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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5. 2016

어차피 우아하지 않아요.

#40. 고집 Ⅰ


고집

1.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 또는 그렇게 버티는 성미.






- 오해야.


이불 틈바구니에 휘말려있던 휴대폰에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와 외마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밤새 들이부은 술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과 어제의 일인데, 마치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정말 내가 그랬단 말인가.


시간을 두고 봉순의 문자를 바라보다가 답장을 입력한다.


- 웃기시네.


취소 버튼을 누른다.


참 우스운 일이다. 사건의 발단도 그 형태도 모두 봉다방의 한 장면일 뿐이다. 냉정하게 보면 업무의 충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이 대화엔 딱히 업무가 보이지 않는다. 수개월의 혼이 담겨있는 봉다방이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잠식당할 위기, 그 최고조의 상황에서 주고받은 대화라는 게 이처럼이나 지극히 단출하고 개인적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선택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문자’를 보낸 게 처음이다. 그녀에게 스마트폰은 그저 무선전화기일 뿐이다. 특히나 어려운 상황일수록 말을 고르는 봉순에게 있어서 이 세 글자의 문자는 그야말로 짜내고 짜낸 가장 중요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에서 아쉬운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안해, 돌아와, 전화해줘.’처럼 직접적인 무언가를 원하는 건 아니다. 아니, 난 지금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오해야’라는 단어는 뭐랄까. 상황을 잘 정리하려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관계를 잘 정리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이 마지막 순간에 뭐가 오해라는 걸까. 직접 물어봐야 하나.


“웃기시네!”


휴대폰을 이불속으로 구겨 넣으며 소리친다. 소리는 큰데 그 뉘앙스가 어색하기 그지없다. 어제의 결심을 견고히 하려는 듯 어딘가 고의로 큰 소릴 내 버린 것 같다. 숙취가 오르는 건지 혹은 민망해서인지 귀부터 목까지 화끈거린다.


그래도,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다.




며칠이 더 지나갔다. 그 문자를 끝으로 더 이상 봉순의 연락은 없었다. 물론 나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극적인 감정선을 연출하고 싶었는지 혹은 유지하고 싶었는지, 그 며칠의 밤과 밤을 술로 달랬다. 다행히 두 발은 김유신의 말처럼 술 취한 틈 타 봉다방 언저리를 더듬지 않았다.


평소 말 많던 친구 녀석도 이 시간 동안은 묵묵히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입을 열었는데, 또 절대 시간 타령이다. 이별에도 그 할당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슬픔을 느끼는 시간만큼 그 할당량은 줄고 있으니 충분히 슬퍼하란다. 그 시간에 집중하면서 진도 열심히 빼란다. 참 별난 놈이다. 별난 놈인데, 왜 그리도 그 얘기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지. 할당량이 줄어든다는 게, 그 시간을 흘려낸다는 게, 결국 그 시간의 끝에는 봉순이 없다는 게, 왜 그리도 슬픈지.


“저, 봉팔님.”


흐느적거리며 귀가하던 길목, 낯익은 놈이 서있다. 단박에 그를 알아봤지만 마치 희미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눈을 길게 뜨며 바라보았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아~? 누구신가 했네요.”


술기운 뻗쳐서인지 능글맞은 톤이 잘도 나온다.


“아, 네. 태리입니다.”


맞네 맞아. 그 재수 없는.


“아~ 네. 어쩐 일로?”


과감하게 말끝을 줄여본다. 술기운 만세.


“말씀드릴 게 있어요.”


니가 말할 게 뭐 있어.


“봉팔님께서 모르고 계신 부분이 있습니다.”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다고.


“봉순이는 생각하시는 거랑 조금 다릅니다.”


그래 다르겠지. 다를 수 있어. 그런데 이건 우리 둘의 문제야. 왜 니가 껴드는 거지? 이미 우리만의 단출한 이별 신호를 주고받았다고.


“저는 곧 돌아갑니다”

“그래서요.”

“봉순이를 부탁합니다.”


생각보다 더 엉망인 놈이네. 왜 그 부탁을 나한테 하는 거냐.

더 이상 할 얘긴 없다.


“저는 말입니다!”


썩은 표정으로 돌아서는데 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봉순의 사촌오빠입니다.”


몸이 멈춘다.


“모르실 것 같았습니다.”


몰랐다. 진짜.


“봉순이는 지금 같은 성격이 아니었어요.”


돌아선다.


