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고집 Ⅱ
고집
2. 마음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심상이 재생되는 일
언제부터인가 꿈속이 조용해졌다. 거대한 몸집 꿈틀거리던 숲의 파도도, 하얀 옷자락 흩날리며 달아나던 그녀의 뒷모습도, 그런 그녀의 눈물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그녀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봉팔이 아직 자요?”
어제 같은 오늘 아침을 맞이하던 차에 묵직한 잠 헤치며 친구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말도 마라. 벌써 한 달 가까이 방에 콕 박혀서는...”
“그러게요. 전화도 안 받아서 이민 간 줄 알았어요!"
뭔 이민을 가. 어제 같이 술 마셔 놓고는.
“걱정돼 죽겠어. 갑자기 뽕다방인지 뭔지도 관두더니… 왜 저러는지.”
봉이라니까 자꾸 저러시네.
“어머니! 걱정을 마세요. 따보옹! 봉팔이 아닙니까!”
치켜든 엄지가 보이는 것만 같다. 능글맞은 놈. 근거 없는 칭찬으로도 엄마의 한숨을 녹인다.
“니가 데리고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쏘이고 와. 저러다 몸 상하겠어.”
“대박! 안 그래도 제가! 같이 놀러 가려고 왔습니다! 어머니 대박!”
“에구. 넌 참 밝아서 좋다 얘. 얼른 들어가 봐라.”
방문이 열리고 닫힌다.
“어머니! 봉팔이 안 자는데요?”
그 녀석이 인사인지 대화의 연장선인지 모를 것을 외친다.
“시끄러워…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다 들었잖아. 바람 쐬러 가자.”
“다음에 가자, 다음에.”
“오늘 갈 거야.”
“우리 엄마한테 뭐 빚졌어?”
“아닌데? 진짜 여행같이 가려고 온 거야.” 친구가 턱을 괴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 시늉을 한다. “어머님의 선견지명이 보통 이상이신 거지!”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찾아와서 대뜸 가자고 하면….”
“가면 되지.”
그가 심각했던 미간을 펴며 맘 편하게 대답했다.
“다음에 가자.”
“미안한데, 이미 표를 사놨어.”
“무슨 표?”
“야, 무슨 표겠냐. 기차표지.”
“환불하면 되잖아.”
“야야! 이럴 시간에 씻고 밥 먹고 나가겠다. 벌써 도착했겠다 인마!”
등쌀에 밀려 정신을 붙잡고 일어났다. 친구는 든든하게 먹어야 기차에서 또 먹을 수 있다며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그렇게 아침밥을 밀어 넣은 다음 몸에 물과 비누 등을 묻히고 닦았다. 옷의 구멍구멍으로 머리와 팔다리를 넣었다. 대략 사람의 모습이 되자 친구는 오케이 사인을 주더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아드님과 사나이 우정 다지고 올게요, 소리친 후 날 끌고 나왔다. 여전히 별난 놈이다.
역에 도착하자 친구가 어디론가로 손을 흔든다. 그곳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여자다. 얼핏 보아도 연령대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옷차림이다. 친구를 쳐다보자 이놈이 내 놀란 눈을 보며 지그시 웃는다. 그리고는 또 절대 시간 타령을 해댄다.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열어야 하지 않겠냐며.
“난 집으로 갈란다.”
"괜, 찮아 인마! 안 잡아먹어.”
“안녕하세요~”
친구가 내 팔을 움키고 흔드는 사이 그녀들이 다가왔다. 둘 다 긴 머리였는데, 차이가 있다면 한 명은 굉장히 밝은 톤의 갈색 파마머리였고 그 위에 다소 두꺼워 보이는 털모자를 씌워 놓았다. 옷은 얇게 입은 반면 눈썹 윗부분만 월동 준비를 한 셈이다. 렌즈를 낀 건지 파란색 번뜩이는 눈으로 인사를 건넨다.
다른 한 명은 검은색 긴 생머리가 한쪽 어깨로 늘어져있다. 기술이 더 좋은 건지 모르나 ‘파란 눈’에 비해 화장도 수수하게 한 데다가 아래로 늘어진 눈꼬리 덕에 상대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준다. 그러나 인사를 건넬 때 드러난 덧니가 왠지 그녀의 감춰진 익살스러움을 몰래 알려주는 것 같다.
“이분이 그 말로만 듣던 봉팔님?”
“어 맞아. 얘가 걔야.”
“어머, 듣던 것보다 훨씬 멋지시네요.”
날 어떤 식으로 얘기했던 거지.
