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이 되려면 II
"총명함이 사라졌어요."
팀장이 업무 실수를 한 뒤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빗대어 '총명'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될 만큼 똑똑하고 실수가 없는 게 사실이다. '복제 AI설'이 있을 정도다. 본체가 쉴 때 AI가 대신 일하고, AI가 충전할 때 본체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많은 양의 업무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며 실수도 적다.
평소 그다지 쉰소리를 하는 타입도 아니기에 나는 그녀의 말에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총명함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내가 공감한 것은 그것이 ‘사라진다’는 말 자체다. 마흔을 넘긴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꽤 자주 사용하는 것을 목격했고, 나 역시 왕왕 뱉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도 이런 식의 표현을 하지만 보통은 자신의 현재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다. 이를테면 "저는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쁠까요."라는 식이다. 그 말에는 왕년이 없다. 어떤 노력을 하는가에 따라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있다.
반면에 마흔 너머의 표현은 변화를 담고 있다. "머리가 나빠졌다", "이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와 같은 식이다. 이것은 한 번의 상황이 아니라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발현된 말이다. 실제로 머리가 좋고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던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전과 같은 노력과 시간으로 예전만큼의 무언가를 해낼 수 없다는 것. 모른 척 하기엔 이 상황은 너무 선명하게, '실제로' 일어난다. "원래 이런 적이 없었는데, 슬프네요." 팀장은 매우 드물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불안을 감춘 단호박들
어른이라고 무조건 공경하기보다는 어른이어도 할 건 해야 하는 시대다. 지난 업적에 기대 손가락 끝을 휘두르다가는 오래가지 못하고 그 영광마저 빛이 바랠 것이다. 당연하게도 현재의 역할을 기준으로 해내야 한다. 그런 나를 본보기로 삼거나 의지하는 이들이 늘어나며, 그만큼 내가 제 역할을 하는지 판단하는 이들도 많아진다. 하지만 이놈의 뇌는 예전만큼 모든 시냅스가 부지런히 연결되며 빛을 내지 못한다. 마치 하드웨어 사양이 낮은 컴퓨터에서 복잡한 연산을 시도할 때처럼, 나는 크고 작은 버퍼링을 일으키며 우스꽝스러워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이 증가하는 건 나 자신이다. 주변에서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 발언에 대한 판단이 흔들리면서 동료와 후배들의 시선이 더 신경 쓰인다. '혹시 나를 못 미더워하진 않을까?', '신뢰를 잃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커진다.
문제는 그로 인해 오히려 더 단언하는 말투를 쓰게 되는 것이다. 불확실해진 내 판단을 단호박 태도와 강한 어조로 포장하는 셈이다. 마치 청력이 약해진 어르신이 오히려 큰 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특히 내 의견에 대한 반대 의견, 특히 후배들의 그것을 나에 대한 도전이나 의심으로 받아들이고 논의가 아닌 일종의 대결 모드를 만들고야 만다. 내 패가 더 강하다는 주장에만 몰두하고 우긴다. 논리가 딸릴 때는 그들을 (최신 트렌드를 알고 있고 두뇌 회전도 빠른 그들을) 나보다 경험은 적은, '아직 뭘 모르는 애들'이라며 스스로 세뇌하기도 한다. 이도저도 안될 때는 필승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다. 나이나 직책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나는 이 모순적인 상황을 오늘도 목격했다.
'아닌가?'를 말하는 용기
나 역시 비슷한 실수를 한 적이 많다. 언젠가 팀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입 직원 K가 내 기획안과는 다소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그 순간, 마치 내 판단력을 지적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직원들 앞이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반대 의견을 냈다. 당시엔 미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나는 무의식적인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회의가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K의 제안이 꽤 괜찮았다. 결국 그를 따로 불러 내 판단이 성급했음을 인정하고, 아이디어를 더 구체화해 다음 회의 때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 회의 시작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번에 이 아이디어를 반대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꽤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좀 더 구체적인 안을 요청했습니다." 실제로 그의 안건은 프로젝트에 중요한 가치를 더했다. 만약 내가 그때의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K는 좋은 아이디어를 드러낼 기회를 놓쳤을 것이고, 프로젝트의 완성도도 떨어졌을 것이다.
그 일 이후 나는 대화 중에 내 의견에 대해 "아닌가?"라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때때로 모호해지는 내 판단을 되돌아보고 검증하기 위한 시도다. 동시에 불안을 감춘 단호박 태도를 호박죽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이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 모습이 다소 엉성하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경험상 그곳의 대화를 더 가치 있게 만들 때가 많더라. 더 많은 팀원들이 의미 있는 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팀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됐다.
톱니바퀴의 크기
사회는 차갑다. 회사도 차갑다. 그 안에서 '아닌가?'와 같은 말을 하는 건 마치 내 능력이 낮다는 걸 반증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좋은 선배나 어른 타령을 하다가 오히려 역할이 줄어 뒷방 늙은이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업무적인 노력과는 다르다.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의 문제다. 좋은 어른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답을 찾도록 돕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존재를 향하므로,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빈틈이 드러나도 괜찮다.
어느 날 동료가 들려준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사회 속 한 개인이 갖는 역할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것은 톱니바퀴에 대한 대화였다.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요만한 일이 왔어요."
“그래서 속상하니?"
“네, 제 가치가 낮아진 것 같아요.”
“그렇구나. 내가 관리자 생활을 오래 했잖아. 회사는 일을 엄청 잘하는 사람만 필요하지 않아. 그런 사람을 큰 톱니바퀴라고 한다면, 그것과 여러 크기의 톱니바퀴가 맞물려야 일이 되거든. 아주 작아 보이는 톱니바퀴라도 그게 없으면 문제가 생겨.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작은 톱니일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너여서 그 톱니바퀴의 일을 주는 게 아니야. 그 일을 해야 하는데 네가 있었던 것이지. 그러니 톱니의 크기는 너라는 개인의 가치를 대변하지 않아.”
이 얘기를 들려준 동료뿐만 아니라, 나도, AI 복제설이 있는 팀장도, 그 톱니바퀴는 점점 더 작아질 것이다. 더 효과적인 톱니와 고강도를 지닌 이들이 우리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어떤 존재를 향하는가에 따라 톱니바퀴의 길이는 더 길어질 수 있다. 마치 연필처럼 길어진 그것은, 전면의 톱니바퀴들에 가려진 다른 수많은 톱니와 맞물려, 크고 작은 그것들의 회전을 돕게 될지 모른다. 넘겨봐야 겨우 보이는 꽤 깊숙한 곳까지.
그것은 한 개인으로써 꽤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