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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30. 2016

소년에게 내렸던 소나기

#27. 하루 종일 내렸다. 소녀가 오지 않은 까닭이다.



그 후로 다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어.



어느 노래 가사에 나오는 구절을 수어 번 되새긴 하루를 보냈다. 그녀는 어제와 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난 그녀가 불과 하루 전 뿌리내렸던 테이블을 멍하니 바라보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마로의 추궁 어린 눈빛을 받아야 했다. 고작 반나절 지났는데 내 감정은 긴 이별의 심연을 헤엄치고 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생각났다. 소년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 아련함이 한데 모여 그들에게 내렸던 소나기처럼 뒤덮었다. 내 몸은 소나기가 무슨 대단한 드라마 속 효과라도 되는 양 빗방울 하나하나에 구슬피 울어댔다. 몸살감기 걸린 듯 구석 어딘가가 저렸다. 위치는 알 수 없었다. 두 손바닥 같기도, 겨드랑이 같기도 하고 안쪽 허벅지 같기도 했다. 또는 때가 많이 나오는 무릎 뒤편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변덕스러운 위치와 상관없이 그 느낌은 점점 더 강해졌다.


정오가 지날 때쯤에서야 그 저린 느낌이 명치 부근에서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어딘가의 피부 그리고 장기의 표면이 평소보다 얇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봤자 심장은 하나의 신체기관에 불과해, 이성적인 생각을 수없이 떠올렸지만 맥없이 증발될 뿐이다. 증발된 생각들은 수증기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뭉쳐 들었다. 그렇게 구름 하나가 머리 위에서 다시금 소나기를 내렸다.


내 몸은 바싹한 햇살에 마를 시간도, 구름을 비껴갈 시간도 없었다. 그저 그녀의 채취가 남아있는 테이블 만이 소년이 소녀와 비를 피했던 원두막처럼 나의 빈 가슴 일부를 채워줄 뿐이었다.


정말, 꼴값이다.


누가 알게 될까 무섭다. 무녀 독남 아들에게 평생을 바치고 계신 어머니께서 이 모습을 본다면 당장 동사무소로 향하셨을 것이다. 먼저 떠나신 선조들도 이 순간만큼은 나를 못 보았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이 상태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왜 그렇게 보니?” 그런데 자꾸 누군가가 눈치를 챈 것 같은 느낌이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네.”

“어, 어디?”


마로는 짧고 작은 검지를 들어 나의 이마를 가리켰다. 그 손끝이 내 얼굴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게….” 

식었다고 하기엔 너무 뜨거운 식은땀이 이마 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어디 묻었다는 건데… 어른한테 장난하면 못써요~.”


능글맞은 말투를 뱉어보지만 그 얼굴은 게임방으로 간 학원비의 출처를 들켜버린 아이의 것이었다. 마로는 그 아이의 얼굴을 따라 여러 번 원을 그렸고 이내 그 방향은 가슴 쪽을 향했다. 그리고 정지.


“으, 응?”

“이게 묻어요.” 마로는 내 가슴에 손끝을 가리킨 채 말했다.


“아, 아~ 여기 먼지 묻은 거? 하, 하하하!! 깔끔도 하셔라… 떼야지 먼지. 하하, 아이고 이 먼지 녀석이 여기 붙어있었네~ 요놈! 떨어져라, 요놈!”


당황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콩트를 쏟아냈다. 짧고 희미한 한숨이 마로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작은 입에서 나온 그 작은 한숨에는 ‘멍청이’란 단어가 가득 차 있었다.


“여기 있는 게…” 가슴에 있던 그녀의 손끝이 다시금 얼굴로 올라와 빙그르 돈다. “여기 묻어요.”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알아들었다. 하지만 난 모른다. 몰라야 한다. “어떻게 가슴에 있는 게 얼굴에 묻어.”

“너무.” 그녀가 ‘멍청이 한숨’을 한 번 더 내쉰 뒤에 말을 이었다. “너무 많아서 묻어요.”

“아! 점심시간 끝났으니까 손님들 좀 오겠당~ 준비하자!”


