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넘기지 않는 세상
"사둔 책들을 읽는 거요."
한 팀원이 말했어요. 새해 다짐을 나누는 자리였죠.
저는 그의 다짐이 좀 의아했어요. 그는 평소에도 책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거든요. 그럼에도 굳이 독서를 또 다짐해야 하는 게 이상했죠.
“맞아요. 책을 사는 건 즐거워서 모으게 되는데, 읽지는 않게 돼요."
그런데 다른 누군가의 공감 섞인 말을 듣고 그 다짐이 생긴 이유를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사는 건 쉬운데 읽는 건 어렵기 때문이에요. 예전처럼 책을 좋아해서 그것을 구입하지만 읽는 능력이 예전 같지 않으니 자연스레 신상 책이 쌓이게 되는 것이죠.
따져보니 이것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현상 같더라고요. 뭐랄까, 책의 마지막 장까지 도달하는 게 예전에 비해 어려워진 느낌이랄까요. 독서를 하다 보면 주변에 소소한 일이 생겨 버려요. 전화나 메시지가 온다거나 혹은 다른 할 일이 떠오른다거나 말이죠. 심지어 어디선가 "언제 다 읽을 거야. 요점만 파악해"라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는데요. 그럼에도 저는 고집스레 종이를 넘기곤 해요. 책을 읽으면서 겪었던 고유하고 멋진 경험들이 많기 때문이죠.
종이책만 있던 시절의 이야기
종이에서만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시절, 저에게 먼저 큰 임팩트를 준 것은 만화책이에요. 종이로 엮어진 그것에 저를 몇 시간이고 들러붙어 있게 했던 최초의 경험이었죠.
몇 작품 예를 들고 싶은데, 지나온 만화책을 떠올리다 보니 마치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처럼 어떤 작품부터 거론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많이 말하면 소감이 길어지고, 줄이다가 빠뜨려서 서운해할 작품들이 생길까도 겁이 나는 것이죠. 그래서 작품보다는 만화잡지를 먼저 언급해 볼까 해요.
90년대 당시에도 네이버나 카카오 웹툰과 같은 만화 플랫폼이 있었어요. 다만 그것은 종이로 된 잡지였고, 하나의 책에 여러 만화를 한 회차씩 담고 있었으며, 격주로 정해진 요일에 발행되었죠. 드래곤볼의 <아이큐점프>, 슬램덩크의 <소년 챔프>. 열혈강호의 <영챔프>가 유명했던 걸로 기억해요. 새로 출간된 호를 얻게 되면 메인 선수인 만화를 먼저 보고, 그다음으로 나머지 만화들을 보는 게 진리! (메인 만화는 책방에서 잡지를 사서 나오는 길에 다 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죠.) 모든 통합 콘텐츠들이 그렇듯 비인기 만화는 인기 만화의 낙수 효과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90년대 만화책을 돌아보는 일에 있어서 앞서 언급했던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는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양대신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 손에 먼저 잡힌 건 <드래곤볼>이었어요. 카세트만큼 작은 크기의 만화책이었던 그것은 문방구 구석에서 살 수 있었죠. 누군가 제 생일 선물로 1권을 주었고, 저질스러운 초장부 스토리는 당시 초딩이었던 정신 연령에 딱 맞았습니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지만…) 이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성장과 낙오를 겪는 손오공과 그 주변인들을 보며 울고 웃고 감동했죠. 참고로 만화책이 완결되고서 몇 년 후 이후 이야기들이 더 진행되었는데, 제가 '드래곤볼'로 인정하는 건 당시 종이책에서 완결을 지은 ‘마인부우’ 에피소드까지입니다. (엄근진)
