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신문과 방송에 김정은과 트럼프의 거친 언사가 오가며 불안했던 날, 외국에서는 곧 전쟁이 터지는 것 아니냐고 난리였다. 매달 민방공 훈련까지 받으며 자란 우리도 불안한 마음 없지는 않았으나 다른 때처럼 라면이나 생수 사들이기도 안 하며 의연하게 세계 동태를 살폈다. 하물며 우리는 두 딸만을 남겨둔 채 예정된 남편 친구들의 환갑 기념 여행지 유럽으로 왔다.
그리고 마주한 베를린은 청명한 하늘에 하얀 구름을 수놓은 채 너무나 평온하다.
2차 세계대전 후 열강들에 의하여 우리는 남과 북으로, 독일은 동과 서로 나뉘었다. 그리고 30여 년 뒤, 그들의 장벽은 어느 날 자연스럽게 무너졌고 베를린을 두 동강 냈던 두터운 콘크리트 벽은 어느새 사라지고 극히 일부 만이 남아 역사의 현장이 된 채 관광지가 되어 있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삭막한 비무장지대 앞, 38선의 뾰족한 철사 줄 앞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우리네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또 얼마 전까지 곧 통일이 되어버릴 것만 같던 화해무드는 잊혀 버린 것인지... 우리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계열강들의 꿍꿍이에 의하여 조정되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도로에 박혀있는 벽돌 조각들이 장벽이 있었던 곳이란다. 그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자동차!
우리도 언젠가는...
독일의 분단은 우리처럼 철저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나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이 나누어 놓은 것이어서 처음에는 서로 자유롭게 왕래를 했다. 그러나 서독의 경제적 부는 동독 사람들을 서쪽으로 넘어가게 하였고 그 이탈이 점점 많아지자 동독에서는 장벽을 높이 더 높이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아졌던 장벽이 1989년 11월 9일, 샤보브스키의 "외국여행 자유화 " 발표 단상에서 출국규제를 완화한다고 발표한다는 것이 출국이 인정된다고 실수로 말하는 바람에 독일이 통일이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역사적 인물인 된 샤보브스키는 독일 재통일의 주역이지만 과거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동독인 다수를 총격·살해한 전적이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처음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해 세워졌다. 그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북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한 프로이센의 국력을 과시하고 평화의 상징으로서 베를린에 새로운 관문이자 랜드마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새로운 관문의 자리는 당시 존재하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허물고 평화의 상징으로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하여 짓기 시작했으나 건립되기 직전에 프랑스혁명이 발발했다. 프로이센 군을 박살 낸 나폴레옹은 베를린으로 입성할 때 이문으로 들어오게 되어 개선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몸살을 앓던 이곳은 동서 베를린을 나누는 경계선의 기점이 되었으나 동서독 통일이 되면서 다시 통일의 상징이 된 역사적인 곳이다
우리나라 의정부역에 세워진 브란덴부르크 문. 또, 높이 3.5m, 폭 3m의 회색 벽은 실제 '베를린 장벽'의 일부로 베를린시(市)가 서울시에 선물한 것이다. 우리도 독일처럼 어느 날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고 우리의 38선의 철조망을 다른 나라에게 선물할 날이 오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