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에서 피어나는 생명력
글을 꽤 오래 써온 것 같은데-
스스로 작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아직도 어색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작가라 부르는 사람들이 늘었다. 책을 출간했다. 이따금 누군가 내미는 표지에 얼굴 벌게지며 싸인도 했다.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나름 그 범주에 들어간다고 뭉개면서, 직장인 작가의 일상을 돌아본다.
따져보니 그 일상은 주로 세 가지 인격으로 채워진다. 작가인 ‘왕고래’와 서비스 기획자인 ‘아무개’, 그리고 계속 빈둥대고 싶은 ‘인절미’다. 왕고래는 따뜻하고, 아무개는 소심하다. 인절미는 정도가 없다.
작가인 왕고래는 따뜻하다. 주변과 세상을 좀 더 웃게 한다거나 의미를 만드는 일에 열중한다. 그래서 사고의 방향이 대체로 바르다. 생각이 많아서 머릿속에 뭔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날개 없이 도는 선풍기 같은 상태가 된다. 겉보기엔 별게 없지만 안에선 모터가 풀가동되며 한 시간이 일 분처럼 흐르는 시간 여행을 하는 셈이다. 잠들기 전에 이런 순간이 오면 잘 생각은 말아야 한다.
한데 그 순간이 좋다. 솜사탕 기계 속에 모여드는 설탕 입자들처럼 생각이 서로 얽히며 형태를 갖춰 가는 과정이 즐겁다. 이 꺼벙한 눈에도 유일하게 총기가 깃드는 시간이다. 그렇게 모은 생각을 글로 눌러쓴다. 이따금 미간을 좁히거나 입꼬리가 올라간다. 글이 완성되면 몇 번, 다시 읽어본다. 다른 시간, 다른 장면에서 읽는다.
글을 한 숨에 토하듯 밀어 쓰는 작가들을 보곤 한다. 한두 번이야 그럴 수 있는데 늘 그렇게 쓱쓱 써버릴 수 있는 그들이 부럽다. 몇 번을 눌러쓰고 고친 후에 꺼내 보이는 왕고래는 참 비효율적이다. 어쩌겠나, 맘에 들어야 끝낼 수 있는 걸.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에 위로받으면서, 한 글자라도 더 쓸 뿐이다.
기획자인 아무개는 소심하고 예민하다. 사람을 많이 타서 리더나 동료, 협업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큰 영향을 받는다. 마음이 닿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는 말도 많고 까불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겐 곁을 주지 않는다. 사회적인 스킬이 완성된 상태라서 곁을 주지 않는 사람들 조차 아무개가 사람을 가린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경계가 꽤나 분명하다. 그런 것 같다. 생각이 선명하고 깊은 사람에게 끌린다.
그리고 효율에 미친 자다.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습관적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법을 찾곤 한다. ‘걍 하면’ 되는데 늘 고민의 시간을 사용하는 탓에 오히려 비효율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없거나, 면피 전문가, 월급루팡인 사람을 보면 숨이 막힌다. 어디선가 친한 지인에게 누군가를 흉보고 있다면 그 대상은 이들이다.
사회적인 옷을 벗은 인절미. 이 녀석은 정도라는 게 없다. 뭔가 보거나 뒹굴거나 녹아내리기만 한다. 그렇게 가만히 꽤 오랜 시간을 있고 싶다. 꽤,라고 썼지만 그렇게 있고자 하는 욕구에는 제한이 없다. 그래서 정도가 없다. 태고의 생명체처럼 침대나 소파에 붙어서 움직이질 않는다. 마치 본래 그 가구의 일부인 것처럼 그렇다.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인절미 타임을 늘리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절미는 작가 왕고래나 기획자 아무개의 인격이 완성되기 전부터 존재했다. 유전자를 뜯어보면 태초에서부터 이 녀석이 기록되어 있을 것만 같다. 한때 같이 살던 룸메이트는 "너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어"라고 했다. 그 정도로 미동이 없다.
사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안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소용돌이가 칠 때도 있고, 멋진 영화나 글을 보며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충만함을 느끼기도 한다.
세 가지 인격의 공통점이라 할만한 건, 고래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일명 ‘고래템’들을 잘 못 지나친다. 다 살 순 없어도 언젠간 사리라 사진으로 찍어두거나 구매 링크를 저장해둔다. 고래 콘셉트의 키보드를 쓴다. 책상 위엔 키보드 말고도 많은 고래가 있다. 어쩌다 보니 자꾸 늘어난다. 그래서 주변에서도 고래와 관련된 물건이나 장소를 발견하면 ‘여기 고래 있다’며 정보를 보내주곤 한다. 오오, 하면서 본다.