난 방금 전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인 듯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피할 수 없는 뻔뻔함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내 얼굴은 후크선장의 검붉은 벨벳 재킷 색이 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피할 수 없는 뻔뻔함이었다.


“난 알아요.”


그녀는 핵폭탄 같은 전설의 가요 제목 네 글자를 뱉은 뒤 주방으로 돌아갔다. 속에서 탄식이 삐져나왔지만 되삼켰다. 무속인이 내 과거를 맞출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부럽남이 자신들의 가정사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때 사주 만세는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만약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동요가 이 정도라면, 난 이제 점 보러 가는 사람을 이상하게 볼 자격도 그리고 부럽남과 사주만세를 미워할 자격도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뒤돌아서서 ‘그녀는 어떤가요. 그녀 안에 제가 있나요?’라고 외치며 마로님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기 때문이다.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렸다. 소녀가 오지 않은 까닭이다. 나는 소설 속의 그 아이처럼 소녀의 불상사를 귀 너머로 들을 필요가 없다. 정말 그럴 일은 없다. 그저 숫자들이 박혀있는 버튼을 꾹꾹 누르면 소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마도 그 행위는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손가락뼈가 홀랑 삭아서 버튼을 못 누르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 지우개가 그 숫자의 나열만을 지워버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장 뚜렷하게 떠오른다.— 핸드폰 요금을 안내서 발신이 정지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난 그저,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좁은 통로로 목소리를 교환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율신경계가 삐그덕거렸다. 봉다방에서야 이런저런 시선 환기를 무기 삼을 수 있지만 전화상으론 무리가 있다. “뭐해?”라는 말 한마디, 그리고 그 마디의 전후를 감싼 공백만으로도 그녀는 내 어색함을 감지할 것이다. 단 며칠 사이에 찾아온 이 혼란을 나 같은 연애 초짜의 그릇에 담기엔 너무 크다.


그 지독한 소나기는 다음날,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 계속 내렸다. 그녀는 남은 휴가 기간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집에 있을까 근처를 서성거려봤지만 없는 듯했다. 물론 그녀에게 전화 걸어 내 귀로 그 신호 대기음을 듣게 되는 일도 없었다. 난 그저 몸이 젖고 젖어 불어 터질 때까지 소나기를 맞았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장마는 끝이 났다. 


봉순은 헤어스타일이 바뀌어 있었다. 단발머리였던 그것들은 조금 더 자라서 하나의 밴드 고무줄에 묶여있다. 그 촘촘한 행렬에 끼지 못한 몇 가닥이 얼굴을 가리기는 하였지만 귀라던가 이전보다 더 많은 부분, 특히나 목선이 드러나 있었다. 몰랐다. 그리도 고울 줄은.


그녀는 쨍한 햇살을 등지고 봉다방의 크고 작은 화초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 다가가자 고개를 든다. 청색 블라우스 때문인지 하얀 피부가 더 밝아 보인다. 난 그녀와 눈이 마주쳐서가 아니라 햇살이 눈에 들어가서 그런 것 마냥 미간에 힘을 주며 시선을 돌렸다.


“봉팔 오랜만.”

“오~ 봉순 오랜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구관조 화법을 쓰고 말았다. '오~'라는 기나긴 음속에 숨어있던 떨림을 못 들었기만 바랄 뿐이다. 관절이 마비된 사람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 옆을 지나 봉다방으로 들어왔다. 아니 숨어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그녀의 향수 냄새가 후각으로 들어온다. 화들짝 뒤를 보니 따라 들어왔지 뭐야.


“어… 뭐야. 왜, 뭐가?” 


주춤거리며 물었다.


“뭐가 왜야? 아침부터 왜 이래. 넋 나가서는.”


그녀가 답했다.


마로가 우리의 짧은 대화를 지켜보며 묘한 미소를 띠운다. 난 그 미소, 눈빛 모두 모른척하며 풀어진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자자! 중대 발표를 하겠어요.”


봉순이 갑자기 입을 연다. 애 떨어질 뻔했다.


“새로운 직원이 올 거야!”


애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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