우부는 근두운을 탈 수 있었다는…!슬램덩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에 봤어요. 이 대단한 만화는 운동 중에서도 특히 공으로 하는 것들을 유독 못하던 저에게 농구의 꿈을 꾸게 했어요! ‘놓고, 오면’ 되는 레이업 슛과 왼손은 거들기만 하는 원거리 슛의 느낌을 알기 위해 새벽에 농구장으로 가서 홀로 연습도 했더랬죠. 서태웅이 신었던 에어조던5도 샀어요. 제가 이럴 정도였으니, 이 만화가 연재되던 시절의 농구장들은 늘 땀냄새로 가득 찼었어요. <슬램덩크>는 스토리는 말해봐야 호흡 낭비고, 심지어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도 굉장히 찰지게 번역된 작품이에요. 강백호, 서태웅, 송태섭, 채치수. 하, 이름만으로도 그 캐릭터가 느껴진다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만화를 적다가는 오늘 안에 글을 끝낼 수 없어요. 90년대의 양대산맥을 언급했으니 수상소감은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순간...!당시 만화책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어요. 사서 읽거나 빌려서 읽거나. 빌리는 방법은 또 두 가지가 있었는데 친구에게 공짜로 빌리거나, 아니면 대여점에서 돈을 내고 빌리는 거예요. 생각해 보니 당시 대여점은 내가 아는 만화책 외에도 다른 많은 작품들로의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대여 가격도 합리적이었기에 만화책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갓길에 들르는 곳이었죠. 신상, 아니 신간 만화책들을 봉지에 넣고 군것질 거리를 사서 집으로 향할 때의 행복감은, 지금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어요.
그렇게 제가 보던 종이책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그림보다 글자의 비중이 많아졌어요. 맘에 드는 책을 만나면 만화책만큼이나 그것에 빠져서 읽곤 했는데요. 특히 소설을 읽을 때는 글자 외 그 어떤 제한도 없는 공간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수많은 씬들을 떠올리곤 했죠. <11분>, <노르웨이의 숲>, <뇌>, <향수> 등을 읽으면서 작가의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머지않아 그것은 좌절이 되었지만)
종이를 넘기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
2000년대 초, 디지털과 광랜의 대규모 공습으로 인해 종이에 있던 콘텐츠들은 대거 인터넷으로 이동했습니다. 가장 빨랐던 것들이 질문과 답변, 커뮤니티 종류였고, 점차 긴 호흡의 글들도 전자책의 형태로 인터넷 진출의 기회를 노렸어요. 하지만 기술적인 한계와 뜨뜻미지근한 시장 분위기로 저물었죠. 생각해 보면 그 이후로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분야에서 여러 도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늘 뭔가 시원하지 않았어요.
종이책에 있던 즐거움을 가장 먼저 인터넷 브라우저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사례는 '웹툰'이 아닐까 싶어요. 웹상의 카툰, 합쳐서 웹툰! 처음 이 명칭을 보았을 때 네이밍이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어요. 만화에 '웹'의 특징이 더해진 이 신개념 콘텐츠는 <마음의 소리>, <노블레스> 등의 새로운 작품들, 그리고 '스크롤'이라는 무시무시한 무기와 함께 만화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스크롤 기반의 만화가 선사하는 새로운 형태의 긴장감에 빠졌고, 무엇보다 무료로 여러 장르의 만화를 볼 수 있는 신세계에 열광했어요. 저 역시 웹툰에서 굉장히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났죠. 이렇듯 웹툰의 부흥기를 거치며 사실상 만화 기반의 수요는 대부분 웹 콘텐츠로 이동했습니다. 종이책 시대에 아무리 유명했던 만화 작가라도 이 시대에 자신의 만화를 보게 하려면 웹툰으로 만드는 방법 밖에 없었죠. 종이책으로만 출간하면? 유퀴즈를 나온다고 해도 흥행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웹툰의 성공 후로 대중은 인터넷상에서 길고 연속적인 콘텐츠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그렇게 ‘웹소설’도 인기의 컨베이어 벨트에 올랐습니다. 쉽고 맛깔스럽게 읽히는, 다양한 취향을 포용할 수 있는 웹소설의 매력 역시 기존의 종이책 시장을 빠르게 침투했죠.
