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제, 다산초당, 백운동 정원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요, 개혁가다. 개혁과 개방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던 다산 선생은 1789년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10여 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벽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정치적 진로에 큰 장애가 되어 1801년 천주교 교난때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의 여파로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된 동안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 연구에 더욱 매진하여 실학을 완성시키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 이란 뜻의 사의제는 다산 선생이 강진에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그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주막 할머니의 권유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학문연구에 힘써 조선 실학의 대가로 발돋움하게 되며, 먼 바닷가 마을 강진에 '문명의 고을'이라는 명예를 안겨 주었다.
현재 사의제 뒤편에 마련된 한옥마을은 숙박과 여러 가지 문화체험이 가능하도록 꾸며졌다.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이곳 숙박은 미리 강진군청에 예약해야만 한다.
그 후 다산 선생은 보은산 고성사의 보은 산방에서 다시 1년 가까이 머무르게 되는데 6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52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기며 강진茶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1806년에는 다산 학단의 일원이던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저술에 힘쓰며 실학 집대성에 매진하게 된다.
1808년 봄, 다산은 도암 귤동마을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니 이곳이 다산 초당이다. 유배가 해제되기까지 10여 년을 머물며 천여 권의 장서까지 갖춰 놓고 윤단의 손자 6명을 포함한 초당 18 제자를 교육하며 불후 불멸의 저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 권의 저술을 완결 짓는다.
호남의 3대 정원인 백운동 정원은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가 꾸민 정원으로 다산 선생과 초의선사 이시헌 등이 교유하던 호남 전통 별서정원(세속의 벼슬이나 당파 싸움에 야합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하여 전원이나 산속 깊은 곳에 따로 집을 지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려고 만들어 놓은 정원)이다. 다산 선생의 백운첩은 초의선사를 비롯한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백운동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한 후 백운동의 풍광을 시로 쓰고 그림으로 그린 시첩이다.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인 백운동의 정원은 마치 비밀의 정원처럼 울창한 원림 안쪽에 소박하고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18년이란 유배시절이 정치가 다산 선생에게는 불운의 시간이었지만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로서는 아주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다산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강진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준다. 고향 같이 푸근한 고장 '강진'에서는 왠지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복잡한 세상살이가 단순해진다. 여행 내내 따라오는 월출산의 기암절벽 때문일까? 아니면 골 따라 심어진 녹차밭?