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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5. 2016

시간 여행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시도

호남 : 호랑말코 남자
불녀 : 팔불출 미녀


호남: 차 엄청 막히네.


불녀: 아휴…

호남: 왜, 화장실 급해?


불녀: 그게 아니고. 아휴!

호남: 뭐, 뭐야. 왜 그래...


불녀: 어제로 돌아가고 싶어!

호남: 어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불녀: 어제 먹었던 삼겹살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호남: 아...


불녀: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정말 그런 거야?


호남: 보통은 말이지. 후회스러운 일을 되돌리고 싶어서 과거로의 여행을 원하는데. 삼겹살 때문이라니 순수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배고픈 돼ㅈ…


불녀: 멍청이! 다른 이유도 있어. 연휴가 끝나는 게 너무 싫단 말이야. 어제로 돌아가서 '내일 늦잠야지'라는 행복한 생각과 함께 맛 좋은 삼겹살을 먹고 싶어. 그리고 집에 가서 느지막이 잠에 드는 거지!


호남: 어째서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었던 내 얘기는 없는 걸까... 뭐 아무튼, 영화처럼 어디선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어제의 삼겹살을 다시 먹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불녀: 말 안 해줘도 알거든.


호남: 그런데 그거 알아? 어쩌면 시간은 흐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불녀: 또 무슨 괴상한 소릴 하려고.


호남: 우리의 지나간 과거, 보고 듣고 느끼는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 이 모든 일들이 그저 한 순간에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거야. 인간의 뇌가 그걸 '시간의 방식'으로 이해할 뿐이지.

불녀: 시간의 방식?


호남: 응. 얼마 전에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글을 보았는데 여러 견해 가운데 눈에 띄는 글이 있었어. 시작과 끝이 애초에 없었다는 거야. 예컨대 동그란 원 같은 거지.

불녀: 원?


호남: 응. 여기 동그라미가 하나 있다고 치자. 이게 어떻게 그려졌을까?

불녀: 이렇~게?


호남: 맞아. 보통은 너처럼 일정한 점을 찍고 선을 이어서 원을 완성시켰다고 생각할 거야. 시간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는 시작과 끝이 꼭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그 원은 도장을 찍어서 그린 걸 수도 있어. 적어도 그 차원 내에서는 애초에 시작과 끝이 없었던 거야.



불녀: 아, 알겠는데. 좀 어렵네.

호남: 응. 사실을 나도 잘 몰라. ㅎ 쉽게 얘기해서 그 원을 이 세상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과거, 현재, 미래까지 마치 도장으로 꾹 찍은 것처럼 한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거야. 단지 인간이 그 '순간'을 뇌의 사고체계를 이용해서 최대한 느리게 세분화시킨 셈이지. 365일로,  24시간으로, 60분으로, 60초로.


불녀: 그렇게 하면 '순간'이 마치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호남: 응. 슬로우 비디오처럼.

불녀: 그게 가능한가?


호남:  순간이라기보다는 원처럼 어떤 형태로 이해하면 돼. 사실 우린 원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건데 바싹 달라붙어서 천천히 보는 거야. 마치 어느 점에서 시작되어 그려진 것처럼 선을 따라가는데, 그게 곧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인 셈이지.

불녀: 그럼 나도 지금 시간에 바싹 붙어있어?



호남: 지금은 바싹 붙어있다고 보긴 어려워. 항상 시간을 초단위로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마도 조용한 방 안에서 초침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시간에 바싹 붙게 되지 않을까? 반면에 삼겹살을 먹는다거나, 어떤 일에 몰입할 때는 마치 순간처럼 시간이 가버리잖아. 시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조금 멀어져서 그런 걸 거야.

불녀: 잊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났어. 삼겹살.


호남: 아, 미안….

불녀: 아니야. 계속해. 재밌네.


호남: 응. 그런데 이게 어쨌든 하나의 순간이고 형태니까, 언젠가는 인간도 그것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결국 그 모든 형태를 다 보게 되는 거지.

불녀: 다 보면 어떻게 되는데?


호남: 글쎄. 흐름이라고 느낀 것이 사실은 전부 연결된 일종의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전체에 일부이자 어느 것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거고, 과거나 미래도 존재하지 않으니 너가 말하는 시간여행도 큰 의미가 없겠지. 고로 넌 어떤 시점에나 삼겹살과 함께일 수 있어.



