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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Aug 05. 2024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

40살 시선 I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이미 알던 사람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은 반복되는 일이다. 긴 시간 반복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타인의 행동을 겪으며 내가 그것과 같은 행동을 했을 때상대방이 경험하게 될 일을 체험한다. 혹은 그걸 알면서도 지속해오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경험을 한 뒤로는 그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10대 때는 느닷없는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하거나 나에게 이로운 면을 강조하면서 말을 이어가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 밖에 없었다. 그런데 20대엔 그런 사람을 되려 경계하게 되더라. 이런 대화의 끝에선 다른 속내를 드러내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상대에게 원하는 게 있을 때 이런 화법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편 이런 경험의 반복은 반면교사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에겐 좀처럼 없는 면모이지만 혹시라도 그에 가까워지지 않도록 경계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로토타입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예로, 20대 때는 ‘자신이 솔직하고 뒤끝 없다’며 타인에게 거센 표현을 하는 사람을 소위 '쿨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대쯤엔 그냥 무례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자신에 대한 비판은 견디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 쿨함에는 쿨하지 않은 전제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40대에 더 도드라지는, 그렇기에 조심해야 하는 행동을 몇 가지 꼽아 보았다. 그간 느낀 점에 대해 분명한 프로토타입을 만들기 위한 시도다.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행동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


‘할 수 있다’는 말은 의지와 자신감을 담고 있는 좋은 표현이다. 특히 젊은 시절의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암시이며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 <타짜>의 정 마담이 양손으로 총을 움켜쥐며 외치는 “쏠 쑤 이써어어!”가 조금 다른 느낌인 것처럼, 이런 태도는 언제 어떤 맥락에서 취하는 가에 따라 다른 성격을 갖는다.



주변에 ‘한다면 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이 결심하면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두 명 있다.


먼저 R군.

몇 해 전 그가 영어 실력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는데 최근까지도 매일 일정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있는 걸 알았다. 우연히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상 그에게 더 이상의 노력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한 번은 체중 관리를 해서 몸짱이 되겠다더니 두 자릿수 감량 후 다른 형태의 사람이 되었다. 그 결심을 하고 1년 뒤의 결과였다. 이 두 가지가 워낙 이루기 어려운 일이라서 예로 들었을 뿐 R군이 자신의 결심을 현실 세계의 결실로 이끌어낸 일은 더 많다.


이처럼 R군에게 있어 결심이란 ‘긴 시간’ 행하는 것이고 하루 이틀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무작정 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을 꺼내는 일이 드물며, 혹여 꺼낸다고 해도 그런 결심이 실제로 의미 있는 윤곽을 드러낼 때쯤에 한다. "하는 김에 끝까지 해보고 있죠 뭐." 대체로 이런 식의 톤이다.


다음은 F군이다.

그가 이 말을 뱉은 시점은 여러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진행상황을 체크하고 그의 컨디션도 알아볼 겸 F의 자리로 가서 대화를 시도했다. F는 나와의 대화가 편해서 속마음이 튀어나온 건지 아니면 그만큼의 화가 차오른 건지 '이런 식으로 많이 요청을 하면 (처리를) 하나도 안 해주고 싶다'라며 업무 피로도를 표현했다.


나는 자신의 직무나 역할을 마치 하나의 권리인양 말하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있는 편이다. 그 태도는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깎기 위해 "흐이? 왜 이렇게 비싸요?"라고 밑밥을 까는 것과 같아서다. 그것을 본 대화에 앞선 준비운동으로 받아들인 후, (상대방뿐만 아니라 누구나 쌓여있는) 과업의 우선순위를 기반으로 교통정리를 하면 대체로 잘 풀린다.


문제는 다음 말이었다. 그는 퇴사를 언급하면서 만약 (퇴사를) 하게 된다면 관련 서비스의 소스코드를 모두 삭제해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뭔가 허전하다고 느꼈는지 한 마디를 더 보탠다.


"나는 한다면 해요. 할 수 있어요."


그 말은 F의 굳건한 각오를 보증하고 있었다. 쏠 수 있다는. <타짜>의 그녀만큼이나.


이후 언젠가 그가 술에 취해 자신의 여자친구와 통화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의도적으로 들은 게 아니라 워낙 크게 대화하고 있어서 내 귀까지 맘대로 도달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여러 차례 짜증인지 비명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가 오간 후에 그가 야, 야, 라는 외침과 함께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반응은 듣지 못했지만, 그는 나와의 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결심이 작지 않다는 걸 증명했다. "오빤 한다면 해. 못할 것 같아?”


