“하하하 넵!”


그렇게 잠시나마 봉다방을 벗어나 시장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복잡했던 심경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설마 심부름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옆 건물 할머니는 오늘도 앞마당을 쓸고 계신다. 날이 쌀쌀해서인지 그 영역을 좀 더 확장하신 느낌이다. 조만간 봉다방 앞쪽까지 쓸어주실 것만 같다.


문을 열자, 계단에서 뿔테와 봉순이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있다. 건물주였다. 그들이 어떤 대화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봉순의 하얗게 질린 표정이나 뿔테의 놀란 얼굴이 그 심각함을 알려주었다.


"아니, 뭐 방 빼라 이런 얘기는 아니고..."


저게 무슨 말이지.


"이해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거지."


그러다가 봉순의 입에서 나온 말 조각들이 날아와 박혔다.


“그러니까... 1층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입점한다고요?"


프랜차이즈.

이곳 봉다방, 그 네버랜드에선 마치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어른 냄새 물씬 풍기는 단어였다.


방금 지나온 시장 골목에서의 시간조차 아득해지는 것 같다.






이전 12화 버스의 옆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