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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9. 2016

성별이 세 개였더라면

미숙했던 지난 사랑의 고백


성별이 세 개였더라면, 하고 생각하던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관계의 깊이와 소유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내 방식대로 상대를 끌어당겼고 더 많은 것에 관여하고자 했다. 그녀는 순응했다. 난 그녀의 삶 곳곳에 침투했다. 그만큼 우리는 틀어졌다.



밀착할수록 갈증만 더해지던 연애의 급류 속에서, 미숙하고 유약한 자신이 두 명이길 바랐다. 관계의 크기 자체가 변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균형감 있는 사랑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넌, 한 명 더 필요하다는 거지? 남자? 여자?"


지인들에게 이 개념을 이해시키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 가지 성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녀 중 하나의 성별이 더해진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의 이해와 상관없이, 난 이미 그 세계를 상상 속에 창조했다. 그곳을 '삼각연'이라 불렀다.


이곳에선 세 가지 성별이 하나의 연인관계를 이룬다. 각각의 성을 1성, 2성, 3성으로 명명했다. 거리에선 손을 맞잡고 다니는 세 명의 무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극장의 커플석, 롤러코스터의 열차 한 칸, 식당의 테이블, 모든 자리 단위는 세 명을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자동차의 좌석 구조도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목욕탕 운영하기 힘들겠다."


얘기를 듣던 몇몇이 조금은 이해를 하며 삼각연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들과 나는 새로운 세계의 많은 것들을 짚어내며 새로이 구성했다. 연인마다 세 개의 반지를 팔 수 있으니 더 많은 금은방이 생겼다. 누군가는 영화제의 시상 트로피를 언급했다. 대상만 세 개다. 같은 공간에 더 많은 화장실을 만들어야 하니 변기와 세면대의 크기가 작아졌다.


어떤 것들은 지금의 균형을 깨야만 좀 더 안정적인 가치를 가졌다. 시소는 한쪽이 더 길어졌다. 식당 테이블은 사각보다 삼각 모양이 많아졌다. 소주병의 크기도 달라졌다. 막잔이 반잔으로 끝나도록 설계된 과학의 정수는 세 명 기준에 맞게 재설계되었다. 어쩌면 소주잔 크기를 바꾸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결혼식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스웠다.


성 불평등, 솔로군단 감소, 성범죄 문제, 조별과제, 군입대, 취업난 등, 점차 우리에게 밀접한 사회현상을 다루며 그 세계는 좀 더 촘촘해졌다. 그쯤 우리는 그들의 연애방식을 정의했다. 삼각연에서도 두 사람이 연애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불완전하다. 굳이 수치로 표현한다면 2/3 수준이다. 이들은 더 완성된 형태의 관계를 위해 나머지 하나의 성별을 찾는다. 때문에 둘일 때에는 더 적극적이고 남성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당연히 솔로들은 여성적인 성향을 갖는다. 관계의 크기에 따라 성향이 달라지는 셈이다. 아마도 부킹 술집 같은 곳에는 두 명이 돌아다니며 구애하는 모습이 많이 보일 것이다.


역시 누군가는 성관계에 대해 물었다. 나는 세 사람이 삼각형 모양으로 누워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1성은 2성에게만 2성은 3성에게만 3성은 1성에게만 완전한 쾌락을 전하며 자신의 신체 일부를 반영할 수 있다. 미친놈 소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주제는 누가 잉태와 출산의 주체인가에 대한 것으로 빠르게 넘어갔다. 결국 셋 중 누구나 랜덤하게 임신할 수 있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한 명이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눈물지으며 안아주는 두 명을 상상했다. 머리 맞대고 행복해하는 세 명의 모습을 그렸다.


삼각연에선 하나의 연인관계가 완성되기 꽤나 어렵다. 그만큼 관계가 깨지기도 어렵다. 세 명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남녀관계가 시작과 끝이 있는 '선'의 개념이라면, 삼각연에서의 그것은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는 '원'의 개념으로 바뀐다. 원을 둥글게 그리는 것 그리고 시작한 지점으로 선을 연결하는 건 힘들지만 일단 그려지면 그건 좀 더 높은 차원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 견고해진다.



당연히 이들은 견해나 성격차이 등으로 갈등할 때 '남녀'보다 타협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우린 그 전제를 입증하기 위해 각각을 하나의 성별로 정했다. 친구 녀석은 왜 내가 저 뱅어포 같이 생긴 놈의 애인이 돼야 하냐고 볼맨 소리를 했다. 고만고만하게 생긴 것들끼리 티격태격했다. 나는 신이 버린 얼굴이란 소릴 들었다. 그렇게 한 차례 소란을 거친 후에야 세 명의 연인을 만들었다. 두 명의 갈등 상황을 재현해보았다. 사소한 문제를 반복시켜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지독하고 침전된 갈등을 겪는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시원하게 들을 곳은 없다. 연인관계는 소위 말하는 케바케(각각 다름)라서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세 명이었다. 당사자가 한 명 더 있다. 뱅어포에게 갈등을 중재해달라고 했다. 그는 우리 둘을 각각 달래기도 하고, 잘 안되자 한쪽의 얘기에 좀 더 무게를 실으며 다른 쪽을 압박했다. 모든 연인이 그렇듯, 주제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얘기들이 많이 오갔지만 묘하게도 타협을 이룰 수 있었다.






연인 관계의 종결을 얘기할 때쯤, 내가 삼각연을 만들어낸 이유를 깨달았다. 꿈속의 주먹질만큼이나 뜻대로 안 되는 연애에 지쳐있었다. 그렇게 어딘가로 도망가버리고 싶기도. 한편으로 그럴 자신도 없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였다.


삼각연에서도 연인관계는 깨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경험의 질은 좀 다르다. 세 명 모두가 다시 혼자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한 명이냐 두 명이냐에 따라 떠나는 이와 남는 이가 된다. 떠나는 이는 쫓겨난 이가 되어 지옥 같은 시간을 겪는다. 그러나 남는 이들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 실연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당사자가 있는 셈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갈 것이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나, 남아서 서로 자위하며 다음 관계를 기다리는 둘의 모습이나 나에겐 무척 슬퍼 보였다. 내가 경험할 이별의 시간들이 그럴 것으로 보였다. 그날 나는 그녀와 크게 싸웠다. 그리고 이별을 전했다.



돌아봤을 때, 당시의 나는 '남는 두 명'도, '떠나는 한 명'도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뜸 들이는 얌체였을 뿐이다. 관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하나 되는 걸 깊은 관계의 핵심이라 여겼다. 내 어떤 면들이던 이해해주길 원했다. 밑바닥에 있는 모든 걸 꺼내보이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불쾌한 기색에 사랑이 아니라며 화를 냈다. 그녀는 사과했다. 사과를 볼모 삼아 많은 것을 얻어냈다. 꽤나 유리한 위치에서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결정권자였다. 지독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잘난 칼자루를 던졌다.


이별을 겪으며 깨달았다.

관계를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다.


더 많은 걸 원하던 남자와 묵직하게 절실하게 기다리던 여자, 이별의 순간까지 날 이해해줬던 그녀가 있을 뿐이다. 근사한 결말 위해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했다. 그 토사물이나 다름없는 것들까지 안아주던 그녀였다.


슬픔에 목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새벽 길목을 눈물로 적시며 지난 시간을 곱씹었다. 그렇게 작게 되네였다.


너는 사랑을 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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