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처방전 II
어느 누구도 타인을 소유할 수 없으므로 누가 누구를 잃을 수 없다.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하지 않은 채 가지는 것.
-파울로 코엘료, 《11분》中
소심인들은 대체로 자신만의 울타리를 갖고 있다.
울타리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도움을 주지도 않으며 살아간다. 울타리 안쪽으로 누군가를 들이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만, 누구든 일단 그 분명한 경계의 안 쪽으로 들어온 이상 소심인의 애정을 받게 된다.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울타리 내부는 보기보다, 열렬하다.
소심인은 울타리 내부에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극히 소수를 집 안으로 들인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그 높은 울타리를 넘어 그 두꺼운 현관문까지 열고 들어온 존재를 연인, 단짝, 소울메이트 혹은 ‘베프(베스트 프렌드)’로 칭하며 감춰뒀던 자신을 꺼내기 시작한다. 울타리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울타리 안의 마당에서도 차마 망설였던 일상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 전심을 쏟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심인의 연애는 기대와 달리 매끄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정신 차려보니’ 모든 걸 걸게 만들어버리는 존재, 때론 치열한 전투가 필요한 연애의 민낯, 이따금 대범하게 다가서거나 멍하니 흘려야 하는 사랑의 시간 속에서 우왕좌왕 호랑나비춤을 춘다.
타인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지 않던 일상, 가까운 이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 습관 탓이다. 누구와도 그토록 유치하고 이상한 갈등을 겪어본 적이 없다. 눈을 감고 호흡을 길게 뱉어도 아른거리는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면전에 재채기를 해버리고는 후회한다. 자신의 뜻밖의 모습에 실망한다. 그러곤 다시 미성숙한 말을 뱉어버린다. 아차 싶으면서도 그렇게 된다. 짝사랑에 익숙할지언정, 연애엔 미숙하다.
방어 기제의 한 종류인 ‘투사’는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소심함을 잘 설명한다.
투사(投射, Projection): 불쾌한 원인, 받아들이기 힘든 충동의 원인이 (자신 내부에 있는 것을 알더라도) 외부에 있는 양 인식하고 반응하는 것
이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나의 생각을 (외부의 어떤 존재에 게) 던지는 태도’를 가리키는데, “날씨가 덥다. 냉면 먹고 싶지 않니?”와 같은 가벼운 권유부터 강요, 원망, 자격지심, 질투, 의심, 집착까지 인간관계의 많은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쉽게 말해 내가 생각하는 것을 타인에게도 적용하는 행위다.
연인 관계의 투사는 대범인보다 소심인에게 더 자주 나타나는데,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소심인은 섬세하기 때문이다.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리해야 하 는 성향 탓에 때때로 엉성하고 불분명하게 심화되는 연애의 현상들을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 체계 속에 맞춰 넣으려는 시도를 한다.
상대는 어떤 존재인지, 뭘 좋아하는지, 언제 가장 빛나는지, 우리가 왜 만나고 있는지, 상대가 내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지, 혹은 내가 어떤 장면에서 상대를 서운하게 하는지, 어떻게 해야 내가 원치 않는 행동을 상대가 안 하는지, 다 알 것 같은데 묘하게도 다툴 일이 생기고 서운해진다.
이전까진 어떤 결과가 예측 가능한 수준에서 나타났는데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는 사실에 당황하며, 소심인은 그것을 이해하고 타개하기 위한 사색을 시작한다. 생각의 꼬리는 다시 머리를 물고, 늘 그랬듯 홀로 분투한다. 신중하게 뱉은 말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올 때면 다시금 그 이유를 곱씹으며 더 깊은 생각의 장으로 들 어간다. 괜한 말로 또 갈등을 만들까 싶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참 열심히도 고민한다. 그만큼 투사의 계기는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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