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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Dec 09. 2021

백만 원이 생긴다면



“만약 백만 원이 생긴다면, 뭐할래?”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게는 당장 갖고 싶은 것 몇 가지를 쉽게 답하곤 한다. 전자제품을 산다거나 패션용품을 산다거나.


최근 생활이 빠듯하던 친구는 카드값을 청산한다고 했다. 여행을 가겠다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감사한 분들을 모아 밥 한 끼 사겠다고 한다.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그 공통점은 답변이 꽤나 빠르고 분명하다는 것. 그만큼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액수이기 때문이다.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하려고."


잭이 테이블 위의 감자튀김을 하나 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같이 뛰놀던 시절에는 꽤나 밝은 표정의 친구였는데, 최근 과중한 업무와 부담감 때문인지 미간의 주름도 깊이 파인 것이 인상이 심드렁해졌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리고는 생맥주를 들이켠다. 살얼음과 함께 털어 넣는 모습이 마치 크릴새우 떼를 빨아들이는 흰 수염고래 같다. 한 두 모금 더 집어삼키더니 물었다.


"공짜로 생긴 돈이라는 거지?


"응."


"그럼 뭐... 공과금 밀린 거 있으면 내야지. 걍 둬도 되고. 쓸 일 생기면 쓰게."


역시나 이 돈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눈치다.


"만약 천만 원이 생기면?"


그의 심드렁한 표정이 한결 짙어진다.


"야야, 생기지도 않을 돈 얘기는 왜 하는 거야?"


"그냥 한번 상상해보자는 거지."


경험상 이 질문에서는 답변이 조금 신중해진다. 가용한 자원이 10배로 늘어났으니 말이다.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자연스레 여러 선택지 중에서 우선순위를 따지게 된다.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뭔가 사겠다는 답변이 있다. 고급 노트북이나 카메라, 리클라이너와 같은 수백만 원대 물건들. 또는 PT나 미용 시술, 장기간 해외여행 같이 엄두가 안 나서 미뤄뒀던 것들을 선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천만 원이면 뭐... 흠, 그냥 둘 것 같은데? 필요할 때마다 쓰지 뭐."


잭은 크게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오늘 프로젝트 평가에서 안 좋은 피드백을 많이 들었다더니, 아직 당시의 무드가 남아있는 눈치다. 그가 남은 맥주를 모두 비워내더니 한잔 더 주문한다. 나는 그의 주의가 흩어지기 전에 다시 질문을 잇는다.


"그럼 일억을 갖게 되면?"


질문을 받은 이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이다. 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1억이면 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늘어난 돈에 비해 선택의 가짓수는 줄어든다. 더 낮은 금액에서 했던 이벤트 성격의 선택들은 사라지고, 집이나 차처럼 일상의 만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택을 한다.


저축이나 주식 등 미래의 삶에 대한 투자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 걸 보면 이 금액이 가지는 위치를 엿볼 수 있다. 짧은 기간에 큰 만족을 주기보다 긴 시간에 걸쳐 지속적인 만족감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즉 나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드러나는 곳.


"아까 받았던 백만 원이랑 천만 원도 남아있는 거지?"


"아니, 그냥 별개의 질문으로 보면 돼. 일억이 생긴 거야."


"그렇군. 뭐, 그냥 둘 것 같은데?"


잭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1억이라는 소위 ‘꽁돈 얻는 순간 어떻게든 ' 써보려고' 고민하는데, 그처럼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일상 자체가 만족스럽다는 의미다. 혹은 완전히 깨부술 수 없는 이상 의미 없는 벽에 막혀있거나.


"일억 원을 그냥 둔다고?"


"그래. 뭐... 일억? 그거 생긴다고 이 개 같은 직장을 때려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장 큰 고통 요소인 직장 상사, 그의 표현에 따르면 '팀에서 감당할 수 없는 업무 봇짐을 물고 오는, 밤새 만든 기획안에 '고생했다' 말 한마디 없이 날 선 지적만 하는 팀장, 그러니까 내가 만약 오늘 당장 죽어야 한다면 꼭 같이 데려가야 할 바로 그 팀장 새끼'를 내일 아침에도 만나야 하는 이상, 자신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삶을 한방에 바꿔줄 수 있는 금액이 돼야 그 의미가 발생할 것이다.


"백억은 어때."


"참나- 일억이라도 좀 주고 얘기하던가."


100억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사람들의 답변이 오히려 뚜렷해진다. 먼저 건물이나 땅처럼 삶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자원에 투자하고, 남은 돈에 대해서는 (마치 백만 원에 대해 질문했을 때만큼) 분명하게 선택한다. 비즈니스석을 타고 긴 시간 세계일주를 한다거나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것. 하고 싶던 공부를 하고 관련 업계로 이직을 하는 것 등.


그렇게 점차 금액을 높여가다가, 조 단위가 넘어서면서 점점 더 가슴속 깊이 숨어있던 소망을 꺼낸다. 꿈꾸던 일들, 혹은 꿨었다는 걸 까먹었던 꿈들.