이처럼 웹콘텐츠 시장의 부흥과 더불어, 2010년부터 이어진 종이책의 디지털화는 '구독형 플랫폼(리디, 밀리의 서재 등)'의 등장과 함께 시장의 호응을 얻었어요. 이는 출판의 개념에 기존의 종이책뿐만 아니라 전자책을 포함시키는 문화를 형성시켰으며, 출판사는 기존의 도서들을 전자책으로도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대부분의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지금, 특히 젊은 층에게 어떤 책을 추천하면 그는 스마트폰을 통해 먼저 그것을 검색할 거예요. 그런 다음 개중 꽤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의 소비를 (종이가 아닌) 그 안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검지는 종이를 넘기는 일보다 마우스를 스크롤하는 일을 많이 해요. 그나마도 역할이 있으면 다행이죠. 사실 대부분의 검지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스마트폰 위의 김연아나 다름없는 '엄지'가 그 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이에요. 손가락 중에서 가장 작달막했던,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따봉' 밖에 없던 이 녀석은, 종이를 넘기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서 천수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공감 표시도 엄지 아이콘으로 한다는...!)
이제 엄지가 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는 게 쉽지 않게 됐어요.
그럼에도 종이를 넘기는 이유
저는 여전히 검지에게 역할을 줍니다. 종이책을 고수하며 그것을 넘겨요. 이렇게 말하면 마치 다독가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그저 웹상의 콘텐츠는 이상하게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을 뿐이에요. 글을 읽는 시선의 큰 방향이 가로에서 세로로 이동하는 것이 집중을 방해하고, 무엇보다 웹서핑 습관 때문에 스크롤 기반의 콘텐츠는 저도 모르게 그 요점만 파악하는 태도를 만들어 버려요. 숙고하고 음미할 수 없죠.
최근 읽었던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제가 그간 느꼈던 불편함의 이유를 일부 알 수 있었어요. 이에 따르면,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대학에서 20년간 문해력을 연구한 ‘아네 망엔Anne Mangen’은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독서는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선형적 방식의 읽기인 반면, (모니터나 휴대폰 등의) 화면을 통한 읽기는 정신없이 넘기면서 초점을 옮기는 습관을 강화한다. 어떤 글이든 필요한 내용만 뽑아내는 목적으로 접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읽는다는 건 마치 국어 시험의 지문을 파악하 듯 맥만 짚고 넘어가는 게 아니다. 읽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심지어 종이책과 태블릿 화면으로 동일한 정보를 습득한 두 집단을 비교한 실험 결과, 책으로 본 사람이 내용을 더 잘 기억했다.― 읽는 행위의 역할 변화로 인해 긴 텍스트를 읽는 능력, 그것들을 읽어나가는 인지적 참을성을 잃고 있는 것 같다”
또한 한 대학교 교수의 인터뷰 내용도 기억에 남아요. 그는 “학생들이 아주 짧은 책조차 읽기 힘들어해서 갈수록 책 대신 팟캐스트나 유튜브 영상을 알려주고 있다”라고 말했죠. 참고로 그 학교는 하버드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웹서비스는 무한 스크롤을 사용해요. 내려도 내려도 끝나지 않는 콘텐츠를 보는 것이죠. 그런데 이 스크롤을 처음으로 만든 '아자 래스킨Aza Reskin'은 어느 날 자신이 이 스크롤을 통해 쓸데없는 정보를 한참 동안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계산을 해봤더니 무한 스크롤이 의도에 비해 최소 50%나 더 긴 시간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있었어요. 그것을 웹콘텐츠에 접근하는 수십억 인구에 맞게 환산해 본 결과, 20만 명이 넘는 인간의 삶(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에 해당하는 시간이 화면을 스크롤하는데만 쓰이고 있다고 해요. 단 하루에 말이죠.
휴대폰은 놀라울 정도로 가까이에 있고, 엄지 녀석은 더 이상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계속 다음 콘텐츠를 보여주니까요. 그래서 저는 고집스레 종이를 넘겨요. 한때 ‘마음의 양식’으로 불렸던 그것은, 모든 것이 빠르게 전환되는 이 메트릭스에서 유일하게 수분을 머금고 있는 나무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당장 오늘, 종이를 넘겨 보시길!
그러고 보니 이 글도 화면으로 읽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