“전 이수린이라고 하고요.” 파란 눈이 먼저 통성명을 한다. 역시 적극적인 성격이다. “여기는 제 친구... 음, 이름은 너가 말해~”
“응. 네. 저는 연수예요."
“성도 얘기해야지~”
파란눈이 소개의 완결성을 높인다.
“아, 허에요. 허연수.”
‘덧니’는 자신의 성을 얘기하는 것이 조금 어색한지 미간에 살짝 힘을 주며 대답한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수수해 보이는 그녀가 실은 꽤나 다양한 표정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봉팔입니다."
“마, 너도 성 말씀드려 언능.”
“후, 그래 고맙다. 네 저도 허에요. 허봉팔.”
“아, 진짜요? 성이 같네요?”
“네, 네. 그러네요.”
“그러면!” 친구 놈이 뭔가 생각난 듯 깜짝 놀라며 말한다. “둘이 결혼은 못하는 건가?”
이죽거리는 그놈을 쏘아본다. 손으로 자기 입을 뒤덮더니 눈썹 추켜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누설한 듯한 얼굴이다. 날 놀리는 게다.
“아니야. 촌수에 따라 다를 걸? 봉팔 씨! 벌써부터 고민하진 마세요.”
파란눈이 친구의 저질 농을 받아낸다. 만난 지 1분 된 남자의 혼사를 논하는 그녈 놀란 눈으로 본다. 그러자 그녀도 자신의 입을 가리더니 친구의 장난스런 표정을 따라 한다.
“잠깐!” 덧니가 끼어든다. “왜 곤란해하세요? 제 첫인상 별론 가봐요.”
그녀가 내 옷자락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뚱한 표정을 짓는다. 역시 새로운 표정이다. 섭섭한 뭔가를 표현하려는 것 같다. 이렇게, 이런 얼굴로, 그, 이렇게 가까이, 막, 그럴 때는, 이제, 어떻게, 그 반응이, 아니 반응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 네? 아니요! 그게 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러는 넌? 봉팔 씨 첫인상 어떤데?”
파란눈이 내 당혹감 잘라내며 결코 무심코 들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완전 딱 내 스타이…!”
덧니가 말을 멈추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러더니 앞의 둘이 했던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다. 셋이서 자지러진다. 참으로 밝다. 봉순에게 없던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한 설렘… 아니 아니, 이왕 나선 여행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자자, 출발합시다!”
친구가 여행객을 몰아 가평행 기차에 태운다.
햇살 깜빡이는 기차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얼마만이던가. 세월이 흘러도 기내 삶은 계란은 맛이 좋다. 덧니가 집에서 싸온 과일들을 꺼냈다. 달콤하다. 친구의 말재주와 여인들의 생기발랄함이 날 쉴 새 없이 들었다가 놓았다. 정말이지, 달콤하다. 평온해진다. 몸에 힘을 빼고 그들의 헹가래를 받아들인다.
역에 도착하자 친구가 또 어딘가로 손을 흔들더니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그곳에 웬 봉고차가 한 대 기다리고 있다. 이 계획적인 녀석이 기차표만 예약해둘 리 없었다. 과연 경험 많은 놈이라 다르다. 내가 안 가겠다고 꼬장꼬장 버텼으면 어떻게 됐을까. 뭐, 어떻게든 데리고 왔겠지.
그렇게 지구의 끝으로 가는 듯 길고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갔다. 주변으로 숲이 우거진 개천과 밭이 나왔고 각기 다른 몇 채의 펜션이 있었다. 그중 한 채로 차가 들어섰다.
친구는 나를 무슨 지독한 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대하며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하고는 그녀들과 식사를 준비했다. 저녁때 되려면 몇 시간이 남았는데 뭐가 저리도 급한지.
“원래 여행 오면 밥상 준비되는 시간이 밥시간이에요~”
얼굴에 생각이 드러났는지 파란눈이 상추 봉지를 뜯어내며 대답했다. 몇 번은 준비를 거들려고 했지만 셋이서 입 모아 내 손을 털어냈다. 마치 자신들의 모습을 편하게 보고 있으라고, 그렇게 여러 생각 말고 쉬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밥상이 준비되었고 결국 오후 4시부터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핏기를 띄고 있던 고깃덩이들이 그릴에 올라서며 걸쭉한 기름을 숯의 무리로 던졌다. 고기의 표면이 밝아지자 친구가 가위를 들었다. 덧니는 그 옆에서 두 손으로 접시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친구가 고기를 담아주자 들뜬 표정으로 총총 다가온다. 그 표정도 새롭다. 새롭고 귀엽다.
