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이번 편은 꽤 길답니다...! (>_<)
"수아님, 거기 어땠어요?"
"어디요?"
"그 용산역 골목에 있는 카페요."
"아~ 저는 좋았어요. 맛있고 분위기도 완전 좋고."
팀 미팅을 앞둔 직원들의 대화다. 이들은 서로의 주말과 최근 일상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나만 빼놓고 늘 일상 대화를 따로 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도 맞겠지만) 나도 엊그제 강원도에 가서 울산바위의 장엄함을 눈에 담고 왔는데, 왜 나에겐 묻지 않는 것일까.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내가 인스타그램, 즉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관계망’에 포함되지 않기에 (굳이 입을 열어서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이뤄지는) 일상 공유에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어느 날 팀장들과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마침 네 명 모두 80년생인 걸 깨달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들도 나처럼 인스타그램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다음은 "인스타 하세요?"라는 질문 후에 이어진 답변들이다.
A: "아니요."
B: "안 해요."
C: "계정은 있어요."
A: "저도 계정은 있을 걸요?"
B: "저도요. 예전에 만든 적 있어요."
나도다. 계정은 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명확하게 구분하긴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용하지 않는' 유저에 속할 것이다. 글 서두의 '관계망'을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모두 90년대생이다. 그 관계망에 포함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나는, 80년생이다.
그런데 세대별 SNS 이용 현황(KISDI ICT, 2022)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80년대가 속한 밀레니얼세대의 이용률이 83.5%로 가장 높았고, 이어서 Z세대 72.6%, X세대 65.6%, 베이비붐세대 28.7% 순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나를 포함하여 주변의 동년배들 중에서는 SNS를 하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운데, 어떻게 83.5%라는 수치가 나온 것일까.
사용 시간을 보면 이 수치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하루 1시간 이상 사용하는 유저의 비율을 보았을 때, (사용량이 높았던) 밀레니얼 세대의 비중이 25.5%인 반면, Z세대는 39.1%로 더 높았다. 즉 적극적인 사용자의 비중이 Z세대에서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1980년생은 X세대와 밀레니얼 세대 사이에 모호하게 끼여 있으니, 아마 조사 단위를 80년생 전후로 묶어서 비교해 보면 다음 세대와의 차이는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참고
- 베이비붐 세대: 1955~1964
- X세대: 1965~1979
- 밀레니얼 세대: 1980-1994
- Z세대: 1995-2010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약간의 경험적 뇌피셜을 더해 본다면, 80년생들은 SNS를 설치만 해두고 보지 않거나 1시간 이내로 하는 소극적 유저의 비중이 약 80%에 달할 것이다. 그리고 SNS의 범위를 인스타그램으로 좁힌다면 이런 비중은 더 높게 나타날 것이다.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누었던 이들처럼 말이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이들은 왜 굳이 설치해 두고 찍먹만 하는 것일까. 나이가 많아서, 별 관심이 없어져서,라는 뱉기 쉬운 이유들이 있겠지만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1980년생이 겪어 온 SNS, 즉 소셜미디어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이런 패턴을 보이는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TV는 사랑을 싣고
소셜 네트워크라고는 회식과 반상회만 있던 시절, 당연하게도 소셜 미디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엔 연예인의 인간적인 관계망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종의 '간접적인' 소셜 미디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는 <TV는 사랑을 싣고>가 있다. 유명인의 학창 시절 지인이나 첫사랑, 은사님을 찾아주는 포맷이다. 먼저 찾으려는 인물과의 인연을 재현 배우 영상으로 보여준다. 다음으로 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수소문하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영상 막바지에는 그를 찾던 그렇지 못했든 화면이 뿌옇게 변하면서 종료된다.
그러면 출연자는 초조해하며 스튜디오 중앙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초조함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그를 찾았을지', '찾았더라도 나를 만나러 이 무대에 나와주었을지', '나오더라도 나를 기억할지'와 같은 것들이다. 지금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실제로 지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었고, 찾았더라도 기억을 하지 못할 때도 왕왕 있어서다.
진행자가 "하~ 찾은 걸까요? 오셨을까요?"라며 분위기 잡는다. 그의 안내에 따라 출연자는 따라 무대 뒤편을 향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지금도 여러 영상에서 쓰이는 전설의 BGM <The Power Of Love>의 후렴구가 흘러나온다. 스튜디오에 등장한 지인과 출연자가 재회하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백미였으며, 특히 어린 시절 도움을 주셨던 어른이나 은사님을 찾는 회차들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참 많이 울었다...)
[보기] "TV는 사랑을 싣고" 재회 장면 (이영애 편)
[보기] "TV는 사랑을 싣고" 재회 장면 (윤복희 편)
옛 친구나 첫사랑을 찾는 편들이 주는 날것의 재미도 있었다. 많은 카메라가 있는 무대로 나온 지인이자 일반인이, 오랜 시간 동안 못 봤던, 사실상 남처럼 느껴지는 연예인을 상대로 뚝딱거리는 장면이 꿀잼 포인트랄까.
