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Feb 01. 2016

까만 뿔테

#28. 불청객은 예고 없이


“파티시에?”

“응.”


현재 봉다방의 디저트는 봉순이 마트에서 공수해오는 버터 그리고 초코 두 가지 맛의 쿠키, 허니브레드, 크로크무슈, 토스트 식빵, 수프 정도가 전부다. 맛있는 커피를 위해 드린 공에 비해서 디저트가 부실하다는 것이 그녀의 평가. 파티시에를 영입해서 디저트의 양과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 파티시에(프랑스어: pâtissier, 여성 pâtissière): 페이스트리 요리사를 말하는 프랑스어. 과자나 케이크 또는 쿠키 등을 만든다.


"좋은 커피는 좋은 디저트랑 만날 때 더 맛있으니까."


그녀는 이미 그 입속에 맛 좋은 디저트라도 들어있는 건지 입을 야무지게 모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봉다방 살림으로 가능할까? 영입 말이야."

"응. 판매량도 오르고 있고."


판매량 오르면 재직자들의 처우부터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식구부터 늘린다는 건지 모르겠다. '눈깔사탕'이나 진배없는 봉다방의 급여 수준, 그 분명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에 넣는 순간엔 달짝지근하니 맛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를 리 없다. 밥 아니고 사탕이니까!


억울함이 목 터널을 회오리치지만 꿀떡 삼킨다. 눈깔사탕 억지로 삼킨 듯 쓰리다. 화가 나는 건 아니다. 뭐랄까 그냥, 그녀가 이 식도의 쓰라림 정도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왜 그 쓰라림을 감내하는 지도.


"뭐… 해줄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


난 질문도 대답도 혼잣말도 아닌 것을 중얼거렸다. 이 열악한 여건 속에서 그 실오라기 같은 돈을 받으며 일해 줄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나 같은 사람 없다고!


"내가 구해놨어."


응?


"생각해보니 너가 말했던 내적 동기." 그녀가 마로의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이 또 있더라고."


괜히 알려줬다. 악용되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


"곧 도착할 거야."


그제야 봉순을 본다. 얇은 선분홍의 입술이 옅게 웃고 있다. 불길한 예감이 들려는 찰나 봉다방의 문이 열렸다. 오늘따라 문의 이음쇠가 관절염에 걸렸는지 괴이한 비명을 지른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봉다방 문을 여는 사람은 ‘독거 여인’ 한  명뿐이다. 높지 않지만 꽤나 단단해 보이는 굽의 신발을 즐겨 신기 때문에 계단에서 들려오는 두 걸음 정도만으로도 그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문을 연 사람은 독거 여인이 아니다. 문틈을 파헤치는 바람의 세기가 다르다. 그 세기로 보아 문을 당긴 팔은 필시 남자의 것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지면과의 마찰음이 날카롭지 않으므로 운동화. 그럼에도 소리는 크다. 고로 남자.


내려오면서 이따금 멈추는 것으로 보아 좌측으로 붙어있는 벽장의 장식들을 구경하고 꽂혀 있는 책도 두어 권 빼서 넘겨보고 있는 게다. 꽤나 여유로운 성격이다. 그러나 그것이 귀여운 소품 때문인지 혹은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해서인지는 모르나, '오!' 하는 짧은 음절, 그 소리의 파장은 보나 마나 남자!


그 음의 높이에서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 어깨를 올린다고나 고개를 뒤로 까딱이는 정도의 좀 더 과한 제스처가 있을 것 같은 느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봉순과 나만의 이 성스러운 공간에 남자가 들어오고 있다.  그놈이 저 벽 뒤의 계단에서 마치 여주인공과 소꿉놀이 추억이라도 향유하고 있는, 방금 귀국한 내연남이라도 되는 냥 분위기를 잡으며 내려오고 있다. 그것도 이제 막 내가 짝스아랑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불길하다. 불길해.


"태리!"


