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엄마~"
10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뒤 요즘처럼 엄마를 많이 불러 본 적이 없다. 마취에서 깨어나 고개를 파묻고 고통에 떨고 있을 때 어깨를 살포시 안으며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간호사 앞에서 나는 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아이를 낳았을 때도 울지 않았건만.
어느새 만우절 운운하는 것을 보니 3월도 다 가버렸다. 어린아이 투정하듯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통증이 올 때마다 나는 내 몸을 쓰다듬으며 사과를 해보지만 아직도 화를 풀 생각이 없는가 보다. 아프다고 아우성치는 다리로 열흘도 넘게 돌아쳤으니 성이 날 만도 하다.
여행 다녀온 지 한 달도 안 되었건만 어느새 저 먼 기억 속으로 남겨져 버렸다. 사진 파일을 뒤지다 내 손이 머문 곳은 지중해와 알프스의 끝자락에 있는 남프랑스의 소도시 아를이다. 그 도시가 특별히 아름다웠다기보다는 공원 등의 풍경 앞에 세워진 고흐의 그림 때문이다. '아를의 연인들'그림 앞에 서자 고흐가 캔버스를 펼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림과 풍경이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영화 '러빙 빈센트'의 장면들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그의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화가로서 그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생전에 부를 누렸던 천재 화가 피카소와 달리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고흐는 생전에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서 1890년 7월 자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10여 년 동안 80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으나 그가 살아 있을 때 판매가 이뤄진 그림은 단 한 점뿐이었다니 그의 생활이 얼마나 궁핍하였는지는 상상할 수 있다.
고흐가 걸었을 석조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걸어본다. 목사가 되지 못하여 부모님과는 불화를 일으켰고 첫사랑에 실패한 후 그림에만 전념하며 살았으나 그 또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하였던 빈센트 반 고흐.
오로지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편지를 주고받으며 폐쇄적으로 살았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괴팍한 화가로 불렸다. 사람의 영혼에 흥미를 느껴 모델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모델을 구하기는커녕 그림 재료를 살 돈조차 없었기에 그가 그릴 수 있는 것은 그가 사는 주변 풍경이었고 인물을 그리고 싶었으나 모델이 없어 자신을 그렸기에 자화상이 많다고 한다.
아를 시청 뒤편에 있는 자그마한 포름 광장에서 눈에 띄는 노란색 건물이 고흐가 즐겨 찾았고 그의 작품 중 '밤의 테라스 카페'라는 작품의 실제 배경이다.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프로방스에서 유명한 시인 프레데릭 미스트랄이다.
고흐가 말년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정신병원은 현재 주민센터, 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노란색 건물 가운데 정원에는 분수와 함께 봄꽃이 예쁘게 피어 있어 고흐가 그린 그림과 같다. 정신병에 걸려 독주 압생트를 마시고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알려졌으나 연구결과에 따르면 귀의 잘린 모양이 남에게 잘린 듯하다 한다.
그 당시 같이 활동하던 고갱은 고흐와 달리 대중적 그림을 선호하였고 아마도 둘의 의견이 맞지 않아 언쟁 중에 펜싱을 하던 고갱의 검을 피하려다 다친 것이 아니냐는 설도 나오고 있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이 된 론강은 밤에 가로등 아래에서 보는 것이 더욱 멋있었다. 어두움 속에서야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나 반짝이는 하늘의 별이 더욱 화려하게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각박한 생활 속에 그에게 꿈을 주는 반짝이는 별이야말로 독주보다도 그에게 더 큰 위안이 되었을 것 같다.
안쓰런 마음으로 강둑을 걸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비록 생전에 대접을 받지는 못했을지라도 사후에라도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행복해하지 않을까? 귀를 자른 괴팍한 화가로만 알던 고흐에 대하여 다시 살펴보게 된 아를로의 여행은 나에게 오래도록 간직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