[보기] 무대로 나온 친구가 출연자가 아닌 MC에게 달려갔던 전설의 해프닝 (전혜진 편)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출연자는 최수종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의 은사님을 찾기 위해 출연했다. 다른 회차와 마찬가지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제작진의 탐색 과정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의 은사님은 8년 전에 돌아가신 후였다. 최수종은 "친구들도 다 기다리고 본다고 그랬었는데... 나오지 말라고 그러죠..."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했고, 긴 시간을 울었다.
<TV는 사랑을 싣고>는 KBS에서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약 16년간 총 805회 방송된 장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당시의 연예인들은 TV나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는, 지금에 비해 아득히 먼 어딘가의 분리된 존재였다. 그런데 이 프로에서 누군가를 찾지 못할까 봐 초조해한다거나, 찾아서 나타난 그와 포옹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친숙하고 인간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또한 TV에서조차 내 관계망에 있던 사람을 찾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으니 당시 일상에서의 그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전화번호를 갖고 있거나 혹은 자주 왕래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의 소식을 알거나 소통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다. TV를 통해 소셜 미디어를 체험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이러브스쿨에서 다모임
인터넷이 서서히 지평을 넓혀가던 1999년 말, 연예인이 아니어도, TV에 출연하지 않아도,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옛 추억을 함께 했던 친구나 선후배를 찾을 수 있다“라고 표방하는 웹사이트가 등장했다. 처음엔 <아이러브스쿨>, 이어서 <다모임>이 등장했는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학교와 관련된 사람을 모아준다. 해당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의 조회하여 최근의 근황을 알 수 있고, 연락도 매우 쉽게 시도해 볼 수 있었기에 정말이지 센세이션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인터넷‘이 가진 파급력이나 가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직접 만날 필요 없이 여러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소통이나 게임을 하는 가상공간 정도로 알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를 통해 인터넷이 가진 진정한 의미(여러 통신망을 하나로 연결하는 ‘인터 네트워크 inter-network')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가진 '네트워크'의 힘을 실감했다. 인터넷은 그 가상공간 안에서 임의로 만든 그룹뿐만 아니라, '같은 학교'처럼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관계나 단서로도 사람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마법 같은 일이었으며, 최초의 소셜 미디어 경험이기도 했다.
두 서비스의 폭발적인 인기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추억 속 인물과 재회했다.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 경험이기도 했다. 기억 속 장면과 실재가 다소 달랐기 때문이다. 외모이든 혹은 대화의 결이든 한두 번의 신선했던 재회 경험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남기기 어려웠다. 물론 과거 짝사랑했던 이와 연인이 된 행운아도 있었지만, 못 다했던 고백을 던졌다가 낭패를 본 이들이 더 많았다. 나는, 아니 사람들은 깨달았다. 추억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묻어두는 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싸이월드
싸이월드는 2002년에 등장한 서비스다. 미니홈피라 불리는 개인 페이지를 꾸미며, 배경음악을 설정하여 자신을 표현한다. 그곳에 기록한 사진이나 일기 등으로 지인들과 소통한다. 이는 디지털 세계에 나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구축하고, 사회적 관계망을 만드는 경험을 주었다.
싸이월드는 '아이러브스쿨, '다모임'을 포함하여 SNS의 무늬를 갖추려던 기존 서비스들을 모두 압살하고 대표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전성기 시절의 이용자 수가 4천만 명이었으니 노년층과 영유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한 셈. 미니홈피의 배경음악 차트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의 IT역사를 갈랐다는 표현이 딱히 과하지 않다.
그 인기는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 자리를 내주며 사그라들었지만, 80년대생에게 가장 임팩트 있는 SNS를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싸이월드라고 답할 것이다. 그만큼 많은 추억과 감정이 그곳에 담겨 있다.
1980년생의 소셜미디어
이런 시간을 보내온 80년생들은 이제 왜 SNS를 하지 않는 것일까. 주변에 그 이유를 물었고, 답변을 아래의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1. 쓸데없는 정보의 과잉 제공
2. 내 정보의 무분별한 노출
3. 과시와 비교로 인한 좌절감
4. 오프라인 관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5. 시간 낭비라는 생각
6. 걍 귀찮음
대체로 공감한다. 그런데 목록을 읽다 보면 이상하게 '걍 귀찮음'에 가장 먼저 마음이 간다. 그 이유는 싸이월드 경험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우 SNS자체를 싫어하는 기질은 아닌 것 같다. 가까운 이들과의 소통을 즐기므로 싸이월드는 그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실현해 준 공간이었다. 1촌이라는 관계망 내에서 지인들과 일상을 공유하면서 주고받는 웹상의 코멘트, 그 과정에서의 공감대가 즐거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다. 그 시간 동안 SNS에 대한 대부분의 호기심은 해소되었다. 심지어 그것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 때의 피로도와 부정적 경험, 그리고 흑역사들에 대해 알고 있다. 모습만 조금씩 둔갑하며 다가오는 SNS들에서 그다지 동인(動因)을 얻지 못하는 이유다.
