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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이 빠졌다

by 왕고래


이빨이 빠졌다.


심지어 앞니 세 개다.


가뜩이나 변변치 않은 얼굴을 밝은 표정으로 커버해 왔는데 당분간 활짝 웃을 수 없다. 거울을 보니 엊그제 봤던 댓글이 떠올랐다. [하루만 못 생겨보고 싶다. 매일 못 생겨서.]


나는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내 이빨을 다루기로 했다. 그것은 없는 상태이지만, 굳이 입을 열어서 누군가에게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로만 존재한다. 이빨의 있음과 없음이 중첩되는 상태인 것이다. 마스크 생활이 시작됐다. 코로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사실 이 이빨들은 20여 년 전에 빠졌다.


덩치에게 잘못 덤볐다. 그 녀석이 내 친구를 욕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위협적으로 외형을 키우며 기세를 드러냈으나 상대에겐 그저 양팔을 치켜든 래서판다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덩치의 지속적인 도발에 나는 오래된 면봉 같은 주먹을 뻗었다.


기적은 없었다. 덩치의 주먹이 메아리처럼 돌아와 내 아래턱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이빨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챘다. 사실 그의 덩치를 떠나서 예나 지금이나 내가 이길 수 있는 지구인은 몇 없다. 왜 그랬는지 과거로 돌아가서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그렇게 사라진 앞니의 빈 공간을 가공의 물질들이 채워주었고, 긴 시간의 공세에 가공물들은 그 역할을 다했다.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 위해 잇몸을 재건하는 수술을 했다.


이 날까지 고생하게 만드는 당시의 선택이 후회스럽지만, 문득 그렇게나 과거의 일이 현재에 연결되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가공의 이빨들을 심을 때 의사는 '반영구적인' 조치라고 설명했다.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 시간과 함께 과거의 가공물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여전히 이곳에 있다.


기억뿐만이 아니다. 그 무모함도 어딘가에 남아있다. 지킬 게 많아진 지금, 득실을 따지는 손가락에서, 내키지 않는 상황에 끄덕이는 고개에서, 같은 하루를 보낸 이들과 집을 향하는 발걸음에서, 한 번쯤 그때의 주먹을 뻗어보고 싶다. 앞뒤 따지지 않고 내딛는 승부.


마스크 속에서 혀를 움직여 앞니가 사라진 잇몸을 살핀다. 그 빈 공간이 묘한 고양감을 준다. 마치 덩치에게 덤볐던 순간의 기세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 심지어 이젠 빠질 이가 없으니 이미 맞은 거나 다름이 없다. 몇 대 더 맞아도 괜찮을 거라는 착각과 함께 두 면봉을, 아니 주먹을, 꽉 움켜쥔다.


물론 이 용기도 마스크 속의 확률로 존재할 뿐이다. 있음과 없음이 중첩된 앞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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