봉순이 계단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그를 반겼다. 그녀가 그렇게 활짝 웃는 건 본 적이 없다. 마치 꽃이 피고 있는 영상을 갑자기 빠른 화면으로 돌린 듯, 그 얼굴이, 그 생동감이 만개한다. 심지어 첫 손님이 나타난 대망의 순간에도 저리 활짝 웃지는 않았다.


"오우! 보응-순!"


역시, 남자다. 목소리도 좋다. 음절 하나하나가 묵직하니 명치를 울리는 그야말로 남자의 사운드다. 생동감 넘치던 봉순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무언가가 가린 탓이다. 건강미 넘치는 팔뚝 하나가 그녀의 얼굴과 어깨 전반을 뒤덮으며 끌어안는다. 둘은 포개어졌다.


입은 것이 반팔티인데 옷이 작은 건지 팔이 굵은 건지, 소매가 빈틈이라고는 없이 팔을 휘감고 있다. 그 주변으로 각 근육의 부위를 구분하는 음영들이 꾸물거리는 게 꼭 그것이 남성의 팔뚝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다부진 어깨 위, 그의 옆모습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귀에 닿을 듯 시원한 미소였다. 하얀 피부와 깔끔한 헤어스타일, 그 중간 즈음에  검은색 뿔테가 걸쳐 있다. 짙은 뿔테와 하얀 피부가 대비되며 오뚝한 일자 코와 어금니 전체가 보일 듯한 그 미소를 부각한다.


"읍, 뭐야. 숨 막혀요."


그녀가 콜록거리자 뿔테 녀석이 두 팔을 풀어줬다. 저 놈의 미소는 풀지 않는다.


"오! 미안! 반가워서 그랬지. 우리 몇 년 만이지?"

"그르게요. 진짜 오랜만이네."


둘의 상봉이 꽤나 훈훈하다. 봉순은 세 뼘이나 높이 있는 뿔테 속의 눈과  교감하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대화의 호흡은 뜸뜸한데도 둘은 눈을 떼지 않는다. 흡사 오랜만에 상봉한 연인 같다. 뿔테가 고개를 상하좌우 궤적을 만들며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핀 후 많이 변했다고 얘기한다. 뭐, 뭐가, 어디가 변했다는 건데.


봉순이 사료받아먹는 홍자 마냥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다. 난 욕을 잘 못하지만, 아마도 '년놈들'이란 말은 이런 상황에 쓰라고 생겼나 보다. 그리고 저, 저, 저 눈은 뗄 생각을 안 한다. 짝사랑 심정 더듬으며 떠올렸던 그녀의 눈은, 저토록이나 오래 다른 이의 눈을 바라본 적이 없다.


"아 그리고 여기 두 사람은…."


봉순이―이제야 생각났는지― 그에게 마로와 나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의 팔 안쪽, 그러니까 팔꿈치 반대편의 매우 부드럽고 체온이 즉각 전달되는 그 공간에 자신의 손을 감으며 그를 끌고 들어온다. 아니 사지 멀쩡하고 딱 봐도 소 댓 마리는 때려잡을 것 같은데 뭘 굳이 부축까지 하는 것일까. 미간에 힘 빡 들어가며  한쪽 눈썹의 끝이 올라간다.


"반갑습니다. 태리라고 합니다."


그가 180센티미터 족히 넘어 보이는 육신의 상체를 허리 높이까지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난 마치 일에 집중하느라 둘의 상봉은 못 봤다는 듯, 아, 아! 네, 반갑습니다. 물론 '사람 좋은' 얼굴도 잊지 않았다. 엄청 훈남 이시네요! 영혼 없는 칭찬까지 튀어나간다. 오늘따라 이 성격이 원망스럽다. 그래도 악수는 하지 않았다. 저 단단한 손과 악수하며 남성으로서의 상실감을 맛보고 싶지 않다. 손이 젖어 악수는 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보낸다. 그는 알아들었는지, '오!'하며 두 검지로 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역시 톤만큼이나 제스처도 과하다. 그 이름도.