서비스 주체가 개인들의 정보를 취급하고 제공하는 방식도 과거와 다르다. 지금의 소셜미디어는 부지불식간에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범위, 그러니까 사돈의 팔촌을 넘어 팔촌의 직장 동료와 헬스 트레이너까지 그 관계가 연결되고, '좋아요' 표현은 물론 웹상의 검색 기록까지 모든 사용패턴이 알고리즘에 반영된다. 이는 나의 피드 공간에 지속적으로 정보들을 쏟아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그것이 필요한 정보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 눈을 그곳에 붙잡을 딱 그만큼의 역할을 한다. 당연하게도 이는 서비스 개발사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온라인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수록 그 화면을 들여다 볼일이 많아지고, 그렇게 더 오래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이 그 서비스를 만든 이들의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에 있어서, 내 정보 역시 그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뻗어나간다. 싸이월드는 상대적으로 개인 정보가 폐쇄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금의 SNS의 경우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 게 기본적인 사용 방식으로 여겨지지만 싸이월드의 경우 '1촌'이라는 관계 그룹을 서비스의 고유한 기능이자 문화로 강조했다. '1촌 파도타기'와 같은 애용 패턴이 따로 있을 정도였고, 정보의 공개 범위를 메뉴 단위, 게시물 단위로 세분화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구조와 기능은 위에서 언급한 목적을 이루는데 한계를 만든다. 그래서 최근의 SNS들은 정보의 공개 방식이 매우 심플하다. 내 모든 정보를 모두에게 공개하거나 내가 승인한 사람에게만 하거나. 여기서의 ‘모두’는 내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포함한다. 내 모든 정보를, 플랫폼의 입맛에 맞춰 모두에게. (정보 공개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이 친절하게 드러나 있진 않다.)
무엇보다 다른 점은 피드 영역의 유무다. 지금의 SNS는 팔로잉하는 사람들의 정보, 추천 콘텐츠, 광고 등을 그 개인의 피드 영역으로 모아진다. 하지만 싸이월드의 경우 (아마도 그런 아이디어 자체가 없었던 시기라서 그렇겠지만) 피드 기능이 없었다. 그래서 내 정보는 나를 팔로우하는 상대방의 페이지가 아닌 내 미니홈피 안에만 존재했다. 그게 누구든 내 정보를 보려면 미니홈피에 방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내 모습이 추천 알고리즘을 타고 다른 누군가의 피드에 노출될 일도 없었다.
제시되는 정보의 과잉, 예상 밖으로 뻗어가는 내 정보, 이 두 가지의 시너지는 일상에서 내 시선이 머무는 자리를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긴다. 나는 그곳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들을 실상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고 사회적인 압박이나 박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실제 대인관계까지 침범하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라고, SNS에 원수진 괴팍한 아재 같은 말들을 쏟아냈음에도, 나는 그것들을 여전히 설치하고 적응에 도전해 보고 있음을 고백한다. 누군가 물을 것이다. "안 좋다는 걸 알면서 왜 기웃거리냐"라고.
나를 포함하여 80년생이 그것을 시도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일단 주변에서 그에 대한 얘기나 추천을 많이 하는 게 가장 큰데, 단순히 추천 때문이라기보다는 글 서두에서 말한 주요 관계망이나 트렌드가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 SNS가 주었던 신선함을 다시 겪어 보고 싶은 호기심도 어딘가 있을 것이다. 거창하게는 시대를 관통하면서 나아가는 서비스를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있다. 이따금 마음 잡고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결론은 같다. 실패한다. 귀찮아서, 그것을 지속해야 하는 '왜'에 답하기 어려워서, 그리고 깊이 결속되었을 때의 문제를 알기에, 겉도는 유저로 남게 된다.
답을 찾기를
다만 SNS에 대한 이런 시선과 태도가 현세의 젊은 층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이미 SNS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관계를 맺었다. 그것을 삶의 보편적인 놀이터이자 일기장, 그리고 필수적인 소통 도구로 사용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
또한 지금의 SNS는 개인의 커리어나 사회적 영향력, 평판, 인맥 등을 어필하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어느덧 이력서에는 나의 인스타그램이나 링크드인 주소를 넣는 게 중요해졌다. 심지어 인플루언서라는 직업의 하나로까지 자리를 잡은 그것을 ‘일단 귀찮고 싫어 위험해’라는 생각으로 바라보면서 세상과 제대로 소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노력에도 해결되지 않던 불법 다운로드가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급감했던 것처럼, 모른 척하거나 막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건강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을 TV가 사랑을 싣던 시절부터 오늘까지, 이 모든 과정을 겪어온 80년생이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자료
세대별 SNS 이용 현황 (정보통신정책연구원,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