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살 시선 II
40대에 조심해야 할 행동을 알아보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최근의 감상에 따른다. 저번엔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에 대해 적었다. 이번에는 <당신의 스카우터는>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다른 글에 비해 쓰기 어려웠다. 글을 시작할 때 고정해 둔 생각이, 그것을 쓰는 과정에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박 과장이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은 조금 특별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기억법이 있겠지만 박 과장의 그것은, 뭔가 더 직관적이랄까.
"이번 거래처 담당자 있잖아요. 연세대 출신이고, 전에 제일기획에서 5년 정도 일했던 사람."
그는 사람을 기억할 때, 그리고 그 기억을 언급할 때 대상의 학벌과 업적, 사회적 지위 등을 단서로 붙이곤 했다. 그것은 참고사항이 아니었고 마치 '이름'처럼 필수 식별정보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따금 이 식별정보가 기억나지 않으면 중요하게 하던 말이 있더라도 멈춘 후 '아, 그... 어디였지. 거기 다니고 있는데, 그...아…'라면서 별도의 시간을 사용할 정도다. 잠시 후 "아 그렇지 그렇지, 민철 씨가 OO클럽 멤버더라고요. 거기에 OOO대표도 있고, OOO의장도 있어요."라며 개운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본론보다 그 이야기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배경이나 히스토리 비중이 더 높을 때도 많다.
나는 박 과장의 이런 면모를 보면서 '스카우터'가 떠올랐다.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토리야마 아키라'의 역작 <드래곤볼>에서 이 장비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전투력을 측정하는 기기다.
한쪽 귀에 장착하면 그로부터 연결된 렌즈가 눈앞까지 이어지고, 그 렌즈에 상대방의 전투력이 수치로 표기된다. 보통은 악당들이 스카우터를 사용하는데, 자신보다 낮으면 "호오~ 인간치고 그 정도면 높은 편이군요"라면서 여유를 부리고, 자신보다 높으면 “흐익~ 이럴 리 없어!"라며 봐선 안 되는 걸 목격한 표정을 짓는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때도 있다. 예컨대 스카우터로 평상시 손오공의 전투력을 확인한 후 업신여긴다. 하지만 잠시 후 그가 계왕권을 두르자 급격하게 오르는 숫자와 함께 눈코입도 커지는 것이다. (수치가 너무 높으면 스카우터는 박살 나고 만다.)
박 과장도 비슷하다. 성능 좋은 스카우터를 착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스카우터 자체인 것인지, 언급되는 인물들에게 모두 하나의 점수가 있는 것 같은 반응을 더하곤 했다. 그의 기준에서 높고 가치 있는 사람을 얘기할 때는 마치 "마이클잭슨을 모른다고? 진짜야!?"와 같은 격앙된 톤에 가까워지고, 그 반대인 사람을 얘기할 때는 "그렇지 뭐, 인생이 쉽지 않지"와 같이 차분한 톤이 된다.
박 과장의 정보는 정확하며 막힘이 없어 보였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배경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를 스카우터로 사용했을 것이다. 반드시.
박 과장은 내가 수년 전 함께 일하던 과거의 인물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박 과장의 나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 이해되는 행동들이 있는데 박 과장의 그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더라. 그러던 차에 문득, 내 주변에 이런 식의 스카우터를 장착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내가 먹은 만큼의 나이를 주변에서도 먹은 탓일까.
나는 회사 동료들에게 박 과장이 이런 행동을 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저마다 주변에 존재하는 박 과장들을 떠올리며 답을 해주었는데, ‘자신의 인맥을 자랑하려고’, ‘하고 있는 말의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 ‘사회적인 성공에 대한 선망이 있어서’ 등 다양했다. 그런데 모든 답변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박 과장이 그런 배경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대화에서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박 과장의 행동을 보면 ‘학벌이랑 지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게 스카우터를 사용하는 이유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성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는 그 모든 정보들이 마치 부담스러운 꼬리표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으로 소속되었을 때는 다르다. 출신 정보 하나가 열 마디 말보다 설득력을 갖고, 좋은 직장에서 높은 지위를 갖는 이의 말은 그만큼의 신뢰성을 갖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정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 중요성 또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이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나의 동료나 모임에서 처음 마주친 인물이 우연히 카이스트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그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변하지 않을지 따져보면 된다. 나는 왠지 그의 말이 전과 다르게 좀 더 신빙성 있게 들릴 것 같아서... 영향을 받는 사람으로 해야겠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만 굳이 밖으로는 꺼내지 않는 그것을, 왜 박 과장은 입 근처에 달고 사는 것일까. 나는 그가 이런 정보들을 자신의 사회적 자원으로 살뜰히 활용하고자 하는, 동시에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그가 실제로 잘 활용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예로는 자기 발언에 힘을 더하기 위해 관련 인물을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정OO 님도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정OO 알죠? XXX 공동 창업자."와 같은 식이다. 또한 특정 직군의 현재 분위기나 트렌드가 어떤지 알기 위해, 능력 좋은 후배에게 적합한 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동산과 부동산에 대한 투자 정보를 얻기 위해, 구입하려는 고가 물건의 실질적 리뷰가 궁금하여, 대답해 줄 이를 찾고, 문을 두드리고, 대화를 한다.
물어볼 수 없는 거리의 인물이라면 온라인상의 뉴스나 SNS에 드러난 정보를 기반으로 답을 얻기도 한다. 마치 삼국지나 위인전의 인물들에서 영감을 얻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는 법적 조언이 필요할 때 법무법인의 '마케팅' 팀에 재직 중인 사람에게 연락하고, 영상 제작이 필요할 때는 최근 영상 플랫폼 업체의 '재무팀'에 취직한 사촌 동생에게까지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남다른 투지를 가진 자다.