어디선가 옆모습 근사한 사람은 막상 앞모습을 봤을 때 실망하기 쉽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 말 다 뻥이다. 이 옆모습 멋진 남자, 그 앞모습은 영혼 없던 칭찬의 낱말 그대로 '훈남'이다. 시원한 이마, 길쭉한 눈에 짙은 속눈썹, 균형 잡힌 오뚝한 코,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고 그 입은… 그 입은 정말이지 가장자리가 쑥쑥 파이는 게, 도넛 CF 담당자가 본다면 ‘내가 찾던 그 입이다!’ 소리칠 만큼 시원하다. 저 입으로 도넛 깨물면 분명 매출 오른다.


'liberty'라는 문구와 초록색 깃발들이 프린팅 되어 있는 흰색 티셔츠가 몸에 감겨있다. 그 아래로는 무릎에서 끊기는 청바지와 소재 얇아 보이는 회색 단화, 허리엔 감색 체크 남방이 묶여있고 연두색의 커다란 배낭으로 포인트를 줬다. 저런 스타일은 보기엔 굉장히 편해 보이면서도 패셔너블한데 막상 내가 직접 입으려고 하면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그러니까 감각적으로 타고나야 가능한 스타일이다. 잘난 놈이 옷도 잘 입는다.


봉다방 주방 벽엔 거울이 하나 있다. 고개 돌려 봤더니 그 거울 속에 웬 꼴뚜기가 한 마리가 보인다. 게다가 이 꼴뚜기, 바닷바람 쐬며 뙤약볕에서 3~4일은 있었는지 거무튀튀한 것이 맛도 지지리 없어 보인다. 잠을 설친 탓에 그 두 눈 퀭하기 그지없고 혈색 때문인지 나비넥타이가 꼭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다. 머리 스타일은 오늘따라 왜 이리도 어색한지. 봉순 출근 날이라고 만지고 고치고 다듬은 것이 오히려 화근이다. 현실을 잊기 위해 고개를 돌려 거울에서 탈출한다.


마로가 날 보고 있다. 아마도 계속 보고 있었겠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니…) 눈이 평소보다 커진 것으로 보아 내 행동에 뭔가 어색함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난 목적이라도 있는 듯 거울을 다시 한번 보며 얼굴에 묻은 뭔가를 떼어내는 시늉을 했다. 마로는 아기가 엄마 아빠를 번갈아보듯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봉순을 보고는 다시 나를 보았다. 에휴, 귀신을 속이지.


“여기는 캔디.”


봉순이 문간에 있는 캔디를 끌고 온다. 뿔테 녀석, 캔디에게는 어떻게 인사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마네킹한테 90도로 허리 숙이며 인사할 수는 없을 지도.


"오! 캔디. 잘 있었네~" 그가 두 팔을 활짝 펼친다. “누나 말 잘 들었나 보네. 지금까지 있는 것 보니까.”


이 상황은 뭘까. 저 덩치 산만한 남자가 자신만큼 커다란 마네킹을 얼싸안고 있다. 그러더니 그 마네킹의 머리카락을, 아니 머리통 윗부분의 머리카락 모양의 아크릴을 손바닥으로 비비적거린다.


“너 맡기고 가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랬다. 캔디는 뿔테가 남기고 간 것이었나 보다.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맘에 들지 않더라니. 봉순이 캔디와 그토록이나 각별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의 분신, 뭐 그런 것일까. 출처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든다. 가슴이 물기 빠진 스펀지마냥 허망해진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기 위해 이름 지었다던 캔디, 그녀에겐 캔디가 있었다. 자신에게 캔디를 남기고 간 그 남자가, 항상 곁에 있었다.


“솜씨 좀 보여줘요.”


그녀가 두 남자의 상봉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뱉었다.


"하이(はい)!"