세 가지 인격은 하고 싶은 일이 서로 달라서 일상 속의 지분을 높이기 위해 다투곤 한다. 이 다툼의 균형이 얼마나 잘 맞는가에 따라 일상의 만족도가 결정된다.
잘 맞을 때는 대충 이렇다. 1시간 남짓의 출근 지하철은 왕고래의 시간이다. 핸드폰으로 뭔가 보거나 글을 쓴다. 회사 건물에 들어서면서 기획자 아무개가 된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글이란 걸 써본 적도 없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퇴근 후 귀가하며 다시 왕고래가 된다. 출근길과는 또 다른 몸과 마음으로 글을 바라보게 된다. 집에 와서는 인절미로 늘어진다. 주중은 대략 이렇고, 주말엔 그냥 인절미다.
이따금 생각난 글을 계속 쓰고 싶을 땐 주중 저녁 시간을 사용하고, 연재 중이거나 의뢰받은 글 작업을 위해 주말을 반납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인절미와 사전에 합의를 봐야 한다. 다음 주말엔 미동도 하지 마, 좀 더 사물처럼 있자, 라는 식.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좋은 글은 출퇴근 시간에 끼적이거나 잠들기 전에 생각이 몰아치면서 탄생한 것 같다. 생각이 뿜어져 나올 때는 마치 갓 잠에서 깨어나 방금 전 들었던 로또 번호를 받아 적을 때처럼 그 구성보다는 기록을 잘 남겨야 한다. 나중에 읽어보면 이게 뭔 소린가 싶긴 한데, 그래도 떠오르는 단어와 그것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사고들을 잘 담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아이디어는 당시의 맥락과 컨디션, 가치관이 순간적으로 버무려지면서 생겨난다. 잘 적어두지 않으면 이후엔 떠오르지 않는다. 잘 적어야 로또 번호 하나라도 맞는 게다.
여하간 균형감이 좋을 때는 세 녀석이 서로 겹치거나 충돌을 일으키는 사건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따금 어느 한쪽의 지분이 커지면서 그 균형이 깨질 때가 있다. 예컨대 출판을 위한 글을 쓰는 몇 개월의 시간 동안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왕고래가 점유한다. 일을 하다가도 문득 '아 그 부분을 이렇게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메모한다. 그리고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관찰하는 세포가 24시간 풀가동된다. 누군가의 반응, 대화의 내용, 특정 상황에서의 사소한 행동들, 특히 주변의 유지되던 행동 패턴이 바뀌는 지점들에 더 눈이 간다. 퇴근 후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주말에도 카페 한 구석을 차지하고 미간을 모은다.
기획자 아무개의 점유율이 높은 시기도 있다. 신경 쓰이는 업무나 큰 규모의 프로젝트가 장기간 이어질 때가 그렇다. 이 시기에는 출퇴근 시간조차 왕고래가 존재하기 어렵다. 별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인스턴트 콘텐츠를 보다가 피곤에 눌려 상모를 돌리기 바쁘다.
꼭 업무에 물리적인 시간을 많이 쏟아야 하는 게 아니더라도 마치 출판을 위해 일상 곳곳에서 그 생각을 하듯, 대부분의 순간에 업무에 대한 고민 또는 걱정으로 신경이 쏠려있다. 집으로 와서도 마찬가지. 인절미처럼 푸욱 늘어지다가도 갑자기 떠오른 업무 생각에 텐션이 올라간다. 최근에는 대부분 이런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직장에서의 역할과 책임, 작가로서의 지속적인 집필, 충분한 여유와 휴식. 이 모든 걸 동시에 만족하는 일상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어느 한 가지를 채우기 위해 다른 것들을 반드시 양보해야 한다.
그런데 이따금 반대의 경험을 한다.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나 막막함들이 글을 쓰면서 사라지는 경험. 집필에 대한 압박과 좌절이 업무 안에서의 몰입이나 성과로 해소되는 신기한 경험. 완전히 평화로운 휴식 속에서 업무와 집필에 관한 수수께끼들이 거짓말처럼 정리되는 순간들. 어쩌면 이들은 경쟁자이면서도 서로가 없어선 안 되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이른 아침부터 더위가 느껴지던 출근길, 손가락이 움직여 우연히 시작했던 글은, 일요일 밤인 오늘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