불녀: 또, 삼겹살!

호남: 아, 미안…. 어쨌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너가 원하는 타임머신은 바로 우리의 뇌에 있다는 결론이 나와. 뇌의 집중점만 바꿀 수 있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잠시나마 시간여행을 하는 셈인데, 그 집중점을 '어제의 삼겹살'로 완벽하게 옮길 수만 있으면 넌  그때로 돌아갈 수 있어.


불녀: 진짜? 어떻게 하는 건데?

호남: 못해….


불녀: 왜! 왜 못해! 내가 못할 것 같아!?

호남: 아니, 네가 못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잖아. 이미 시간의 방식에 맞게 형성된 뇌구조를 갑작스레 변화시키는 건 당연히 어렵겠지. 지금 당장 너가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어? 모든 건  그대로인데, 네 생각만 확신할 수 있냐는 말이야.  


불녀: 아니. 난 여잔데. 그것도 이쁜.

호남: 그, 그치? 이건 그보다 수억만 배 더 어려운 생각의 변화야. 오히려 그래서 가능한 사람들이 있고.


불녀: 누군데?

호남: 아기들. 아기는 시간의 개념이 없어서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대.


불녀: 그래? 난 기억 안 나는데?

호남: 당연하지. 지금 너의 존재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시간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니까.


불녀: 점점 더 모르겠당. 어쨌든 어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

호남: 맞아. 하지만 내가 이런 얘길 꺼낸 이유가 있지!.


불녀: 뭔데? 차 막혀서?

호남: 흐흐 아니. 난 시간여행이 가능하거든.


불녀: 그래? 어떻게?

호남: 시간여행 티켓을 구했어.


불녀: 장난칠래?

호남: 장난 아니거든! 얼마나 힘들게 구했는데. 뭐, 어제까지는 아니지만 2~3시간 전으로는 돌아갈 수 있어. 갈까?


불녀: 지금 바로?

호남: 당연하지. 자, 그럼 지갑에서 티켓을 꺼내고… 아? 앗.


불녀: 왜?

호남: 설마.


불녀: 왜 그러는데!?

호남: 아악, 큰일 났다!


불녀: 왜? 티켓이 없어졌어?

호남: 아니, 지갑이 없어!


불녀: 지갑이 왜 없어?

호남: 아까 음식점에 두고 왔나 봐!


불녀: 멍청이! 출발한지 2시간이나 지났는데 지금 생각난 거야? 아하! 마침 과거로 가려던 참이니까 가서 갖고 오자!

호남: 멍청이는 너야! 티켓이 지갑에 있다니까!


불녀: 아... 멍청이들! ㅠㅠ

호남: 멍청이들. ㅠㅠ


불녀: 언능 돌아가자. 차 돌려.

호남: 그래야겠다. 근데 너 어떡해? 갔다 오면 12시도 넘을 텐데.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불녀: 어쩌겠어. 갔다 와야지. 그르게 신경 좀 쓰고 있지!  




호남: 흐흐흐.

불녀: 왜 그래…. 맛이 가고 있어?


호남: 여기 있네 지갑. 가방에 넣어 두었었나 봐.

불녀: 진짜? 아싸뵹~ 다행이다!


호남: 흐흐흐.

불녀: 뭐야, 장난친 거야?


호남: 어떠신가.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

불녀: 뭐?


호남: 조금 전까지 당신은 지갑을 찾은 후 세 시간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생각이 집중되어 있었다. 세 시간 후에 일어날 일이지만 변하지 않을 미래였기에 당신의 뇌는 그곳으로 가있었던 것이지!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다시 과거로 돌아왔지 않는가?


불녀: 뭐야, 그게 시간여행이라고?

호남: 응. 지갑을 가지러 가던 2시간 전으로 돌아온 거지!


불녀: 그거 하려고 이 막히는 시간에 차를 돌렸다고?

호남: 응! 놀라워라 뇌의 신비.


불녀: 남자 때리는 여자 만들 거야?

호남: 아, 아니! 그럴 순 없지. 집으로 가자!






불녀: 솔직히, 시간을 번 것 같은 느낌은 조금 드네.

호남: 허허, 대한민국 다 뒤져봐. '시간'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애인 있는지. 그거 돈 주고도 몬사요!


불녀: 아이고, 고마워서 아주 그냥 눈물이 다 나오네.

호남: 으, 응. 고마운 표정이 좀 무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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