그가 얼마 전까지 생활언어였던 일본어로 대답했다. 태리는 제과 및 제빵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경제과학교를 졸업한 후 <모모타르트>라는 작은 카페를 운영해왔다고 한다. 과일과 치즈를 이용한 가정식 타르트와 담백한 초코 케이크가 이 카페의 인기 메뉴인데, 도쿄에서 디저트로 꽤나 유명해서 일본 맛집 가이드에도 소개돼 있다고 한다. 담장 밖까지 뻗어진 넝쿨이 트레이드마크라나.


"이런 꼬물 오븐기로도 가능해?"


봉순이 뿔테를 주방 쪽으로 에스코트하더니 묻는다. 뭐 꼬물? 내가 그 가격에 사려고 실크로드를 건너갔다 온 사람이야!


"흐에? 오븐기 가와이-!(かわいい)"


뿔테는 실크로드 오븐기에 대한 감탄을 표한 후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요리하는 사람의 영혼!'이라며, 오븐기가 고물이 맞다는 것을 한 번 더 꼬집었다. 보통 놈이 아니다.


식대 앞에 서자 언제 활짝 웃었냐는 듯 정갈한 표정을 짓더니 안경을 고쳐 쓴다. 보통은 안경을 올릴 때 검지를 사용하여 안경 앞부분의 가장자리 혹은 가운데 부분을 밀어 올린다. 또는 검지와 중지를 사용하여 렌즈 부분의 위아래를 잡은 뒤 올리기도 한다. 말 많고 게걸스러운 내 친구는 코를 찡그려 올린다. —코가 딱히 높은 것도 아닌데 주변 근육이 남다른가 보다.— 그런데 이 남자, 얼핏 보면 그냥 올리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상당히 특이하다. 안경의 렌즈 부분이 아닌, 안경을 귀에 지탱하는 다리 부분을 잡아서 올린다. 굳이 그 얇은 테 부분을 검지와 엄지에 파지하는 모양새에서 길쭉한 미소와는 다른 집요함이 보였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데 정말이지 오래도 씻는다. 기다리는 이들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상관없이, 마디 사이사이, 손톱 밑 그리고 얇디얇은 주름 속속들이 씻어내는 모양새가 종전의 훈훈함과는 상반된다. 인정하긴 싫지만 프로의 기품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손에서 탄생한 디저트는, 그야말로 프로의 맛이었다.


별 거 없다. 식빵 구워서 슬라이스 치즈 얹은 뒤 접었다. 그게 다다. 그런데 맛있다. 입에 넣기 전 그 달달하고 고소한 향이 먼저 빽빽한 코털 숲을 비집고 들어와 후각을 자극하고 입에 넣는 순간 빵을 감싸고 있던 열기가 입속 곳곳을 덥힌다. 바삭한 표면을 깨물자 더 뜨거운 열기와 함께 부드러운 빵의 식감이 본심을 드러냈다. 치즈의 짭짤함 그리고 담백한 맛이 혀를 괴롭힌다. 즐기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던 혀는 참으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허겁지겁 어금니를 맞부딪치며 입 속의 그것들이 없어질 때까지 미각을 곤두세울 뿐이다. 그렇게 정신 차려보니 없다.


마로의 커피와 이 토스트를 함께 먹는다면?

사이좋던 커플 사랑의 속도 가속이 붙고, 사이 나쁜 커플 서로 심취해서 베어 먹다가 그 사이 더 나빠진다. 사이가 좋던 안 좋던 친구들끼린 그냥 각자 하나씩 시켜먹는 게 우정을 유지하는 길이다. 그토록이나, 이 맛의 조합은 완벽하다. 그런데….


그런데 왜일까. 이 좋은 실력에, 십 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씩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유명 카페를 제쳐두고, 왜 대한민국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의 이 작은 카페까지 온 것일까. 뭐가 아쉬워서.


아니, 뭐가 그리워서.



이전 03화 소년에게 내렸던 소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