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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Aug 22. 2022

존버의 함정

먼 행복 vs 가까운 불편


겨울이 싫다.


여름의 후끈함이 사라지는 가을이 오면 남아있는 더위를 만끽하려 애쓰곤 한다. 딱히 여름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농도 짙은 열기가 어깨를 짓누르고 발목을 녹이는 한 여름 무더위도 당연히 괴롭다. 단지, 겨울이 지독하게 싫을 뿐이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다. 겨울이 멀어진다는 점에서 가을보다 봄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좋아하는 계절을 물어볼 땐 의도적인 구분을 짓곤 했다. “봄이 좋아? 가을이 좋아?” 혹은 “여름, 겨울 중에 굳이 선택하라면?”과 같은 식이다.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사계 중 겨울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겨울을 이토록 미워하는 이유는 추위 때문이다. 추위가 싫다. 나는 얇은 팔다리와 배둘레햄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육체를 사용 중이다. 그런데 하나뿐인 이 녀석이 추위에 참 취약하다. 감각적으로만 취약한 게 아니고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그 이불속에서 결국 나와야 할 거야. 난 시간 많거든? 기다릴게.”


아침에 눈을 뜨면 방안까지 스며든 한기가 이죽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양 어깨의 거리를 좁히며 집을 나선다. 죽어가는 거리의 빛깔과 냄새,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의 낯빛, 앙상한 나뭇가지와 날카로운 바람 소리, 입을 다문 건물들. 모두 겨울의 추위를 극대화하기 위한 미장센 같다. 그 정점인 1~2월에 이런 길을 걷고 있노라면, 대바늘로 뼈 마디와 근육을 들쑤시는데 죽지도 못하고 걸음을 잇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이 겨울이라는 계절이 굉장히 끈질기다. 끝날 듯 끝날 듯 끝내지 않고 버티다가 시간 맞춰 들어서는 봄의 미소까지 밀어낸다. 어렵사리 지면을 뚫는 꽃들도 악착같이 시샘한다. 그렇게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어? 벌써?’ 할 때 이미 사라진 봄/가을의 아련함에 비하자면, 정말이지 아무리 좋게 보려고 뜯어봐도 그럴 수 없는 진상 같다.


Winter is coming...


(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런 이유로 추위가 본격화되는 11월부터 2월까지의 약 4개월 동안, 나는 다른 계절에 비해 덜 웃고 덜 기뻐하며 덜 애쓴다. 그래서 일상에서의 분위기도 좀 다르다. “아, 저는 겨울 동안 최대 70% 컨디션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걱정 섞인 주변의 질문엔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추천으로 좋은 외투를 샀다. 롱패딩이었다. 그 성능이 놀라웠다. 전에 입던 외투들보다 무게는 가벼운데, 월등하게 따뜻하다. 목과 손목 부분의 시보리가 탄탄하여 바람 들 틈이 없었고, 무엇보다 무릎까지 외투로 덮는 것이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 줄 몰랐다. 그 롱패딩을 구입한 순간부터 겨울의 일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겨울은 절대자가 아니게 되었으며, 겨우내 날카롭던 추위는 더 이상 나를 콕 집어 괴롭히지 못했다.


바뀐 상황을 겪고 나니, 추위를 그렇게나 싫어하면서 해결할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매년 4개월의 시간 동안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이빨 부닥치며 버틴 것이다. '70% 컨디션'이라는 괴상한 변명과 함께.


"너도 샀네 롱패딩?" / "응. 난 옛날에 샀지."


존버 해야지 뭐.


존버. ‘존나 버틴다’의 준말로써, 매우 힘든 시기를 거칠 때 사용되는 은어다. 본디 전략 게임에서 생겨난 용어여서 어려운 상황을 마냥 버틴다는 의미만 담겨있는 게 아니다. ‘절호의 찬스가 오거나 확실한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괜한 시도를 줄이고 현상태를 유지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꽤나 인기 있는 표현이어서 게임은 물론, 일상 대화, 주식투자, 예능프로 등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곤 한다. 언젠가 TV를 틀었는데 명절 특집으로 아이돌 게임 대회를 방영하고 있었다. 캐스터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와아, 세상에! ㅇㅇㅇ선수! 존버 전략을 택합니다! 존중하며 버티기!!”


심리학에서도 존버만큼 유명한 키워드가 있는데 ‘수용’이다. 몰랐거나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부인하던 사실에 대해 인정하며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유지한다는 점에서 존버와 그 근원이 유사하다.


