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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22. 2021

기분 나쁘게 듣지 마

기분 나쁜 얘길 할 거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대학생으로서의 첫 학기가 막 저물어가던 날이었다. 동아리 선배가 나를 부르더니 뭔가 결심한 듯 말을 꺼낸다.


“웃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닌데….”


그녀는 안경 너머 미간을 위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자주 웃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면면에 대해 설명했다. 동아리의 분위기, 대학생활, 성인이 된 후의 인간관계 등 다양한 단어들이 들렸지만 내가 기억하는 핵심 내용은 이렇다. 나는 가식적인 사람이었다. 만만해 보일 수 있었다. 실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쨌든 웃는 행위로 인한 결과에는 득보다 실이 월등히 많은 듯했다.


“그러니까 굳이 막 웃고 다닐 필요는 없어.”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장점을 폄하해서가 아니었다.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꺼낸 위로의 눈빛도, 고작 한 살 차이로 세상의 숨겨진 법칙을 알려주려던 말투도 아니다. 심지어 그 모든 얘기가 그녀의 사회적 이득과 연결되어 보일 때조차 참을 만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 답답함이었다. 이 상황에 느껴 마땅한 여러 감정들이 자물쇠 굳게 잠긴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한 불편감이랄까.


원인은 그녀가 초입에 뱉었던 말에 있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
① 지금부터 기분 나쁜 얘길 할 거야. 참아보려고 했는데 말해야겠어.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말하고 싶으니까 중간에 화가 나더라도 말을 끊지 말아 줘. 진지한 표정도 준비했으니까.


만약 그녀가 나의 기분을 헤아리며 뭔가 얘기해주려던 의도였다면 첫마디부터 잘못 선택했다. 그 말 자체가 ‘기분 나쁜 말을 하겠다’는 뜻이니 헤아렸다면 애초에 꺼내지 않았을 터. 작정하고 빡치는 말을 하면서 상대가 느끼게 될 감정까지 묶어두니 듣는 입장에선 황당하기 그지없겠지만 말하는 입장에선 그야말로 신바람 나는 상황이 된다. 세상에, 이렇게 간편한 말이 또 있을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니, 답답해!


예문

상대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주로 사용된다. 가령 후배 직원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진지한 얼굴로 말머리를 채우는 식이다. 기분 나쁘게 들어선 안 되므로 상대는 좀 더 긴장된 상태로 당신의 얘기를 듣게 된다. 꽤 근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주의사항

대부분의 경우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얻으려 하는 건 그리 대단하지 않다. ‘당신이 내 맘에 들게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것 정도.

과연, 그걸 상대가 모를까.    


참고

그것이 긍정형이든 부정형이든 뇌를 자극하는 방식은 같다. 가령 “파란색 하늘을 절대 떠올리면 안 돼.”라는 말 직후에 우리가 하게 될 일은 파란색 하늘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처럼 떠올리지 않으려 할수록 더 떠오르는 현상을 반동효과라고 한다. 이 효과에 따르면, 기분 나쁘지 말라는 요청으로 인해 오히려 기분부터 나빠질 수 있다. 차라리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닐지도 몰라.”가 낫겠다. 혹은 “내 딴에는 깊이 생각해보고 말하는 건데.”와 같이 감정의 대상을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한결 듣기 수월하다.        



< 기분 나쁘게 듣지 마 >

파괴력: ★★☆☆☆
지속성: ★★☆☆☆
찝찝함: ★★★☆☆

유의어: #오해하지말고들어 #나쁜뜻은없어
연관어: #네생각해서하는말이야 #사람들이그러던데
대체어: #기분좋은얘기는아닐지도몰라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소심해서 좋다>, <심리로 봉다방>을 썼습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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