돈 걱정 없이 기부를 하겠다, 야구팀을 인수해서 운영하겠다,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는 시스템을 만들겠다, 전 세계 어디든 편히 갈 수 있도록 집을 사두겠다, 와 같은 규모감 있는 꿈이 있는가 하면, 맛집을 찾아다니겠다, 상담사가 되겠다, 좋은 친구가 되겠다, 와 같은 자기실현적 꿈들도 있었다.



“내 할 말 다하면서 회사 다닐 수는 있겠네.”


잭의 답변은 변하지 않았다.


“100조 원이 있는데?”


“어. 당연하지. 하... 그 답정너 팀장 새끼 고집부릴 때 기 한번 꺾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됐어.”


“이게 어느 정도 돈인지는 생각해본 거지?”


그가 맥주를 허용량보다 많이 삼킨 건지 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답한다.


“뭐, 엄청 큰돈 아니겠어?”


“어, 사실상 돈이라는 자원이 무한에 가까워지는 셈이야."


"야야, 똑같아. 뭐 별거 있겠어?"


잭의 손가락 사이에서 감자튀김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가 그런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냥 지금 이 생활에서 걱정 하나 주는 거지. 돈 걱정."


그가 손에 쥔 감자튀김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눈으로 좇는다. 뭔가 생각하는 눈치다. 혹은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


"잭.”


“아 또 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네 능력이 무한해진다면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무한이라... 그럴 일이 없잖아. 이런 뜬금없는 질문은 왜 하는 거야?"


사실 이런 질문엔 목적지가 있다. 가용한 자원이 무한해졌을 때 상대방이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처음부터 아무런 제약 없이 질문을 던지면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바람과는 다른 답변을 꺼내곤 한다. 순간이동을 한다거나 하늘을 날아다닌다거나, 혹은 돈을 무한대로 만들어낸다거나(이미 제한이 없다니까). 오히려 표면적인 대화로 끝나는 것.


따라서 현실과 닿아있는, 내가 충분히 만져볼 수 있을만한 수준의 조건으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그 범위를 늘려 가다 보면 생각의 흐름이 자신과 가깝게 유지된다. 그렇게 조금씩 제한을 줄이고, 이윽고 자원이 무한해지는 시점에 그 사람이 가진 영혼의 형태가 드러나는 셈이다.


나는 그런 정보를 얻는 것이 매우 즐겁고, 한편으로는 필수적이다.  나에겐 실제로 그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무한한 능력이 생겼다.



능력이 생긴 후엔 기존의 제한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만끽하는 데 집중했다. 실제로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점심엔 밀라노의 Tartufi & Friend에서 트러플 파스타를 먹고 워싱턴 D.C 조지타운에서 컵케이크를 맛볼 수 있었다. 저녁엔 인도양으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뜨거운 석판 위의 고기를 집었다. 갖고 싶었던 모든 걸 샀고 하고 싶은 건 다 했다. 가까운 이들의 산타가 되어 그들에게도 무한에 가까운 기회도 주었다. 마침내 칠흑 같은 우주의 비밀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유했던 것들 모두 언제든 다시 가질 수 있었기에, 점차 고유한 가치를 잃어갔다. 가족과 친구들도 한두 명씩 생을 마감했다. 세상을 내 가치관대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역효과가 일어났다. 그런 의지조차도 점차 사라졌다. 어느덧, 존재의 이유가 희미해졌다.


이맘때쯤 알게 되었다. 무한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소멸하지도 못하고 영원을 자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


나의 존재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의도적인 제한이 필요했다.


그렇게 현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선택하여 살고 있다. 이런 결정을 하면서 다른 능력은 일절 사용하지 못하도록 잠가두었다. 이번 생이 끝나면 다음 생에서 어떤 형태의 인간으로 다시 살아갈지만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좀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성질들을 알아챌 필요가 있다. 이 작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많은 일들을 참고한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다음을 선택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그걸 듣는 게 즐겁다.





비밀이 하나 있다.


신의 능력을 갖게 된 후 나를 그렇게 만든 존재에게 물었다. 왜 나냐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나를 그런 존재로 만든 것조차 잊고 있었다. 아니 기억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알겠더라. 애초에 나에겐 제한이 없었다는 걸. 나 역시 그의 일부로 살아가던 하나의 장면이었다는 것을.


인간의 삶으로 돌아오기 전, 그러니까 약 천 년 전쯤에 나는 향후 인류를 모두 설계해두었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시점에 맞게 탄생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각각의 삶에 아무런 제한과 결과를 설정해두지 않았다. 그들은 또 하나의 나와 같다.


"잭."


"아~ 취한다, 왜?"


"믿기 어렵겠지만 말야...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하~ 너 오늘 왜 그르냐? 삶이 팍팍해?"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처음 같은데."


"흠냐아.. 오늘 술 안 받네."


"네가 가진 그 제한이, 네가 존재하는 이유야."


"뭐래..."


"그걸 다 풀어버리면 너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지니까."


"자꾸 뭐라는 거냐...ㅋ"


"그래서 제한을 스스로 놓지 않는 거야. 존재를 위한 일종의 방어 시스템이거든."


"그래 그래 그래, 알았다 알았어."


"다만, 네가 원하는 삶에 닿기 위해 그 제한을 일부 풀어내고자 한다면…"




할 수 있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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