“제가 기억하는 봉순이의 모습이 있습니다. 밝고… 여기저기 참견하던 모습. 호기심 덩어리에, 말썽도 참 자주 부렸죠.”


그의 목소리, 그 낮고 묵직한 끝이 떨린다.


“어떤 일을 겪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그렇게 충혈된 눈을 마주하며 그의 얘기를 들었다.


현재 봉다방이 있는 건물엔 봉순의 가족을 비롯해 친지들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태리도 봉순의 윗집에 살았고 친오빠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시장 골목에서 꽤나 유명했다. 어릴 적부터 이 가게 저 가게 휘젓고 다니면서 주인들의 혼을 쏙 빼놨다. 시장 골목에서 봉순의 손맛을 보지 않은 물건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부모님이나 태리가 수습한 일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봉순은 시장 골목의 여러 가게를 들렀다. 다만 어릴 적과는 달리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거나 상인들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면 눈에 보이는 가게마다 들어가서 내 생각이 어떠냐 저떠냐 캐물었다. 시장 골목 어른들은 그녀가 들르는 시간을 기다렸고 좋아했다. 때때로 맛있는 간식이 생기면 봉순에게 챙겨주었다. 그러면 그녀는 그 옆 가게에 들러서 그걸 나누어 먹었다.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녀가 가장 자주 들렀던 곳은 다방이었다. 당시 다방의 어두침침한 조명과 ‘야시러운’사장님 때문인지 부모님은 그녀가 그곳에 가는 걸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봉순은 그 분위기를 참 좋아했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 봉다방의 분위기와 비슷하겠지. 그 집시 같은 복장도.


부모님께서 사고를 당하신 후, 봉순에겐 고요함만이 남았다. 그녀는 더 이상 시장 골목을 휘젓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했지만 먼저 다가와 꼭 안아 준다거나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 항상 먼저 문을 열던 그녀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그녀가 부모님에 대한 애도, 그 이별의 절대 시간을 잘 감당한 후 예전의 그녀로 돌아와 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집 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졌다. 그렇게 봉순은, 비밀창고였던 자신의 지하실에서 홀로 어른이 되어갔다.


유일하게 그녀가 의지하던 사람은 태리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태리한테는 조금씩 예전의 밝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가 유학 가던 날, 봉순은 그간 참았던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고 한다.


“내가 다방 차리면 돌아와야 돼. 내가 다방 차리면.”


그녀의 슬픔이.


“꼭 돌아와야 돼.”


느껴진다.


“봉순에겐 아직 말 못 했습니다만, 다음 주에 갑니다.”


태리가 돌아온 이유도 그때의 약속 때문이라고 한다. 봉다방 첫 매출이 있던 그 날, 봉순은 태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한국에 오기 위한 준비를 했다. 디저트라는 메뉴의 특성상 가게를 닫지 않고는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가게인 <모모타르트>의 휴가기간을 손님들에게 알렸다. 그들이 충분히 인지해서 그 기간 동안 헛걸음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기간’이 되던 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래서였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천천히 눈에 담으려 했다. 먼 여행 앞둔 자신을 끝까지 뒤돌아보게 했던 소녀의 현재를, 그 나아진 삶을 느끼며 감동에 젖었다. 아기자기한 공간을 내려가 그녀와 마주하는 순간, 그 기쁨은 평생 동안 자신의 보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그들의 만남은 어딘가 과하고 극적이었다. 그래서 봉순의 표정이 그렇게나 환했던 것이다. 그녀의 밝았던 예전의 모습이 잠시 나온 것뿐이다. 그게 본래의 너였구나. 봉순아.


이제 그런 그가 돌아가야 한다.

그녀가 또 혼자 남는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얘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기, 그러면 봉팔님께서…”


“그래도.”

“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네?”


그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만 가볼게요.”


흩날리는 말 끝을 숨기며 돌아선다. 어쨌든 난 이미 결정했고, 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저기, 그러면! 저 돌아가기 전에 같이 저녁이라도 먹어요!”


걷는다.


“이렇게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시는 건! 좀 그렇잖아요.”


멈춘다.


"테리님."


그의 이름을 부른다.


"어차피 이별은 우아하지 않아요."


추하고-

절절하지.


이만하면 깔끔하게 끝낸 거라고.


하려던 말 집어넣고 되도록 빠른 걸음으로 그로부터 벗어났다. 그가 뒤에서 몇 마디의 말을 덧붙였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봉순의 슬픔, 그리고 아련한 봉다방의 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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