이 같은 수용을 통해 꽤 많은 심리적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평생을 갈증과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는 자기 수용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그 안의 고유한 빛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용과 존버는 좋은 조합이다. 인생을 마라톤으로 보았을 때, 존버할 힘이 없다면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적절하게 완성된 수용 후에는 마라톤이 청량한 바람과 화창한 햇살 아래의 조깅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속에 함정이 있다.

받아들이고 버티는 행위만 몰두하다가 정작 그 목적을 멀리 두게 되는 경향성이다. 오늘, 이번 주의 불편들을 습관적으로 방치하는 것이다. 따져보니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비유가 그렇다. 도착하는 순간까지 일관적인 속도를 유지하며, 고통만을 감당해야 한다.


수용하는 태도를 통해 ‘언젠가’ 인생 전반에 대한 평온에 이르려는 것. 존버하다 보면 ‘끝끝내’ 빛을 볼 거라는 기대. 이렇게 장기적인 관점의 태도는 반복되는 오늘을 또렷하게 보지 않도록 만든다. 일단 수용해버리고 막연하게 존버하면서 ‘언젠가’를 위한 과정으로 오늘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건조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내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오늘이 되면서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그렇게 나는 롱패딩도 없이 긴 겨울의 추위를 수용해버렸었다. 매년 반복되는 겨울들을 치열하게 존버했다. 딱히 해결할 고민도 없이.



# 먼 행복 vs 가까운 불편


행복에는 신화적 이미지가 있다. 완벽한 여건에서,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은 타이밍에, 모든 걸 깨달으며 진리의 눈을 떠야 완성될 것 같은 느낌 말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행복은 반복되는 일상, 그러니까 수많은 오늘들의 합일지 모른다. 오늘의 가치를 높이는 게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신화보다 간편하고 직접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변수들을 하나씩 찾아서 제거하는 것.


막상 그것을 발견하려면 쉽지 않다. 뇌라는 게 적응에 능해서 불편에 적응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대한 목표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거나 업무에 치여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낯선 불편들에도 둔해지기 쉽다. 문제는 내가 인지하지 못할 뿐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누적된다는 것이다. 당장 오늘의 크기는 작더라도 매일 반복되며 쌓이면 무시할 수 없다.


불편을 알아채려면 꽤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짜증을 돋게 하고, 의욕을 떨구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들. 오래전부터 그렇게 지내와서 인지하지 못했던 불편들을 찾아보자. 사소한 것들부터 숙고해야 눈치챌 수 있는 것들까지 다양하게 숨어있다.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하거나 인생 목표 수준의 문제는 장기 계획 폴더에 곱게 넣어둬야겠다. 이 방법의 핵심은 '간단함'이다. 긴 시간 들일 필요 없이 더 나은 상황을 만드는 것.


이를 테면 한 시간 넘는 출근길을 편히 가기 위해 더 일찍 집을 나설 수 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한다. 형태가 바뀌어 하루 종일 두통을 만드는 안경을 전문점에서 다시 조정하거나 더 가벼운 안경으로 구입한다. 귀가 편한 마스크를 고른다. 좋은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팜레스트를 사용한다. 모니터 받침대로 눈높이를 높이고 목의 통증을 줄인다. 숨 쉬는 것 외의 운동을 한다. 지갑의 내용물을 줄여 이동 편의를 높인다. 어떤 건 사소하고 어떤 건 과해 보이지만 모두 내 일상의 불편을 효과적으로 줄여준 시도였다.


그러고 보니 일상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마련하기 어려운 금액이라면 위에서 정의한 불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한편으론 그에 필요한 비용이 일상을 하나의 게임으로 이끄는 유인이 되기도 한다. 불편들을 몬스터로 생각하고, 작고 만만한 녀석부터 하나씩 처치하는 것이다. 레벨이 오를 수록 불편은 줄고 만족은 늘어나니 일석이조. (지갑이 가벼워지지만 그만큼 이동이 편해지니 일석삼조…!)



재미가 붙어 불편들을 모두 제거하다 보면 숨 쉬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반대, 그러니까 모든 것들을 다 받아들이거나 혹은 의식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보다는 낫다. 누군가 그랬다. ‘그래도 스스로 힘든 상태인 걸 아는 건 다행인 게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결국 모든 변화는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되니까.


불편은 행복만큼 멀리 있지 않다. 하지만 행복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오늘이라도 당장, 닿을 수 있다.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후회 방지 대화 사전>,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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