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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Sep 02. 2024

입부터 닥칠 것, 좋은 어른이 되려면


퇴근 시간이 되면, 회사 화장실 세면대에 각종 커피 브랜드의 일회용 컵들이 모임을 갖는다. 직원들이 퇴근길에 엘리베이터 옆 화장실에 들러서 남은 음료를 버리는데, 사무실로 돌아가 빈컵을 처리하는 게 번거로워 슬쩍 두고 가는 것이다. 빈컵은 그나마 양반이다. 남긴 음료를 그대로 두고 가는 이들도 있다.


세면대를 차지한 컵들을 보며 인간이 가진 양심에 대한 의구심을 느낀다. 다들 배울 만큼 배우고 좋은 직장에 와서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나는 아무리 급하고 바쁜 일이 있어도, 심지어 상사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도 그 컵을 세면대에 두지 않는다. 후다닥 사무실로 돌아가 휴지통에 그것을 버린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한가해도 이미 놓여 있는 컵들을 치우지 않는다. 다른 컵 몇 개를 내 것과 겹쳐서 갖고 갈 만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딱 그 정도의 인간이다.


훌륭한 인간이 되는 건 쉽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신념이라든가 올바른 도덕적 가치관, 이를 위해 어느 정도 타고난 인격과 성장기의 배움 등 짧은 시간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딱 그 정도'인 나는 훌륭한 인간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 어쩌면 글렀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다. 내가 꼭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무결하지 않아도, 후배들에겐 도움이 되거나 본받을 부분이 있어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한 방법은 고민해 봄직하다. 실제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별개로, 나를 참고하는 후배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 역할에 맞게 효과적으로 존재하는 어른 말이다. 요구되는 행동들이 있을 것이다.


그 첫 번째 조건은 입부터 닥치는 것이다.

입만 다문다고 좋은 어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는 그에 다가설 수 없다. 이 글의 제목은 사실 ‘입을 닫을 것’이었다. 웬만한 각오로는 되지 않아서 '닥칠 것'으로 바꿨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대학원 시절 조교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담당 교수님은 백발이었으며 머리숱이 적었다. 얇고 고불거리는 그것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는데,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타임머신을 개발한 에메트 브라운 박사를 떠오르게 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분위기를 제대로 풍기고 있었달까.


그런데 교수님의 이런 특별한 외모보다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 어마무시한 발화량이다. 그는 1분 분량의 내용을 10분 동안 얘기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 시간 동안 숨을 (매우 빠르게) 들이마실 때 외에는 말이 끊기지 않았다. 1분 분량의 내용이 이 정도니, 10분 분량의 내용을 모두 들으려면 상당히 긴 시간과 많은 참을성이 필요했다.


그가 짧은 말도 길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마다 "그르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무슨 말인지 알겠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다리를 잇는다. 또는 "그르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무슨 말인지 알겠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다리를 잇는다. (같은 문장이 두 번 반복되었다는 걸 알아챘다면, 대략 이런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업무 초반에는 중간중간 생겨나는 질문을 하곤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질문은 사라졌다. 그것은 긴 서사의 어딘가에서 반드시 전달될 내용이었고, 무엇보다 나의 질문은 그를 더 각성하게 만들어 "그르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무슨 말인지 알겠어?"를 더 자주 등장하게 만들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잘 답변하면서 그의 마른 호흡들을 모두 귀에 담는 요령이 생겼다.


"말을 줄이라고..? (왜..?)"


나이를 먹으면 왜 말이 많아질까.

어쩌면 말의 총량은 줄어든 게 아닐지도 모른다. 말을 할 수 있는, 나를 궁금해하거나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장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자연히 하나의 장에서 뱉는 양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말할 기회가 생기면 눈이나 귀보다 입이 먼저 열리고, 예상보다 많은 말을 뱉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밀린 숙제 하듯 말을 하다 보니 그 내용은 상대방보다 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배고픔과 기쁨에만 집중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설령 상대방을 위한 말이어도 마찬가지다.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을 줄이기 위해 기억할 한 가지는 ‘그것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일단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까 봐, 나에 대해 얘기할 기회에 들떠서, 그저 눈에 잡히는 무언가로 인해 입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입을 다시 닫는 것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말을 줄여야 하는 네 가지 이유


1. 내 혈관에는 꼰대력이 흐르고 있다.

"내 혈관에는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다." 코카콜라의 회장 로베르토 고이주에타의 말이다. 혈관에 그것이 흐를 만큼 몰두했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인데, 이 말에 따르면 그의 존재는 지난 모든 시간의 결과인 셈이다. 그가 나누는 대화는 혈관에 흐를 만큼 진한, 이 콜라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이를 먹으면서 콜라 대신 쌓인 게 있다. 이것은 원칙의 중요성을 알려주었고, 가벼운 행동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이 모든 것은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다.


그래서 특히 후배나 손아랫사람과 대화를 할 때, 취향이나 선호보다는 옳고 그름의 입장에서 말하게 된다. 나에게 중요한 그것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농담으로 넘기는 장면이 눈이나 귀에 딱 걸리면서 '저러면 안 되는데'라는 반응이 반사적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매우 쉽고 빠르게 어느 말에 담겨 배출될 것이다.


기존의 방법에만 치중해 대화하는 것. 세상은 그것을 꼰대력이라고 부른다.


2. 가볍게 뱉을 만큼 가볍지 않다.

사회 초년생 시절, 상사가 내 문서를 보면서 “여기를 이렇게 바꾸는 게 낫지 않나...”라는 말을 흘렸다. 나는 그의 말대로 기획안을 모두 수정했다. 얼마 뒤 그걸 본 상사는 기존 안이 더 좋았는데 왜 수정했냐고 했다. 회의 당시의 일을 언급했다. 그가 말했다. "에이~ 그건 고민하면서 그냥 한 말이지."


나이를 먹으면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의 무게가 커진다. 특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다가설수록 더 그렇다. 아무 대화에나 껴서 이 말 저 말 뱉어버린 다면 설령 그것이 농담이라도 그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3. 80년생이기에 더 그렇다.

후배들은 디지털 네이티브, 쇼츠 세대다. 즉각적인 자극과 보상을 원한다. 유려한 맥락 속에서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이솝 우화 같은 말을 듣고 있으면 10초 만에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라고 외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내 말이 재밌다면 끝까지 즐겁게 듣겠지만, 그럴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꼭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리듬과 호흡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디스코팡팡 위에서 진실 게임을 하는 느낌이랄까. 짧게 말하는 법을 늘 고민해야 한다.


4. 입을 닫아야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다른 게 열리기 때문이다. 눈과 귀를 통해 후배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 목소리가 들린다. 내 안의 지난 역사가 형성해 놓은 익숙하고 견고한 사고체계 너머의, 실제로 그들이 느끼고 해석하고 뱉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경청의 중요성과 같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입을 다물고 견뎌야만 후배들이 입을 열 수 있다. 그들의 솔직한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은 작지만 귀중하다.



마치며


백발 교수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연구분야는 독특한 것이었고, 괴팍한 성향 덕에 다가오는 이도 적었다. 그만큼 나는, 그가 하루 중 자신의 말을 쏟아내는 장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은 나에게 고통이었다. 나는 조교 생활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긴 시간이 흘러 말이 많아진 요즘, 문득 나에게서 그 교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후배들은 당시의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오늘도 회의 시간에 긴긴 말을 뱉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열리는 입을 한 번 더 닫고, 어렵사리, 좋은 어른에 다가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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