 F는 자리로 돌아와서 잔에 있던 소주를 털어 넣었다. 잠시 분을 식히고는 '여친과 헤어졌다'라며 (이미 통화 내용으로 모두에게 알렸던) 소식을 전했다. 누군가 말했다. 헤어지다가 또다시 만나고 그런 일도 많지 않냐고, 내일 술 깨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그러자 그는 정색하며 말했다. 자신은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사실상 마지막 통화를 한 거라고 말이다.


얼마 뒤 나는 그가 여자친구와 여전히 잘 만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R과 F의 차이


두 사람의 ‘할 수 있다’는 태도에는 여러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말투나 내용에 앞서, 이러한 차이는 그 말을 뱉는 '시점'에서 이미 다르다. R은 결과가 어느 정도 드러난 시점에 과거형으로 이 말을 하는 반면, F는 시작하기 전에 미래형으로 뱉는 것이다.


이런 시점 차이는 그 의도의 차이를 잘 나타낸다. R에게 '한다'는 건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결심이다. 손익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이 현실로 이뤄진다는 건 당사자에게 큰 이익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조건이 없고, 반드시 실행 전에 뱉어야 할 이유가 없다. 말 그대로 그것을 매일 할 뿐이다.


반면에 F에게 이것은 자신을 비롯하여 그 주변을 파괴하는 다짐이다. 그 크기를 얼마나 인정받고 싶은가에 따라 가까운 관계부터 자신의 신상까지 배팅의 과감함이 결정된다. ‘마음만 먹으면 이것쯤이야 털어버릴 수 있다’라는 식으로 그 의지를 공고히 하는(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다짐이 실현되면 가장 손해를 보는 이는 F 당사자다. 따라서 그 안에는 늘 '네가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말이지'와 같은 조건이 숨어 있다. 앞서 R에게 있어 이런 결심을 위한 도전 대상이 과거와 현재의 자신이라면, F에게 그것은 숨어있는 조건을 받아들일 상대방이다. (정 마담의 격발 여부가 고니에게 달린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짐도 공표도 F가 했는데 그 결정권은 상대방에게 있는 셈이다.


또한 F의 결심, 달리 말해 그가 파괴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한 예로 내가 지금부터 성냥개피를 정교하게 겹쳐 쌓아 2미터 높이의 빌딩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을 만드는 데 3일이 소요됐다. 자, 이제 이것을 언제든 이단 옆차기로 박살 낼 수 있다. '행위' 자체만으로 봤을 때, 쌓은 노력과 시간에 비해 그것을 부수는 건 무척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설령 내가 애초부터 공든 성량탑을 무너뜨리는 걸 보여주기 위해 쌓았다고 한들, 목표한 크기만큼 완성했다면 무너뜨리고 싶지 않을 확률이 높다. 지난 시간으로 인해 그것이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F군의 다짐으로 지목되는 것들은 자신만의 탑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온전히 자신의 것만 파괴하는 건 겁이 나서, 혹여 그것에 관심 없는 상대방이 내 다짐을 허락할까 봐, 다른 사람의 노력으로 형태를 갖춰가는 것들을 포함하여 엄포를 놓는 게다. 그거 내가 부술 수 있다고. 말 그대로 말만 쉽다.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


현재의 나는 '지난 시간의 합‘이다. 이 당연한 진실은 예상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내 모습에 드러나 있다.


만약 당장 내가 무언가에 대해 ‘할 수 있다’는 말을 뱉으면 어떻게 될까. 오랜 시간 함께했던 관계라면 어렵지 않게 그것의 진위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도 내 표정과 말투에 묻어 나오는 몇 가지만으로 알아챌 수도 있다. 즉, 내 의지의 크기도 현재가 아닌 지난 시간으로 판단될 것이다. 나는 당장 한 두 마디 말을 덧붙인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긴 시간의 꼬리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내가 즉시 취할 수 있는 행동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룰 수 있을지를 따져보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당장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 고민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렇게 더 많은 과거를 품을수록 중요해진다. 혹여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젊은 시절의 치기를 빌어 할 수 있다고 말해 버린다면, 두 걸음 뒤쯤 그것이 얕은 허풍이었다는 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결심에 대해 반드시 R군처럼 이룬 후에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그것을 시작하면서 가까운 지인에게 미리 알리는 편이다. 이런 공유는 그 자체로 사회적 동기를 발생시켜 목표 달성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실제로 체감한 경우도 많다. 반복하는 시간 속에서, 이따금 지칠 때, "저번에 말한 건 잘 되고 있어?"와 같은 질문으로 재충전되었던 경험 말이다.


따라서 내가 이룰 일의 예고편 자체는 긍정적인 효과를 충분히 갖고 있다. 요는 조건이다. 그것을 본 상대방의 태도에 내 결심이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 R(real)과 F(Fake)가 갈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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