파란눈이 쌈을 싸더니 덧니의 입으로 넣어 주었다. 그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짜릿해한다. 파란눈이 다시 쌈을 싸더니 내 입가로 갖고 온다. 당황했지만 그 분위기 자연스럽다. 큰 쌈을 받아 문다. 아삭 거리는 상추가 균열을 일으키며 숯의 열기 담고 있던 실체가 이에 닿는다. 담백한 그 맛에 콧김이 뜨거워진다. 짭짤한 쌈장에 씁쓸한 깻잎의 향까지 더해지며 미각을 희롱한다. 손은 자동으로 술잔을 향한다. 그녀들은 이미 잔을 들고 날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흐른다.
부른 배와 흐린 눈을 달래기 위해 주변을 걸었다. 그들 중 누군가 따라오려 했지만 만류했다. 이제 조금은, 정말 조금은 정돈된 것 같은 그 느낌을 혼자서도 느끼고 싶었다. 1분 1초마다 온몸을 저리게 만들었던 이별의 아픔도, 점차 내 호흡을 다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오늘은 새로운 장면,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이렇게 나만의 정돈된 시간을 걷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그곳을 걷다 보니 아련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괜찮다. 호수의 옅은 안개와 습한 날씨가 강요하는 분위기 탓일 것이다. 이렇게 길쭉한 나무 숲을 지나는 이가 가져야 할 당연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전에 같은 장면에서 겪었던 어떤 감정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럿이 여행을 가게 되면 가열되던 분위기를 털고 홀로 조용히 산책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술에 많이 취해있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대학교 OT의 어쩐지 어설프면서도 심하게 각성된 분위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도 진정되지 않는 듯한 소란스러움이 익숙지 않았다. 친구는 그래도 대학교에 간 것이 부럽다고 대답했다. 그쯤 전화를 끊었다. 그 숲 깊숙한 어딘가에 나 말고 다른 이가 있었다.
그녀는 나무와 낙엽을 의자 삼아 앉아 있었다. 술기운 덕인지 말을 걸었다.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대답을 들으며 그녀가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과열된 술잔치의 불빛이 보이고, 그 함성 아련히 들리는 숲의 한가운데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저 밝디 밝은 장면으로 내려가 함께 흐느적거릴 수 없는 이유. 그녀가 아직 놓아주지 못한 두 사람의 기억, 그리고 그 아픔.
잊고 있던 것이 의아할 만큼 그 목소리 또렷해진다.
3년을 헤맸던 꿈속, 그 끝에서 난 항상 봉순을 만났다. 그녀는 달빛 내리는 숲의 심장에서 홀로 울고 있었다. 그녀라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그녀가 나를 선택했던 두 번째 이유, 늘 그걸 모른 채 깨어났다.
“얌마, 어두컴컴한 데서 혼자 뭐하냐. 무서워 죽겠네.”
“어? 어. 아니 그냥.”
“가자. 가서 얘기도 좀 하고 그래.”
“어. 그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처음엔 눈에 뭐가 묻은 듯 엄지와 검지로 대충 닦았다. 눈에서 그렇게나 많은 물이 나올 줄은 몰랐다. 손 이곳저곳을 비비적거리며 쏟아지는 액체를 증발시켰다. 지금 이 모습은 뭐랄까, 손에 고루 묻어있는 꿀이라도 핥아먹는 줄 알겠지. 실소가 나온다. 그리고 몇 번 더 기침인지 모를 것을 뱉었다. 그녀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친구는 말없이 술잔을 턴다.
"아, 미안하다. 분위기 망쳤지."
“마, 알면 됐다.”
고맙다. 니 덕에 조금 진정이 된다. 그런데.
- 컨셉? 한 잔을 먹더라도 대접받는 느낌을 주고 싶어.
그녀에 대한 기억이.
- 가격이 싸다고 해서 위치가 여기라고 해서 대충 한다면 그 주인이나 장소나 정말로 싸구려가 되는 거야.
그 마음이, 다시 내 가슴을 파고 들어온다.
- 유명해지는 건 싫어. 감당할 수 없는데 손님 많아지면 그만큼 정성이 사라지니까.
아니.
“나….”
여긴 본래부터 그녀의 자리였다..
“나 봉순이를 좋아해.”
가격은 대책 없이 싼데 원료는 비싼 걸 고르는 그녀가 의아했다. 떠나보니 알겠다. 우연히 발견한 작은 카페에서 허기진 배를 태리의 토스트로 채우고 마로의 커피를 마셨다면, 난 아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들 모두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봉다방은 그런 곳이다. 그리고 봉다방은, 곧 봉순이다.
그녀의 이름은 금봉순.
"봉순이를 좋아해."
그녀가 보고 싶다.
봐야겠다.
"미안. 먼저 올라갈게."
숲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