따라서 박 부장이 이런 정보를 수시로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심이 많으니 자연히 더 그럴 것이고,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니 늘 검색 엔진이 예열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 관련 정보를 상기하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이런 발언의 좋고 나쁨을 얘기하긴 어렵다. 나와는 다른 성향이며, 나에겐 없는 능력이며, 영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관계를 이런 식으로 대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 시간을 흘려 겪는 대로 그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좋다. 그 과정에서 지난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도 자연스레 묻어 나오기에, 박 과장의 스카우터를 통해 배경 정보를 듣는 건 별안간 뒷 내용을 스포 당하는 경험에 가깝다. 내 흐름에 맞춰 대상을 기억하는 데 방해를 받는 것이다.
그의 스카우터에 방해를 받는다는 건 나 역시 그 정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비슷한 상황을 자주 겪어온 것 같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그 세대의 어른들이 이런 식의 기억법과 표현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부터 목욕탕 세신사의 자녀까지, 어른들의 입을 거치면 그 배경 정보가 공유되곤 했다.
이것은 나에게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나 자신의 진학에도 부담의 요소로 작용했고, 누군가에 대한 얘기를 할 때도 이런 부분의 단서를 일부러 달아야 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지 마음이 잘 맞아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데, 스카우터를 통과하는 게 순서상 옳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자녀'보다는 '부모'에 가까운 연령대에 접어들었다. 나는 당시 이런 기억 방식이 세대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주변을 보니 이는 노화의 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사회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거치며 되도록 간결하게 타인을 기억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다만 이런 표현의 청자가 후배일 경우에는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당시 내가 어른들로부터 느꼈던 불편을 그들도 겪을지 몰라서다. 딱 떨어지는 학벌 같은 게 아니더라도, 업무 상황의 여러 표현들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옆 팀에 그, 김OO님 있잖아요? 서비스 시나리오 잘 잡으시는 분'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까지 사유의 계기로 다가온 이상, 그 행동을 조심하는 게 맞다.
사실 이번 편은 위의 내용에서 끝이 났었다.
그렇게 다듬는 작업만 남겨둔 시점, 나는 어떤 일을 겪었다. 그 사건은 내가 박 과장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게 했다.
"좋아하는 영화만으로 저를 판단하는 게 별로였죠."
이것은 가까운 동료인 K가 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했던 얘기다. 지금은 좋은 관계이고, 당시에 들었던 생각이나 감정도 모두 풀린 상태여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꽤 불쾌했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우리는 재밌게 대화를 나눴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의 K는 웃고 있지만, 당시 그가 느꼈던 감정은 그 시점에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내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어색한 분위기를 물리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째서 누군가를 불편한 감정에 이르도록 만들었을까.
문득 박 과장의 스카우터가 떠올랐다. 그가 주머니에서 자신의 것과 똑같은 모양을 꺼내서는 씨익 웃으며 내 귀에도 장착을 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왼쪽 눈앞에 놓인 스카우터를 천천히 살펴봤다. 그 안에 있는 게 무엇인지. 당시 내 질문과 이것은 어떻게 닿아 있는지.
당신의 스카우터는?
따져보면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직원이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늘 인생 영화가 무엇인지(한 편도 아닌 두세 편...), 그리고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보았는지 물어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늘 반복되는 일이었기에 내가 그 질문을 하면 동료들은 '역시 이번에도 물어보는 군'과 같은 반응들을 보였고, 그 질문이 나오지 않으면 '왜 안 묻지?'와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곳에 긴 시간을 머물게 되면서 '인생 영화'는 우리 팀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의례적으로 답해야 하는 공식 질문 같은 성격을 갖게 된 것 같다. 당사자가 이런 상황을 미리 알고, 내 질문을 면접 같은 고정된 성격으로 이해했다면, 자신을 처음부터 특정 범주에 분류하려는 시도로 느껴질 수 있다. 마치 "학교는 어디 졸업했니"처럼 말이다.
딱히 억울하진 않다. 나는 실제로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 리뷰를 쓰고 있는 이유도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서로가 거쳐온 영화에 대해 나누는 것도 즐긴다. 그렇다 보니 상대가 좋아하는 영화를 얘기하면 그 영화와 당사자를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도 맞다. 나와 취향이 가깝거나 혹은 정반대의 특이한 영화를 본 사람들을 더 궁금해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아직 못 본 영화를 인생작으로 꼽으면, 그 영화를 보면서 상대방을 헤아릴 때도 있다. 학벌이나 출신 정보는 고사하고, 생일이나 나이 같은 것들도 (몇 번을 들어도) 기억을 잘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했던 영화는 기억이 난다.
비슷한 예로 하나 더 고백하자면, 나는 유머 수준이 높은 사람을 좋아한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화의 맥락이나 복선을 이해하고 흘리듯 뱉은 유머를 캐치하는 대화를 하면 참, 기분이 좋다. 유머러스함은 노력으로 쉽게 얻어지지 않는, 인생의 태도이자 이 사람의 모양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에게 유머러스함은 상대방의 모든 면모를 압도하는 가치를 지닐 때도 많다.
이런 식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흥미를 느끼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내 스카우터도 꽤 많은 것들을 측정하고 있었다. 박 과장과 수집하는 정보나 사용 빈도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 렌즈 너머로 상대방을 보면서 '호오', '흐익' 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것들은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틈을 타서, 혹은 신경을 쓰지만 그것을 뚫고 밖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K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더 있을 것만 같다.
스카우터 자체를 나쁘다고 보긴 어렵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누구나 추상적인 것을 범주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스카우터가 주로 어떤 정보 측정하고 수집하는지 아는 건 중요하다. 그것을 알아야 내가 누군가에게 스카우터를 들이미는, 적어도 상대가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 일이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